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오빠! 저기 좀 봐! 곡예사! 그치? 맞지?”
언덕에 오른 헤나로는 신이 나서 외쳤다.
로드리고는 눈썹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햇볕을 가리면서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커다란 짐을 짊어진 두 사내처럼 보였는데 곡예사인지 그냥 나그네인지 알 길은 없었다.
“곡예사 아닌 것 같은데?”
로드리고는 그들을 마중 나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부정했다.
“곡예사 맞아!”
하지만 얼른 언덕을 뛰어 내려가 그들을 마중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버린 헤나로는 무조건 긍정하고 만다.
“그건 모르지.”
“나는 다 알아! 약속 했잖아?!”
“그렇지. 약속 했지.”
“헤헤! 그럼 가는 거지?”
“아니! 잠깐! 나는 분명히 곡예사가 오는 것이 보이면 마중 간다고 그랬지 다른 사람들이 오면 마중 한다고는 안했으니까 저들이 곡예사임이 확실해 질 때까지는 여기서 기다릴래.”
“그런 게 어딨어?!”
헤나로는 로드리고를 노려보며 화를 냈다.
조그만 계집애가 눈초리가 매섭다고 생각하며 로드리고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헤나로에게 대답해 주었는데 그건 무척이나 듣는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들었다.
“...여깄지...”
“우우!!! 진짜! 치사해! 아주 치사해! 남자도 아니야!!!”
헤나로는 어떻게 분을 풀어야 좋을지 몰라 마구 땅바닥을 발로 쿵쿵 내리쳤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남자야. 그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지.”
“우아아아아!!!! 진짜 열 받아!!! 바보! 멍청이! 거짓말쟁이!”
“흥이다. 흥...흥...흥...”
“나야말로 흥이다! 오늘 오빠가 좀 멋있고 상냥하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착각이야! 오빠는 바보 멍청이야! 나중에 커서 아무도 시집오려 하지 않을 걸?! 평생 혼자 살고 말거야. 여자들은 오빠 같은 남자 완전 싫어해!”
헤나로는 되는 대로 마구 로드리고를 헐뜯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간단하게 대꾸해서 다시 헤나로의 심기를 들쑤셔 놨다.
“반사!”
“으...으아아아아!!! 내가 정말!!! 오빠 그거 알아!? 엄청 유치해!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이 마을에서 가장 유치해!”
“또 반사!”
“나도 반사!”
“내가 더 반사!”
“그럼 내가 더! 더! 반사!”
“아유~! 유치해! 헤나로 나이가 몇 살인데 반사야?”
“오..오빠가 먼저 했잖아?!”
“나는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그런 거지. 우리 마을에서 가장 유치해!”
“그건 오빠지!”
“넌 그 가장 유치한 오빠가 하는 걸 그대로 따라했잖아? 그러니까 네가 더 유치하지. 그렇지? 생각할 시간을 좀 줄까? 누가 더 유치한지 결정할 수 있게 말이야?”
“됐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오빠가 더 유치해!”
“고집만 피운다고 네 생각처럼 다 되는 건 아니야.”
“괜히 고집 피우는 건 오빠지!”
“아니. 나는 똑똑하니까 내가 고집 피우는 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
“오빠가 뭐가 똑똑한데?!”
“나는 확실히 헤나로 너보단 똑똑하지. 비교해 볼까?”
“좋아!”
“너 이름 쓸 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알아.”
“그건!”
“그건?”
“...조...좋아! 내가 하나 오빠보다 몰라.”
“그럼 다음으로 너 ‘나무’를 글로 쓸 수 있어?”
“그..그런 게 어딨어!? 그렇게 따지면 안 되지! 그냥 글씨 아냐 모르냐 그걸로 해서 하나로 치란 말이야!”
“뭐, 내 동생이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넓은 아량으로 그렇게 해줄게.”
“다..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지! 나는 고마워 안 할 거야!”
“그런데 헤나로 그래봤자 너는 나보다 무식해.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단다.”
“아니거든!?”
“그럼 내가 모르는 거 아무거나 하나 대봐.”
“내가 못할까봐?!”
“그러니까 해보라고.”
“......”
하지만 순간적으로 헤나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
오빠도 안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오빠도 안다.
그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그것도 오빠가 알아!
