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마을 어귀에는 낡은 나무 이정표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세테닐’이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 봐도 훌륭한 필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풍파를 견디다보니 꽤 그럴듯한 모양새가 나온다.
고풍스럽고 운치가 있다고 할까?
헤나로는 손가락으로 그 이정표를 가리키며 ‘세테닐’하고 소리쳤다.
“야, 뭐하는 거야? 넌 읽을 줄 모르잖아?”
로드리고가 핀잔을 주지만 헤나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대꾸한다.
“하지만 이렇게 읽었는 걸?”
“그건 그냥 아는 거고. 저게 ‘세테닐’이라고 읽는다는 사실은 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안다고.”
“암튼 나는 ‘세테닐’이란 글자는 알아.”
“그 정도로 글을 안다고는 하지 않아.”
“나도 안다, 뭐!”
입술을 삐죽 내민 헤나로를 더 상대하기도 귀찮아진 로드리고는 나무 그늘에 들어가 앉았다.
헤나로는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결국에는 재미있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로드리고가 앉은 그늘로 찾아 든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는 땅바닥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동생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뼈다귀 모양으로 사람 형상을 그리고 있었다.
하나.
그리고 다시 하나.
그렇게 하나씩 모습을 더해 간다.
커다란 것 두 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확실하다.
다른 뼈다귀보다 두 배는 크다.
그리고 작은 것 네 개도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하지만 지켜보자니 궁금한 것이 있어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왜 목에 줄을 매고 있어?”
“으응...이건 아비슈. 내 애완동물.”
이 계집애 뭐라는 거야?!
로드리고는 기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야! 아비슈는 애완동물 같은 게 아니야!”
헤나로는 배시시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지금은 내 애완동물이야. 하지만 좀 더 친해지면 친구 시켜 줄 거야.”
“웃기지 마! 그리고 걔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정말 혼날 줄 알아!?”
로드리고가 눈을 부라리자 헤나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알았어! 그냥...친구 시켜주면 되잖아...자기도 낸시 언니한테 막 하면서 나한테만 뭐라고 그래...”
“이게 진짜?!”
헤나로가 낸시를 들먹이자 잠시 잊고 있었던 찜찜한 기억이 떠올라 로드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때릴 거야?”
헤나로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는 로드리고를 놀리 듯 쳐다본다.
입가에는 장난스런 미소가 걸려 있다.
로드리고는 정말 때려줄 심산인지 어깨높이까지 손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내가 말을 말지.
아이고...이놈의 계집애...
복창이 터질 것만 같다.
저렇게 웃고 있어도 때리면 펑펑 울 것이 분명하다.
평소 같으면 울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몇 대 쥐어박아 주었을 테지만 오늘은 더 이상 계집애들의 눈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안 때려? 응? 안 때려?”
저렇게 매를 벌어도 오늘은 참는다.
“안 때려!”
하지만 한번 고함을 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헤나로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건드리면 로드리고가 한계를 넘어설 것을 알았다.
소녀는 그대로 찌그러져 다시 나뭇가지로 쓱쓱 뭔가를 그렸다.
어떤 것은 고심하면 그럭저럭 알아볼 만한 것도 있었지만 개중의 몇 개는 꽤나 그 의미를 알기 힘든 것도 있었다.
로드리고는 더 이상 동생의 한심한 낙서로 소일거리 하기도 지쳐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여지없이 하늘 높이 눈부신 태양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너무 밝아 눈을 전부 뜰 수는 없었지만 가늘게 뜨고 조금만 노력하면 태양 안에 동그란 형태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볼 수는 없어서 금세 시선을 돌려야 했다.
너무 밝은 것을 억지로 봐서 그런지 시선을 돌려도 주변 사물들이 한동안 새카맣게 보인다.
그래도 조금 기다리면 다시 뚜렷한 모습을 드러낸다.
