00042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노인은 말없이 길을 따라 다시 움직였다.
사내는 툴툴거리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고, 가끔씩 표정을 찡그렸다.
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감탄했다.
맑고 깨끗하구나!
푸르고 높아.
하늘을 올려다 본 게 얼마 만일까?
듬성듬성 떠있는 구름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하염없이 흘러간다.
빠르지는 않지만 그 움직임은 꾸준했다.
태양은 눈부시고, 따스했다.
땅이 생명력을 한껏 뽐내며 풍성한 열매를 선물하듯 하늘도 이렇게 올려다보고 있으면 무언가 값진 것을 주는 것만 같았다.
오늘이 아니라 좀 더...일찍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많이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어제 정도만 되었어도 말이야.
지금은 이렇듯 멋진 풍경을 보면서도 순수하게 감탄할 수가 없구나.
애초에 노인이 시선을 하늘에 둔 것은 무엇 때문이던가?
눈물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노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쓰라린 가슴을 참아가며 이렇게 그렁그렁 눈물로 가득 찬 눈으로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기어코 눈물은 한계치를 넘어버린다.
뺨을 타고 아래로...그리고 다시 아래로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소리는 없다.
일체의 아무런 소리 없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세상은 무엇 하나 바뀐 것이 없다.
여전히 푸른 하늘과 서늘한 바람, 따스한 햇살이 비춰 내린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중년 사내는 곁에서 길을 걷고, 노인도 여전히 지팡이를 의지해 걷고 있지 않은가?
울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거야.
아직 절반씩 나누기로 했던 걸 7대3으로 나눈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하겠다고 사내가 일방적으로 말했을 뿐이다.
물론, 내게 번복시킬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바쁘게 벌어지고 있어.
나는 많은 도시에도 가봤고, 사람도 여럿 만나봤지.
그야 곡예사가 직업이고, 여행이 삶이니까.
지금도 어디선가 다툼이 일고, 고함이 울려 퍼지고 있다.
칼부림이 오가고, 피가 튀겠지.
비명, 울음소리, 구걸, 비웃음...
비참한 것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
누군가는 이런 좋은 날, 부부가 될 수도 있지.
마을이 잔치를 열고, 짓궂은 농이 오가고, 싸지만 얼마든 취할 수 있는 술을 마시는 거야.
그리고 밤을 맞겠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어두운 방에서 사랑의 몸짓을 이어가고, 신음을 흘리고, 사랑을 속삭이지.
세상엔 오로지 둘만 존재하고,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는 시간이 찾아오는 거야.
그러나 그들의 흘러나오는 신음을 들으며 문 밖에서 흐느끼는 녀석도 어딘가는 있다.
분명히 있어.
노인은 추억에 잠기듯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를 띠우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도 있지.
저 북쪽에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으니까.
매일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가 죽어갈 거야.
사람의 목숨이 짐승과 다를 바 없지.
비명...
그리고 또 비명...
그리고 좀 더 큰 비명...
여기...저기...
그리고 다시...여기...
끝도 없이 이어지지.
깊숙이 파고드는 창과 귓가에 울려 퍼지는 고통의 여운...
끝까지 남는 것?
부러진 검과 주인을 잃은 팔다리, 그리고 눈을 부릅뜬 시체...
역겨운 피비린내...
하아...하아...
어떤 처녀는 빚이나 형편없는 아버지의 술값 때문에 몸이 팔리고, 오늘밤 처음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내들에게 몸을 유린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아는 어떤가?
굶주림에 허덕이며 빈민가 골목에 주저앉아 손가락을 빨며, 아직 오지도 않은 겨울을 걱정하겠지.
이제 충분하다.
노인은 쓰라린 마음을 어루만질 소재는 얼마든 알고 있다.
실제로 보았고, 몇 가지는 겪어도 보았다.
남들의 불행, 나의 과거의 불행...
그런 것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이 겪어야 하는 아픔을 상당수 씻어내 준다.
아니...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건...그래...
고통은 그대로다.
고통이란 것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약처럼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지.
혹은 잠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두는 걸지도...
아무튼 당장의 아픔에서 한걸음 물러날 수는 있지.
