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50화 (50/200)

00050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간단한 거 하나일 뿐이야. 자네가 항상 무시하는 저글링일 뿐이라고. 그것도 겨우 5개로 하는 거. 미리 이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소문도 나고 좋을 텐데 뭘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우리 소문을 듣고 기다렸다면 이정도 보상이야 해줘야 마땅하지. 비록 돈이 없더라도 말이야.”

노인은 이대로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뭔가 사소한 것 하나라도 보여줘서 이 꼬마들이 만족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노인에게 큰 만족감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내는 고집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돈이 없으면 절대 안 돼! 알겠어!? 그리고 이 아이들이 기다린 건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내가 제대로 된 곡예사니까!”

“그래. 그래. 제대로 된 곡예사가 뭔가 보여주기 전에 간단히 흥이나 돋우는 수준에서 내가 저글링만 보여주겠다는 건 괜찮지 않나? 그렇게 성내지 말고. 소문이 나면 분명 마을사람들도 훨씬 많이 모여들 테니까.”

노인은 나름 경험을 통해 사내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그것도 무리다.

“이런 시골 마을 따위 굳이 소문나지 않아도 발바닥에 땀나듯 전부 달려와서 구경할 걸? 어차피 밤에 여편네랑 질펀하게 박아대는 것 말고는 할 것도 없을 텐데, 뭐. 봐! 보라고! 이런 꼬마도 벌써 이렇게 와서 졸라댈 정도라고! 미리 공짜로 보여주는 건 절대로 없어! 더 이상 소문 내지 않아도 충분히 번단 말이야! 게다가 나는 이런 코찔찔이들한테 보여주려고 내 걸음을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어! 짐을 풀 생각도 없고! 지금은 당장 마을로 가서 시원한 맥주하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싶단 말이야! 하찮은 이런 것들한테 공짜로 할애할 시간 따위 조금도 없다고!”

결국 노인도 지쳤는지 혹은 기분이 상했는지 이렇게 말하고 만다.

“그럼 자네는 먼저 가게. 나는 이 아이들에게 간단한 것 보여주고 갈 테니까.”

“뭐야?! 이 미친 늙은이가 기어코 나하고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엉?! 내가 돈 나누는 걸 바꾼 걸로 앙심을 품었구나?! 그렇지?! 쫀쫀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이렇게 내 뜻에 반해서 행동하면서 나를 나쁜 놈 만들려는 거지?! 흥! 혼자만 좋은 늙은이인척 하지 말라고! 그런다고 애들이 좋아해 줄 것 같아? 늙은이는 냄새가 나! 아주 구리지! 그래서 애들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 단 말이야! 주제를 알아! 알겠냐고?! 이 애들도 내가 하는 제대로 된 곡예를 보고 싶어서 온 거지, 늙은이가 하는 저글링 따위 조금도 보고 싶지 않을 걸?”

로드리고는 딱히 노인에 대한 애뜻함은 없었다.

그런 것이 생기려고 해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직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사내에 대한 비호감은 무럭무럭 자랐다.

저 노인이야 무슨 욕을 먹든 타인이니 신경 쓸 생각은 없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당장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아직 어린애의 몸이라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노인이 했던 말은 그냥 간과할 수 없었다.

빨리 헤나로에게 간단한 곡예를 보여주고, 집에 가서 낸시와 화해하고 마음 편히 있고 싶다.

그리고 저 노인은 저글링을 보여줄 수 있다.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 설마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저글링 보고 싶어요!”

로드리고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었기에 재빨리 사내의 말을 가로막고 외쳤다.

그 순간 사내의 눈썹이 무척이나 심하게 꿈틀거렸다.

“하~! 뭐라고?!”

사내가 고개를 돌려 사나운 눈초리로 로드리고를 노려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드리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저글링 보고 싶다고요.”

로드리고의 등 뒤에 숨은 헤나로는 몸을 움츠리며 로드리고의 옷깃에 힘을 준다.

“너 이 싸가지 없는 새끼! 어디 어른이 말하는 데 끼어들고 지랄이야?! 넌 그렇게 배워 처먹었냐?”

로드리고도 결국 심기가 불편한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렇게 따지면 아저씨도 할아버지 말하는 데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닌가요? 그거야 말로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맞아! 아저씨 못됐어요!”

헤나로도 로드리고를 보고 힘을 얻었는지 등 뒤에서 얼굴을 삐쭉 내밀고 힘껏 소리쳤다.

로드리고는 사내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마주 노려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사내의 화를 북돋은 것 같았다.

그가 아직 자신이 어린애의 몸이란 사실을 간과한 것은 그리 현명치 못한 일이었다.

기어코 사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꽤 큼지막한 손으로 힘껏 로드리고의 뺨을 후려 갈겼다.

짜악~!

낸시에게 얻어맞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다시 돌아온다.

로드리고의 몸은 그대로 쓰러져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그의 등 뒤에 숨어 있던 헤나로가 비명을 질렀다.

“오빠~!”

로드리고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했다.

입안에 가득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바닥에 침을 뱉자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방울진다.

코 밑에 뜨거운 뭔가가 흘러 손으로 대충 훔치자 흥건한 핏물이 묻어나왔다.

젠장...

스타일 완전 구겼네.