헤나로의 낙서처럼 의미 없는 짓인 줄을 알면서도 로드리고는 그 행동을 반복했는데 그건 딱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다시 사물이 검게 변했다가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 가는 순간 ‘세테닐’이라고 쓰여 있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직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헤나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헤나로 너 네 이름은 쓸 줄 아냐?”
“흐으으응...흐으으응...”
헤나로의 어깨가 잠깐 움찔 했지만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며 못들은 척을 한다.
저 계집애는 하여간 자기가 뭔가 불리할 것 같으면 저렇게 못들은 척을 해버린다.
로드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헤나라가 그린 그림을 발로 쓱싹쓱싹 문질러 지워버렸다.
흙먼지가 화악 하고 피어올랐다.
“뭐야?!”
헤나로도 나뭇가지를 손에 쥔 채 벌떡 일어나서 화를 낸다.
“뭐긴 뭐야? 네 이름 쓸 줄 아냐고 묻잖아?”
“묻는 건 묻는 거고! 왜 남이 그린 건 다 지우는데?! 내 걸작이었단 말이야!”
“그런 걸작은 언제든 그릴 수 있잖아?”
“...그냥 걸작이 아니라 평생의 걸작이었단 말이야.”
“그런 말 하지 말고. 만약 그게 네 평생의 걸작이었다면 네 인생 무진장 한심해야 한단 말이야. 알고는 있냐?”
“...모...몰라!”
“네 이름 쓰는 거 가르쳐 줄게. 나뭇가지 이리 줘봐.”
“여...여자 애는 그런 거 몰라도 돼.”
“그렇지만 알면 좋을 걸?”
“글 좀 안다고 잘난 체 하지 마! 그런 거 안 배워.”
“하지만 글을 모르면 네가 좋아하는 왕자님이 나타나도 편지도 주고받지 못할 걸?”
“그럼 그때는 오빠한테 써달라고 하면 되지!”
“하지만 내가 엉망으로 거짓말을 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저는 왕자님에게 조금도 관심 없어요. 그러니 자꾸 편지 보내지 마세요. 제 이상형은 우리 오빠거든요.’하고 말이야.”
“히잉~! 나한테 못되게 굴지 마~! 그리고 오빠는 내 이상형 아니다, 뭐!”
헤나로가 인상을 쓰며 내 가슴을 툭탁툭탁 때렸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낸시와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우울해지고 만다.
“아..알았어. 알았어. 제대로 써줄 게. 왕자든 기사든 너한테 편지 보내면 네가 써달라는 대로 써줄 테니까 그만 때려.”
“정말?”
“그래! 정말! 됐냐?”
“응!”
“야, 그나저나 곡예사 안 온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원래부터 언제 온다는 기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시간낭비라고.”
“그치만 여기까지 왔는데....한참이나 기다렸고...”
헤나로는 못내 아쉬운지 쉽사리 발걸음을 떼려하지 않았다.
“안 온다니까.”
“그럼 내일도 같이 와 줄 거야?”
그 물음에 로드리고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이래저래 뭔가 얽혀서 어울려 주긴 했지만 내일도 이런 따분한 하루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이 따분한 시간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다.
적당한 협상안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야! 그럼, 저기 언덕까지 올라가서 오나 안 오나 보자. 그리고 안 오면 집에 그냥 가는 거야. 물론, 내일은 각자 할 일을 하는 거고.”
“치사해...”
“치사하긴?! 좋아, 싫어? 빨리 결정해. 아니면 그냥 가버린다?”
“조...좋아! 하지만 곡예사 오는 거 보이면 밑에까지 내려가서 마중 가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사정 좋은 일이 일어날 리 없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
헤나로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쪽팔리게 이 계집애는 왜 이런 걸 자꾸만 시키는 걸까?
아무튼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고 해서 후딱 손가락을 걸어주고 언덕을 올랐다.
저기까지만 가면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
다시 내려갈 걸 왜 올라야 하는 걸까?
아...내 신세야...
암튼 집에 돌아가면 낸시한테 사과해 볼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젠장...내가 왜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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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천천히...”
노인은 사내에게 부탁조로 말했다.