점점 자신감에 차있던 헤나로의 얼굴 표정이 굳어져 갔다.
결국 헤나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내가 안 되면 오빠가 하게 하면 된다.
“오..오빠가 내가 모르는 것 말해봐! 글씨 같은 거 말고!”
“하지만 네가 내가 모르는 것 말해보기로 했잖아?”
로드리고가 지적하자 헤나로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걸로 그걸 무마시켰다.
“아무튼! 내가 하라는 대로 그냥 해! 하란 말이야!!!”
그녀의 어거지에 로드리고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말했다.
“그래. 뭐, 그렇게 해주지. 음...뭐가 있을까?”
흥! 말해보라지!
글씨 말고는 나도 오빠가 아는 거 다 아니까!
절대지지 않는다고!
비장한 표정으로 각오를 다지는 헤나로에게 로드리고가 말했다.
“아! 그렇지! 이번에 아버지와 내가 에르줌에 다녀왔잖아? 아비슈도 데려오고. 그때, 여관에 머물렀거든? 그 여관 이름 대봐.”
“어?”
순간적으로 헤나로의 얼굴 표정은 완전히 정지했다.
그러더니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는 배신당한 표정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재차 묻는다.
“그러니까 여관 이름.”
“......”
“몰라? 그럼 둘!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거 두 개! 그렇지?”
“그런 건 더 똑똑하거나 무식한 거랑은 조금도 관계없잖아?! 아직 하나! 아직 하나야!!! 나는 에르줌 안 가봤으니까 그런 거로 하면 안 되지!”
“그런 게 어딨어?”
“여깄지!”
“너도 알지? 이거 완전 어거지라는 거. 그치? 넌 이미 진거야.”
“안 졌어! 그런 거 됐으니까 빨리 마중 가잔 말이야!”
“하지만 아직 곡예사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걸?”
“나는 안다고! 그게 내가 오빠보다 더 많이 아는 거란 말이야!!!”
“증거 있어?”
“그냥 안다고!!!”
“알긴 뭘 알아? 막상 갔는데 아니면 나만 완전히 손해 보는 거잖아?”
“좀 손해 보면 어때?! 귀여운 동생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주냐?!”
“푸훗! 너 지금 너보고 ‘귀여운’이라고 했어? 정말 그런 거야?”
“...그랬어!”
“하지만 조금도 귀엽지 않은데?”
“나 귀여워!”
“뭘 봐서?”
“하지만 아빠가 항상 나한테 귀엽다고 그런단 말이야!”
“그건 아빠가 널 불쌍하게 생각해서 그런 거야. 하나도 귀여운 데 없으니까 가여워서 그렇게라도 말해주는 거지.”
“아니거든!”
“맞거든!”
“이렇게 자꾸 말꼬리 잡아서 저 사람들 다 올라올 때까지 여기 있으려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아이고! 들켰나?”
로드리고가 키득 거리고 웃자 그에 비례해 헤나로의 표정은 험악해졌다.
“자꾸 이러지 말고! 가자~! 약속했던 대로 마중 가~!”
“싫어.”
“그럼 어떻게 해야 저 사람들이 곡예사인지 알 수 있는데? 여기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
“그야 간단하지!”
“뭔데?”
“네가 내려가서 직접 확인하면 되잖아? 그리고 곡예사가 맞으면 다시 나한테 뛰어와서 맞다고 말해줘. 그럼 내가 특별히 너를 믿고 마중하러 갈 테니까. 어때? 그럼 되겠지?”
“그건 싫어!”
“왜?”
“혼자 가기 싫단 말이야!”
“그럼 여기서 기다리던가. 나는 아쉬운 거 없으니까.”
“으으...”
아쉬운 것이 아주 많은 헤나로가 울상을 짓고 있자 왠지 로드리고는 낸시가 떠올랐다.
낸시와 제대로 화해할 수 있을까?
내가 사과했는데 그냥 무시해 버리면 어쩌지?
로드리고도 저지른 짓이 있어 심기가 불편한 상황 속에서 괜히 쓸데없이 저 아래까지 내려가 힘을 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뭐, 동생이 이리도 원하면 조금 움직여 주어도 괜찮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불편한 마음이 남아 있어 영 내키질 않는 달까?
