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헤에~’하지 말고! 똑바로 하지 않으면 도련님은 널 쳐다보지도 않을 걸? 그래도 좋아?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거야?!”
토미가 심각한 표정으로 아비슈를 구슬렸다.
하지만 아비슈의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평온은 토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야! 나는 이렇게나 심각하게 널 생각해서 말해주고 있는데!”
토미가 재차 언성을 높이자 아비슈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정말? 날 위해서? 날 생각해서? 전부 나만을 위해서 그러는 거야?”
큼지막한 맑은 눈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자 토미는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러나 이내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낸시를 위해서니까!
그러니까 거짓말 아니야.
혹 거짓말이어도 좋은 거짓말!
그러니까 많이 해도 괜찮은 거지! 암!
“그래!”
아비슈의 입가에 둘렀던 미소가 조금이지만 비릿하게 변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무척이나 미미했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기 때문에 토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잘 됐네. 도련님이 날 쳐다보지 않으면 토미가 날 쳐다보면 되잖아?”
“뭐?!”
이게 무슨 말이냐?
순간적으로 그의 뇌 활동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토미의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아비슈는 계속해서 말했다.
“날 위해서라고 했잖아? 그렇지? 너는 지금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거니까 앞으로도 그러면 되잖아?”
“그...그건...”
토미가 눈에 띠게 당황한다.
이게 아니잖아!
왜 반응이 이렇게 나오는 데!?
보통은 울고불고...어떻게든 도련님의 관심을 다시 찾아오려고 해야 정상 아니야?
이 미친!!!
“왜?”
아비슈가 한걸음 토미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토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뒤로 물렸다.
“응? 왜 그런데? 날 위해서 나도 하지 않는 걱정을 대신 해주고...그렇게나 다정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나 어쩌면 토미한테 사랑에 빠졌을지도?”
살짝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비슈를 보면서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뭐...뭐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토미가 입을 벌려 뭔가 말하려 했지만 ‘어..어...그..그...’같은 의미 없는 말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아비슈가 한걸음 더 토미에게 다가갔다.
이로써 둘의 거리는 지척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토미는 그 거리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물러난다.
“너도 나한테 관심 있지? 그런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나 걱정해 주고...”
아비슈가 유혹하듯 묻는다.
살짝 뺨을 붉히는 그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도발적이었다.
결국 토미는 그 모습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양 주먹은 꽉 움켜쥐고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한차례 깊이 숨을 들이 쉬고는 크게 소리쳤다.
“미안해! 거짓말! 다 나 때문에 그렇게 말했어! 널 걱정하는 게 아니야! 널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헤에~?”
다시 예의 ‘헤에~’를 들으며 토미는 눈을 떴다.
장난스런 미소를 띠운 채 아비슈가 말했다.
“의외로 솔직하네? 완전히 거짓말쟁이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알고 있었어?”
“대충.”
아비슈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얼마나?”
“나도 봤어. 도련님과 낸시.”
“그럼 다 본 거잖아?!”
토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렇지.”
간단히 수긍하는 아비슈.
“지금까지 날 놀린 거야?”
토미가 조금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거짓말 한 건 너잖아?”
아비슈는 반성하는 기색 없이 당돌하게 되물었다.
“..그..그렇긴 하지.”
다시 힘을 잃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암튼 서로 뭐라 할 처지는 아닌 거니까 날 추궁하려 하지 마.”
“그...그래도 그렇게 날 놀린 건 좋지 못해.”
토미는 남은 자존심을 끌어 모아 대항해 본다.
“꽁해 있지 마. 그런 남자는 인기 없으니까.”
“난 인기 없어도 된다고! 하..한명만 날 좋아해 주면 되니까...”
“그렇지만 그 한명이 널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걸? 꽁한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별로거든. 같이 다니기 귀찮다고 할까? 뭔가 의도치 않게 잘못 하거나 하면 일일이 사과해야 하고...힘들어. 피곤한 사람이지.”
“나는 피곤한 사람 아니야!”
“그건 모르지. 나 지금 너랑 이야기하는 거 무지 피곤하니까.”
“으윽!”
다시 말문이 막힌 토미는 불만어린 눈초리로 아비슈를 쫓았다.
그런데 아비슈는 지금까지 대화는 이미 훌훌 털어버렸는지 전혀 다른 주제를 들고 나왔다.
“너 낸시 좋아하지?”
“뭐?! 뭐....뭐라고?! 그..그게...아니...아니야! 그런 거...아니고...”
눈에 띠게 당황해서 몸을 배배꼬아대는 토미를 보면서 아비슈는 알기 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됐어. 말 안 해도 알겠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특히...낸시한테는...”
“글쎄...하는 거 봐서.”
“야! 나는 특별히 널 믿고 말해준 건데!”
“말해주긴 뭘 말해줘? 내가 그냥 때려 맞췄지!”
“아..아무튼! 남의 약점을 잡아서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좋지 못해!”
“거짓말로 남을 이용하려는 건 더 좋지 못하거든?”
“......”
토미는 도무지 말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깨를 늘어뜨리고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또 울려고?”