둘은 꽤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앞서가던 사내가 뒤돌아보며 짜증을 낸다.
“아! 진짜! 늙은이...이젠 걷지도 못해?! 빨리 마을 들어가서 쉬고 싶단 말이야! 자꾸 게으름 피우지 말고 좀 어떻게든 노력해 보란 말이야!”
“하지만 짐이 무거우니까...”
“뭐야?! 지금 나보고 짐을 더 지고 가라고 말하는 거야?! 정말 미치겠다! 말이 되는 소리 좀 해! 정말 너무하지 않아? 곡예는 거의 대부분 내가 다하는데 이젠 짐까지?! 이봐! 양심이란 거 키우냐? 응?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그러면 안 되지. 이렇게라도 여행에 일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아니면 그냥 이번 마을에 들르면 거기에 정착해서 살 거야? 아니잖아? 할 줄 아는 것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평생 곡예밖에 안했잖아? 그것도 지금은 늙어빠져서 형편없는 수준이고. 죽는 힘까지 내서 노력하란 말이야! 아~! 씨발~! 염병할 늙은이! 나도 충분히 많이 지고 있다고! 어깨가 빠지는 것 같단 말이야. 누구든 다 힘든 거야. 그냥 꾹 참고 걷는 거지. 늙은 건 벼슬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앓는 소리 내지 말고 쓰러질 때까지 걸어. 죽는 힘 남겨 두지 말고. 내가 한 가지 보장하면 죽을 때는 그렇게 힘주지 않아도 그냥 훅 하고 가는 거니까. 일부러 힘 아껴두지 말고 이럴 때, 열심히 쓰란 말이야. 알았어?”
“후우~...그렇게 서둘지 않아도 저 언덕만 넘으면 곧 마을이야. 여긴 20년쯤 전에 와본 적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조그만 천천히...걷자고...짐은 들어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아~! 진짜...짜증나게...내가 한 번은 봐줬다. 좀 천천히 걸어볼게. 아...이렇게 자꾸 노인네 투정 받아주면 끝이 없는데...버릇 나빠지고...나중에 존나 골치 아파지는 거 아니야? 암튼 나는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라니까.”
사내는 정말로 걸음을 조금 늦췄다.
노인이 말한 언덕은 그리 멀지 않았고 꾸준히만 걷는다면 점심나절에는 마을에서 맛있는 것을 든든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숨을 거칠게 내쉬며 비지땀을 흘리는 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사내는 조금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암튼 이번에 노인네가 해달라는 대로 해줬으니까 두 번 다시 이런 엄살 피지는 마. 그리고...거...그러니까...우리 돈 분배하는 건 끝난 얘기다?”
“...후우...”
“아! 재수 없게 한숨은 존나 쉬어 쌌네?!”
그때쯤 언덕 위에서 조그만 아이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뚜렷한 모습을 식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언덕에서부터 노인과 사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와 노인은 서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눌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눈으로 쫓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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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물레가 돌아간다.
발로 계속해서 물레를 돌리고 작지만 야무진 손이 실을 뽑아낸다.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다.
하지만 얼굴이 조금 붉다.
대체 무슨 생각인거람?
저번엔 사고였다고 해도 이번엔 고의성 장난이 다분하다.
그래도...그렇게나 얼굴을 때린 건 잘못한 것 아닐까?
아니...아니야!
그렇게 떡 주무르듯 마구 만져댔으니까...
끝까지 놓지도 않고...
하지만...얼굴...엄청 부었던데...
혹시...주인마님께 말하기라도 하면...
더 이상 이 집에서 살 수 없을 지도 몰라.
낸시의 손이 멈춘다.
이곳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갈 곳이 없어.
이제...아비슈도 왔고...
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야 할 아이가 둘이나 필요한 것은 아닐 텐데...
어쩌지...
정말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어.
입술을 깨물며 좀처럼 낸시의 굳은 얼굴이 펴질 줄을 몰랐다.
...사과해야 하나?
내키지는 않지만 때린 건 잘못이니까...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