그러니까 곡예 따위 보고 싶지도 않다니까...

헤나로 계집애...

아...별 거지같은 놈에게 얻어맞고...

역시나 곡예사 놈들 중에 제대로 된 놈은 없다니까.

헤나로가 로드리고 옆에 서서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오빠~! 으아아앙~! 아저씨 나빠요~! 아주 나빠요~! 곡예 따위 하나도 재미없어! 모두에게 보지 말라고 소문 낼 거야!”

이 바보 계집애가!

지금 이런 상황에 저 미친놈을 자극해서 어쩌자는 거야?!

자기도 얻어맞으면 어쩌려고?!

당장 일어나서 헤나로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나는 결국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흥! 꼬마가 건방지면 결국 그렇게 되는 거야! 에이 씨발! 재수 없으려니까! 퇘!”

사내는 로드리고 머리 위로 침을 뱉더니 몸을 돌렸다.

다행히도 헤나로까지 때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내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노인에게 화를 냈다.

“이게 다 노인네 때문이야! 그냥 갔으면 됐는데 괜히 고집부리니까 이렇게 되잖아!? 자 보라고! 노인네는 살아 있는 것이 민폐야! 민폐라고!!! 아 정말 기분만 존나 더러워! 음흉한 늙은이! 어서 가자고! 뭐해!?”

그러더니 사내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노인은 사내를 따라 걸음 생각이 없는지 오히려 로드리고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노인은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헤나로는 얼른 로드리고의 앞을 가로 막으며 소리쳤기 때문이다.

“우리 오빠 더 이상 때리지 마세요...재주 안 봐도 되니까...그러니까...우리 오빠...흐..으윽...때리지 마요...으아아아앙....헤나로가 고집 부려 죄송합니다...이제 고집 안 부리고 착한 애가 될게요.”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뭐라 하려 했지만 헤나로는 도무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에게 사내가 저만치 앞서 가서 다시 소리쳤다.

“씨발! 빨리 안 와!? 엉?! 노인네도 저 꼬마새끼처럼 나랑 한 따까리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러나 노인도 뭔가 생각이 있는지 사내를 향해 소리친다.

“이봐, 나는 이 아이 상태 좀 보고 따라가겠네. 마을 아이일 텐데 괜히 분란을 만들어서 어쩌자는 거야? 때릴 일도 아니었는데...”

“아~! 씨발! 내가 노인네 속을 모를 까봐?! 흥!”

사내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 노인에게로 돌아왔다.

그가 다가오자 헤나로는 더욱 안절부절 못하며 한층 크게 훌쩍이고 다리를 떨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로드리고 앞에 버티고 선 자리를 고수했다.

로드리고는 심하게 떨리는 헤나로의 어깨를 바라보며 안쓰러움을 느꼈다.

사내는 노인 바로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럼 저글링 공을 내놔! 저 애새끼들 앞에서 그 알량한 재주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지만 말했듯이 돈 없으면 재주는 못 보여줘!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안 된다고! 이게 룰이야! 알아?! 내가 정한 룰! 저런 꼬마 새끼 한 대 때린 거로 큰 일이 일어나면 이딴 짓 하지도 못해! 나는 하나도 걱정 안 된다고! 아마 저 새끼도 매일 밤 지 애비한테 죽도록 얻어맞고 있을 걸? 뭐, 다 클 때까지 죽지 않으면 저놈도 지놈 애비 같은 놈이 돼서 지 자식 놈 졸라 때리며 살겠지. 내가 한 대 때린 걸로는 표시도 안 난다고! 그러니까 헛소리 말고 저글링 공이나 내봐!”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등에서 짐을 내리고서 저글링 공을 찾아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네 말대로 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 아이들 옷을 잘 봐. 나름 고급이라고. 여자 아이 옷에는 레이스도 달려있어. 귀족들 같은 차림은 아니지만 일반 평민 자식 옷차림도 아니야.”

사내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노인이 건네준 주머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휙 돌아서 다시 마을로 향했다.

하지만 찜찜했는지 한 가지 말을 잊지 않았다.

“꼬마 새끼들 때문에 뭔가 시끄러워지지 않게 잘 하라고! 이게 다 노인네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뭔가 일이 커져도 나는 하나도 몰라! 그러니까 알아서 잘 하란 말이야! 암튼 나는 하나도 겁 안나!”

사내가 멀어지자 헤나로는 그제야 로드리고 쪽으로 몸을 돌려서 훌쩍이는 와중에도 오빠를 일으켜보려고 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가만...가만히 좀 있어봐. 좀 쉬면 괜찮을 거야. 울지마...계집애야. 별로 안 아프니까...네가 그렇게도 말해달라고 했던 귀여운 얼굴 다 망가진다구...”

“그치만...그치만...흐..흐윽...오빠...흐..으윽...나...나 때문에...”

“그냥 저 놈이 이상한 거야. 네 잘못이 아니니까...그렇게 울지 마. 네 잘못 아니야.”

로드리고는 헤나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헤나로는 그 말에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한층 울음소리를 더 크게 울며 로드리고에게 안겨 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 로드리고는 다시 한 번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젠장할 계집애...정말 가지가지 하네...울지 말라니까...

로드리고는 앞섶을 적시는 헤나로를 가만히 안아주며 땅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하늘은 아름답고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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