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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44화 (44/200)

00044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낸시는 한참 만에 뺨을 때리던 것을 멈추었다.

그녀의 호흡은 거칠었고, 어깨는 끊임없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 결과로 내 뺨은 무척이나 화끈 거렸다.

그럼에도 내 손은 여전히 낸시의 절벽 가슴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끝까지 움켜쥐고 있던 손은 결국 낸시가 탁 소리 나게 쳐버림으로써 그 자리를 이탈하고 말았다.

내 손은 힘없이 낸시의 절벽에서 굴러 떨어졌다.

데굴데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나와 낸시의 서선이 허공중에서 얽혔다.

그녀의 눈에 가득 맺혀 있는 물기는 내가 두 번째 보는 것이었지만 첫 번째보다 더 조용했고, 조금 더 슬퍼 보였다.

심지어 그 물기는 뺨으로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건 확실히 더 슬픈 눈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정말로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장난은 더 이상 장난으로 남을 수 없게 되었고 소녀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만 것이다.

그녀의 입술이 조그맣게 열렸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미세하게 공기가 떨렸다.

절대로 큰 소리는 아니었다.

아마 그 순간 어디선가 아주 작은 소리라도 들려왔다면 나는 그녀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운이 좋았던 건지 혹은 운이 없었던 것인지 그 순간 소리를 만들어 낸 건 낸시밖에 없었다.

그녀의 떨림은 작았지만 꽤 큰 상처를 담고 내 귓가를 스쳤다.

“...정말..싫어...”

그녀는 돌아섰다.

빠른 걸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가 붙잡지 못했다.

도무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그 순간 했던 것은 정말로 의미 없는 짓이었다.

난 내 손을 내려다보며 아직도 남아 있는 감촉과 그것이 그녀에게 준 어떠한 의미, 혹은 감정에 괴로워했을 뿐이다.

여전히 내 뺨은 얼얼했다.

하지만 그것을 불평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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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나로는 순식간에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비슈가 없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 아비슈의 방에 가보았다.

그러나 아비슈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정말...어디 있는 거야? 모처럼 데려가 주려고 그랬는데...바보같이...”

속상한 표정을 지은 채 헤나로는 툴툴거렸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오빠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다면 아비슈는 이 시간 어디 있을까?

그 답은 토미에게 물어야 할 것 같다.

토미는 마음에 가득 상처를 안고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헤맸다.

인적이 뜸한 창고 뒤편에서 그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분했고, 창피했다.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우리 집에 돈이 많았다면 낸시가 사랑을 속삭이고 가슴을 만져 달라고 구애하는 대상은 분명 도련님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아니야...

그는 이내 그것을 부정했다.

낸시가 돈 따위에 혹해서 도련님과 그런 관계가 되진 않았을 거야.

낸시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오래도록 낸시를 지켜봤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보면 가슴 언저리가 콩닥 거리는 것을 느꼈다.

열심히 일하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는 그녀가 좋았다.

거의 웃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내는 차분한 목소리가 좋았다.

자신을 꼬박꼬박 오빠라고 불러주는 그 입술이 좋았다.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이 좋았고, 안쓰러운 좁은 어깨가 좋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차치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가슴은 두근거렸을 것이다.

그건 그녀가 가진 올곧은 성품에 있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남을 험담하지 않고, 신세 지고 있는 주인어른 집에 어떻게든 도움을 주겠다는 그 마음이 좋았다.

오빠...오빠...하다가 언젠가는 여보...여보...하는 그런 날을 꿈꾸지 않았던가?

밤이면 베개를 꼭 끌어안고 낸시를 안고 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럴 때면 그의 심장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뛰었고, 자신의 그 박동을 스스로의 귀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돈이 많고 적고에 혹해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낸시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

그...

가슴이 아프다.

그러면...돈...때문이 아니면....

그 다음 이어질 냉혹한 결론이 더욱 토미를 슬프게 했다.

인간으로서 졌단 말인가?

나는 도련님이 가진 그 어떠한 환경적 여건을 무시하고도 졌단 말인가?

인간 대 인간으로...

남자 대 남자로...

그가 깨달은 진실은 그의 눈물을 더욱 굵고 진하게 만들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아픔이 그를 사로잡는다.

흐윽...

흑흑....

으으윽...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무릎에 콕 박고 한참동안 울었다.

그 모습은 꽤나 우습고 처량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런 그의 위로 그림자 하나가 내려섰다.

뭘까?

그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걸 느꼈다.

커다란 독수리라도 지나가는 것일까?