그때였다.
불연 듯 그의 머리를 스친 한가지 섬광이 있었다.
가만!
헤나로는 낸시랑 친하잖아?
항상 낸시한테 언니라고 부르고.
그럼 헤나로가 좀 옆에서 도와주면 낸시랑 화해하는 게 쉬워지지 않을까?
로드리고의 눈이 빛났다.
옆에서 울상을 지으며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뭔가를 그려대는 동생에게 그는 무척이나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헤나로 뭐 그리니?”
“오빠 장례식! 혼자서 쓸쓸히 죽었어. 봐, 혼자밖에 없잖아? 옆에 서 있는 건 나야. 엄마 아빠는 이미 돌아가셔서 없으니까 나만 오빠 장례식에 왔어. 나도 오기 싫었는데 그래도 오빠니까.”
이 계집애가 확! 그냥!
순간적으로 열이 올라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예기치 못하게 아쉬운 것이 생긴 로드리고는 눈에 이는 잔 경련을 무시하며 상냥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그..그것 참 고맙네. 우리 헤나로는 참 착하기도 하지.”
“뭐, 가족이니까...”
이 계집애...말 한번 예쁘게도 하네.
“그..그렇지. 하..하하하...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곡예사 마중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정말?!”
신경질적으로 그려대던 로드리고의 장례식을 발로 문질러 쓱쓱 지워가며 헤나로가 반색을 한다.
이 계집애, 어쩌면 이리도 돌변할 수 있을까?
“그래. 약속 했었으니까. 뭐, 저 사람들이 곡예사가 아니더라도 조금 걷는 게 나쁜 건 아니고.”
“그렇지!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네! 역시 오늘 오빠는 좀 멋있어!”
뭐라고?!
존나 우울한 장례식까지 그려 놓았던 지지배가 뭐가 어쩌고 어째?!
마음 같아서는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꾹 참아가며 로드리고는 헤나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헤나로는 얼른 로드리고의 손을 마주 잡고는 빙그레 웃었다.
로드리고는 헤나로와 같이 언덕을 내려오면서 말했다.
“너 근데 낸시랑 친하지?”
“그렇지. 낸시 언니랑 나 많이 친하지. 별로 안 친한 거 아닌지 고민도 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친한 거 같더라고. 오빠 덕분에 확실히 알 수 있었어.”
뭔 개소리야?
친하면 친한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그래. 넌 항상 낸시랑 같이 다니고 그러니까.”
“아! 그래도 이젠 아비슈랑도 친하게 지낼 거야.”
“그래. 암튼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저기 내가 낸시랑 좀 다퉜거든. 뭐 그리 심각한 건 아니고. 그래서 네가 좀 도와줬으며 좋겠어서...”
“다퉈? 뭣 때문에? 응?”
그걸 어떻게 말하냐?!
내가 낸시 가슴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렸고, 그것 때문에 낸시가 화났다고!?
말하는 순간 완전 변태 취급 받을 텐데!
난 입에 침을 바르며 적당히 대답해 주었다.
“그냥 조금 기분 상했을 뿐이야. 내가 그냥 사과해도 되지만 그게 아무래도 어색해서...”
“나한테 맡겨줘!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나만 믿어! 나만!”
“그..그래? 와아~아...아... 정말 아..안심이네...헤나로 만세~!”
“그렇지? 헤헤...”
“그..그렇지.”
“근데 오빠...아까 나한테 안 귀엽다고 그랬잖아? 아빠가 나 불쌍해서 그냥 귀엽다고 해준다고...그거...”
이 계집애가! 그걸 마음에 담아 두었구나!
내가 아쉬워 보이니까 이참에 사과라도 받아 보려고!?
까짓 거 못해줄 것도 없지!
“야! 그건 그냥 오빠가 농담한 거지! 넌 이 마을에서 가장 귀여운 애야! 틀림없어! 오빠도 네가 동생만 아니었으면 분명 좋아했을 거야!”
“아..아이...정말...오빠도 차암....내가 그렇게 귀여워? 어...어떻게 귀여운데? 응? 어디가 그렇게 귀여워? 헤..헤헤...”
제..젠장...
이 계집애, 조금 도와주는 걸로 완전 뽕을 빼는구나...
로드리고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