그거면 된 거야.
돈을 지금보다 좀 적게 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나이에 벌이가 조금 준다고 그리 속상해 할 필요는 없다.
모두 각자의 짐을 어깨에 지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야.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말자.
노인의 눈물만큼 추한 것이 또 있으려고?
노인은 괜히 중년 사내에게 뭔가 한소리 들을 것 같아 얼른 팔뚝을 들어 눈꺼풀 주위를 한번 훑었다.
그러나...
노인의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도 이미 알고 있다.
돈...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진실은 혹은 가치 있는 것은 그 이면에 숨어있지.
돈 따위는 얼마를 벌든 상관없다.
내가 실망하고, 내 가슴을 문드러지게 만드는 것.
그것은 단순히 내가 평소의 씀씀이를 줄여야 하는 것에 있지 않다.
나는 돈이라는 척도로 현재 나의 가치를 재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내가 살아온 지난날 전부를 끼워 넣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사내는 노인에게 ‘과거를 논하지 말라’ 하지만 사람이란게 어찌 과거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루하루 내 기쁨도 슬픔도 모여 만들어진 것이 과거가 아니던가?
과거가 모여야 비로소 한 사람의 인생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멀리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흐릿하다.
눈을 부릅떠도 변하는 것은 없다.
오히려 더 지칠 뿐이다.
이것은 육체적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내부에 깃든 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부턴가는 좋든 싫든 과거만 생각하고, 과거만 말하게 된다.
슬프게도 더 이상 그럴듯한 꿈은 꿀 수 없다.
점점 작고 보잘 것 없는 꿈만 꾸게 되는 것이다.
노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인정하는 것.
이제 지금보다 더 대단한 것, 멋진 것을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갈수록 줄어드는 남은 시간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수 없다.
그래.
이것이 어쩌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노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그리고 다시 하루...
느끼는 거다.
내 몸에 기운이 없어지고, 눈이 쇠하고, 기침이 잦아지는 것을 생생히 느낀다.
애써 숨겨도 어느 순간부터는 피할 수 없다.
‘영감...노인...할아범...노인네...’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다.
발버둥 쳐도 언젠가는 오는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자연스러움.
그리고 하나의 이치...
허..허허! 허허허허!
그래도 이 멍청한 늙은이는 추억해 본다네.
과거를 매일 같이 뒤지고 파헤쳐서 그럴듯한 것을 떠올려 보려고 말이야.
물론, 그러다 보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오지.
밥맛도 뚝 떨어질 법한 것들이 한 가득이야.
곁에서 툴툴 거리며 걷는 저 사내를 언제 처음 만났더라?
12년? 아니 13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놈은 형편없는 곡예사였다.
그러나 뭐에 이끌렸는지 아낌없이 재주를 가르쳤다.
힘들고 고된 일도 많이 있었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잘 해냈다고 생각했다.
사람일이라 가끔 언성을 높이고 다투지 않을 수야 없었다.
그러나 앙금을 남길만한 일은 없었다.
아마도...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막연하긴 했지만 내 삶의 마지막을 지켜봐 주는 이가 있다면 그건 저 사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건 그리 나쁜 형태의 죽음은 아니었고, 나름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같이 꿈을 꾸고, 같은 일을 해온 사람이 그 곁에서 자신의 꿈도 건네받고 눈물로 마지막을 장식해 주는 것은 꽤 노인이 바라는 죽음의 형태였다.
얼마 전까지...
아니...조금 전까지 노인은 그런 꿈을 꾸었다.
그 정도는 아직 꿀 수 있는 기운이 있었고,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오늘 조금 더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은 그가 다시 손에 넣기 힘든 저 멀리 혹은 아직은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역시나 손에 닿지 않는 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놈은 나쁜 놈이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자 사라졌던 섭섭함과 슬픔이 다시 밀려온다.
하지만 삶이란 끊임없이 반복된다.
하늘 아래 새것이 있던가?
노인은 자신이 노인이 되기 전 자신을 가르친 사람에게 저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래.
놈이 나쁜 놈이라면...나도 나쁜 놈이었다.