아니면 갑자기 구름이 해라도 가린 걸까?

의미 없는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의문들이 자신의 슬픔을 희석시키거나 주의를 따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원래 예기치 않은 곳에서 변화를 맞기 마련이다.

“헤에~...”

어딘지 장난기가 물씬 묻어나는 ‘헤에’였다.

그는 자신의 오열 속에서도 똑똑히 그 ‘헤에’를 들었다.

굉장히 불길했다.

누구냐?!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내가 우는 모습을 누군가 봤어...

그것도 계집애처럼 흐느끼는 모습을!!!

가장 처음 떠오른 것은 낸시였다.

그러나 그럴 리 없다.

낸시는 아직도 도련님과 므흣한 가슴 만지기 놀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다시금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아무튼 낸시는 아니다.

그럼 헤나로?

입 싼 헤나로?!

평소 때는 아가씨라고 부르긴 하지만 아가씨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소녀가 있다면 그건 헤나로였다.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복장을 긁어댄다.

특히 아직 낸시와 도련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기 전이라고 확신하던 과거에도 왜 그런지 자신이 낸시에게 다가갈려 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떼어놓지 않았던가?

그런 애가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

......

...

.

그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사고는 순간적으로 정지했고, 그와 동시에 그를 구성한 주변의 모든 것들도 멈추어 버린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암울한 미래는 굳게 닫힌 상자처럼 그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 작용한 최소한의 보호본능이었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가 예상할 수 있는 뭔가를 떠올렸다면 그는 그 순간 자신의 끝없는 추락을 경험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그는 확인해야만 했다.

내 비밀을 움켜쥔 것이 누구냐?!

그는 조심스럽게 무릎에 박아 두었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에는 입가에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린 깡마른 소녀가 들어왔다.

큰 눈으로 자신의 바로 앞에서 무릎을 포갠 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심지어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아이의 천진함마저 엿보인다.

이 아이는 뭘까?

대체 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지?

토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뭐야?”

“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것 마저 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녀가 싱긋거리며 말했다.

“...아니...신경쓰지 말라고 그래도...무지 신경 쓰이는데...”

“헤에~? 그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봐.”

어떻게?!

그 말이 토미의 마음속에 강하게 울려 퍼졌다.

자기 또래?

혹은 자기보다 조금 더 어릴지도 모르는 소녀 앞에서 흐느끼며 우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 한심하게 비춰질 모습에 나오던 눈물도 기어 들어가게 마련이다.

토미는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듯 닦아냈다.

그 모습을 보고 소녀는 얼른 토미의 소매를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얘는 대체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도무지 그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토미는 아직도 눈물이 전부 닦이지 않은 눈을 들어 소녀를 쳐다보았다.

둘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얼마간 멈추어 있었다.

토미는 결국 소녀에게 물었다.

“왜?”

“남자애가 우는 모습 좀처럼 보기 힘드니까...좀 더 보고 싶어서.”

토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재차 묻는다.

“...뭐라고?”

“이런 기회 놓치기 싫으니까. 그만 울려는 거잖아? 그렇지?”

“그..그렇지.”

“나 없는 셈 치고 그냥 하던 거 마저 해. 조금 전까지 잘만 울었잖아?”

“저기...나 울었던 것 아닌데...”

토미는 시선을 내리깔며 너무나도 명확한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럼 방금 하던 건 뭔데? 남자애가 우는 건 뭔가 다르게 표현하던가?”

“......”

토미는 입을 꾹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소녀는 끈질겼다.

“응? 뭐라고 하면 되는 거야? 그건?”

“...그냥...사색?”

“울면서?”

“그러니까...그건 운 것이 아니라...”

“아니라?”

“...너 뭔가 바쁜 일 없니?”

“응. 나는 바쁜 일 없어. 아무튼 운거 아니면 뭔데?”

“그럼...저기 내가 바빠서...”

그러더니 토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은 소매로 쓱싹쓱싹 소리가 나게 문질러댔다.

좀 붓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눈물자국이 얼굴에 그대로 남는 것 보다는 훨씬 났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변명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 낯선 소녀는 대체 뭘까?

자신이 걸음을 옮기자 계속해서 졸졸 따라오지 않느냔 말이다!

결국 토미는 뒤를 슬쩍슬쩍 돌아보며 걷다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훠이~! 훠이~! 저리 가! 에비! 에비!”하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소녀는 빙긋 미소 지으며 “헤에~!” 하고 말했다.

토미는 그 순간 다시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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