아비슈가 묻자 토미는 곧바로 고개를 들고는 소리쳤다.
“안 운다니까!”
“그치만 울 정도로 좋아하면 그냥 낸시한테 말해버리면 되잖아?”
“너도 봤다며!? 낸시가 도련님한테 가슴 만져달라고 하고...막 유혹하고 그러는 거...”
“뭐, 넌 다 안 봤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가? 아무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그럼 난 그만 가볼게. 아! 말하지는 않을 게. 너 운거랑 낸시 좋아하는 거. 그럼 된 거지?”
아비슈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하지만 토미는 재빨리 아비슈의 팔을 붙잡았다.
“다 안 봤다니? 그게 뭔데?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거야? 응? 말해줘!”
“글쎄.”
“제발!”
“흐음...암튼 나도 제대로 대화를 들은 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걸?”
“그렇지만 분명히 난 봤는데...”
“이봐, 진짜 좋아하면 일단 마음이라도 전해 봐. 미리 겁먹어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러지 말라고. 가슴이 뭐 대순가? 그 정도는 괜찮잖아?”
“가..가슴은 중요하지! 그렇게 막 만지고 그러는 게 아니야! 괜찮지 않다고! 소중한 거라고! 아주...엄청...굉장히...”
“글쎄...역시 너 피곤한 성격이야. 갈래.”
“가..가지 마! 이야기마저 해달란 말이야!”
“낸시한테 직접 들으면 되잖아?”
“......”
“후우...너 정말 형편없어.”
“뭐라고?! 너 자꾸 나한테만 뭐라 하지 마! 너..너야말로 도련님한테 버림받은 거잖아?! 가슴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고...완전 창녀나 다름없어!”
토미는 아비슈의 말에 화가 났는지 조금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그가 두서없이 내뱉은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후훗! 말 다했어?”
아비슈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뭐..뭐야? 그렇게 쳐다보면 겁먹을 까봐? 하나도 안 무섭거든?! 나...힘 쎄니까...여자라도 안 봐줘! 아..알통! 보..보이지? 농사일과 허드렛일로 또래에선 제일이라고!”
확실히 알통은 있었다.
그러나 그리 멋져 보이는 알통은 아니다.
다년간의 노동으로 인해 특정부위에만 생겨난 안쓰러운 알통이라고나 할까?
알통을 잠시 동안 쳐다보던 아비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왜 너랑 힘겨루기를 하겠어? 자, 봐.”
그러더니 아비슈는 자기 팔을 들어 올려 토미가 방금 보여준 것처럼 알통을 만드는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가는 팔뚝에는 역시나 근육 따위는 조금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걸 보고 토미는 의기양양해져서 허리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훗! 말라깽이 계집애! 자기 약점을 이렇게도 쉽게 드러내다니!”
그럼에도 아비슈는 겁먹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한심하다는 표정뿐이었다.
“너 바보지? 난 불리한 거로는 절대 싸우지 않아. 그리고 이건 약점이라고 할 것도 없지. 내가 너보다 힘 약한 거야 팔뚝으로 닭다리 만들어 보여주지 않아도 다 아는 거니까.”
뭔가 불길함을 느낀 토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럼 뭐? 뭔데?”
“너처럼 안쓰러운 알통은 없지만 내겐 나만의 무기가 있어.”
토미는 그 말을 듣고 얼른 한걸음 물러섰다.
거리를 벌려야했기 때문이다.
이 계집애, 뭐야?
쇠붙이라도 가지고 있나?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쇠붙이는 아니지!
잘못하면 죽는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양손은 빈손일 뿐이다.
토미가 고개를 갸웃 거리고 있는 사이 아비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도 솔직히 이런 위험한 무기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네가 나를 자극한 거고, 또 힘으로 날 몰아붙이려는 야비한 짓도 했으니까 조금은 너한테 벌이 필요할 것 같아. 지금은 좀 쓰라린 경험이 될지도 모르지만 분명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내게 고마워하게 될 거야. 아마도.”
그러더니 아비슈는 토미와는 반대 방향으로 힘껏 뛰기 시작했다.
어어? 하는 사이에 아비슈와 토미의 거리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저 계집애, 대체 뭐야?
도망간 거야?!
그게 네 무기냐?
한심한 계집애 같으니...
도망가면 못 잡을까봐?!
계집애 따위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잡아 주마!
잡히면 볼기짝을 흠씬 두드려주고 낸시와 도련님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듣고야 말겠다!
그가 막 아비슈를 따라서 뛰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아비슈가 달려간 방향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토미는~ 울보래요~! 낸시한테 차였다고 창고 뒤에서 엉엉 울었대요~!”
그 순간 토미는 뇌리를 강타하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다리가 비틀거렸다.
이건...대..대단한 무기다.
그는 있는 힘껏 아비슈가 뛰어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 계집애!
가만 안 놔둬!
그러나 토미는 도무지 아비슈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겐 토미처럼 농사일로 단련된 알통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골목길 날치기로 단련된 어른도 따돌리는 빠른 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