노인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 자신이 받은 것 같은 상처를 오래전 다른 누군가에게 남기고 온 셈이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노인은 다시 조금 더 형편없고, 덜 멋진 꿈을 찾아야 한다.
다시 그의 손이 닿는 곳에서 가장 멋진 것으로.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도 다시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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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웠으면...좋겠어...”
“뭐?!”
낸시가 뭐라 뭐라 중얼거렸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되물었다.
그러자 낸시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혹은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정말! 또 아파서 앓아누웠으면 좋겠어!!! 거짓말쟁이!!! 심술쟁이!!! 악마!!! 바보!!! 멍청이!!!”
나는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났다.
계집애...괜히 성질을 내고 지랄이야...
제...젠장...
“너 도련님한테?! 감히!?”
낸시의 기세에 내가 가진 코딱지만 한 권세로 내리눌러보려고 했지만 낸시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고, 꽤나 매서웠다.
“그렇게 만지고 싶어요? 자! 만져요! 가슴...만지라고!!!”
낸시는 내게 한 발짝 다가서며 자신의 가슴을 앞으로 조금 내밀었다.
그래봤자 크진 않고 살짝 있나 없나 싶은 정도지만...
그래도 전에 만져봤을 때는 분명 살짝 물컹했었더랬지.
계집애...만지라면 못 만질 줄 알고?!
그러나 매섭고 어딘지 억울해 보이는 눈빛과 시선이 마주치고 보니 차마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댈 수는 없었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따..딱히 만지고 싶은 건 아니고...”
“만져요! 가슴! 만져요!!!”
그러나 낸시, 요 계집애 한번 터지고 나니 완전 실성한 건지 가슴 만지라고 난리를 친다.
확! 그냥!?
진짜 만져 버릴라?!
그러나 이런 마음과는 다르게 그녀가 다시 내게 한걸음 더 내딛자, 나는 또 한걸음 물러났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애가 미쳤나?
계집애 자꾸 왜 이래?!
“아...안 만진다고!! 작은...게딱지 가슴 흥미도 없고...가..가라..이제...가서 물레나 돌려...”
“왜요? 가슴 만지라고요!!! 전에도 분명 만졌잖아요? 자기 거라고 말하면서 막 만졌잖아요?!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래요?! 가슴! 만져요!”
그때였다.
갑자기 ‘투둑’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낸시와 내 시선이 동시에 그리로 향했다.
거기엔 토미가 입을 쩍 벌린 채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술은 떨렸고, 눈빛은 흔들렸다.
가끔 ‘어버버~’하는 바보같은 소리도 냈다.
손가락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추측컨대 낸시의 가슴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때를 기점으로 낸시의 기세는 완전히 힘을 잃고 꺾여 버렸다.
조금 전의 앙칼진 목소리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봄날의 처녀처럼 부끄러운 떠듬거림이 이어진다.
“토미...오빠?...이..이건 아니에요! 그..그러니까...오해예요....도..도련님, 뭐라고 좀...”
낸시야, 얼굴에 불나겠다.
그러기에 내가 싫다니까...기어코 별로 있지도 않은 가슴을 마구 내밀더니...쯧쯧쯧...
내가 의미 있는 미소를 짓자, 낸시는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대체로 진지하지만 가끔 느물거리는 표정을 섞어가며 낸시를 변호해 주었다.
“토미, 이건 오해야. 네가 어디서부터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낸시가 자기 게딱지 가슴을 내밀며 내게 마구 만지라고 윽박지르던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오해야. 그러니까 괜히 오해하지 마. 알았지? 그리고 내가 기어코 만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전부 오해야. 원래는 만지려고 했거든.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가 만지려고 했던 거야. 내가 손을 뒤로 물리며 안 만지려고 했던 것도 전부 잘못 본거고. 안 만진다고 내가 계속 싫다고 소리친 것도 전부 오해야. 그러니까 여기서 네가 본 것은 전부 오해야. 낸시는 절대로 이 도련님께 완전 사랑에 빠져서 사랑을 갈구하는 발랑 까진 계집애가 아니야. 네가 자꾸 따라다녀서 귀찮다고 말하지도 않았어. 완전 오해야. 알았지?”
“무...무슨 소리를...!”
낸시가 말을 더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