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1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로드리고는 곧 기운을 차렸다.
아직도 지끈거리는 통증이 있긴 했지만 어지러움은 확실히 가셨고, 이대로 길거리에서 뻗어 있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걷는 내내 헤나로는 훌쩍였다.
그냥 무시하고 걸으려고 했지만 킁킁 거리며 콧물을 빨아먹는 소리가 보통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결국 귀를 틀어막았던 손을 치우고 한마디 하고 만다.
“흑...흑흑...크으흥~! 스읍! 스으~읍! 꿀꺽!”
“야, 그만 좀 울라니까. 더럽게 자꾸 훌쩍일래?! 지금 너 하나도 안 귀여워. 얼굴 퉁퉁 부어서 괴물 같다고.”
“그치만...그치만...흐윽...흐윽...후..후후...크흥!”
못내 분한지 헤나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볼을 타고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릴 뿐이다.
아직도 얼얼한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로드리고는 애써 허세를 피우며 말했다.
“나 하나도 안 아파. 그놈 주먹 완전 솜 주먹이야. 그냥 내가 맞아 준거지. 내가 때렸으면 놈이 크게 다쳤을 테니까 그놈 인생이 불쌍해서 봐줬다. 너도 알지? 나 검술 연습하고 막 그랬던 거? 곡예사 따위 내 상대도 아니지!”
“...그렇지만 엄청 부어서...””
“안 아프다니까! 남자한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로드리고는 움직일 때마다 얻어맞은 뺨이 콕콕 쑤셨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펄쩍펄쩍 뛰면서 헤나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헤나로는 초를 치고 만다.
“그게 안 아프면 세상에 아픈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아빠한테 전부 일러서 그 나쁜 아저씨 혼쭐을 단단히 내줘야 해!”
소녀는 양 주먹을 불끈 쥐고 눈에 힘을 준채 말했다.
로드리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솔직히 사내에게 얻어맞은 무척이나 기분이 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때릴만한 일은 아니었고, 사내가 그리 고집만 부리지 않았으면 크게 귀찮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나로는 틀림없이 간단한 곡예에 만족하고 신이 나서 마을로 뛰어가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사내에게도 꽤 이로운 일이다.
자세한 전후의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뭐, 혼쭐이라고 해봤자 아버지께서 사내에게 가서 따지시는 것 이상은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어쩌면 마을 사람들이 곡예사의 공연 보는 것을 꺼려하는 정도까지 사내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내에게 그리 큰 손해를 끼친다고도 볼 수는 없다.
분한 것은 사실이지만 딱히 한 대 얻어맞은 것으로 어찌할 수 있을 법한 위치는 아닌 것이다.
애초에 맞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까?
하지만 아직 황혼의 기사에게 배운 거라곤 마나로드 하나뿐이다.
그마저도 하룻밤 했을 뿐이고.
그는 빠르게 실력이 늘 것이라고 했지만 하룻밤 만에 능력자가 될 수는 없었다.
적당히 헤나로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든다.
“이거 이거...화가 단단히 났구나.”
노인이었다.
헤나로는 급하게 로드리고의 앞을 가로 막고 노인에게 소리쳤다.
“에비~! 에비~! 쉬이익! 쉬이익! 저리 가! 더 가까이 다가오면 가만 안 둬!”
뭐하는 걸까?
이 계집애...저 노인네가 뱀이냐?
그렇게 쫓아 버리게?
뭐 효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노인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헤나로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하구나. 뭐라 할 말이 없단다.”
노인이 커다란 짐을 등에 지고 위태롭게 걸으며 힘없이 하는 말은 생각보다 호소력이 있었다.
사내와 동료라는 것 자체로 상당히 이미지에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쓴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돼..됐어요. 할아버지가 사과할 일은 아니죠.”
로드리고는 맞은 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많이 아프냐?”
로드리고는 대답하기 전에 슬쩍 헤나로를 살폈다.
헤나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로드리고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차마 많이 아프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노인은 푸근한 미소를 띠우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헤나로가 막으려 했지만 노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어..어어..이게 아닌데...’하며 공간을 비워주고 만다.
노인은 로드리고의 뺨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짐을 내려서 뭔가를 찾았다.
그는 낡은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청량한 향기가 흘러 나왔다.
그가 일부분을 손에 묻혀서 로드리고의 뺨에 발라 주었다.
신기하게도 뺨의 통증이 금방 사라졌다.
마비가 된 느낌이 아니다.
말 그대로 통증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포션이란다. 그렇게 상등품은 아니지만 이정도 상처는 어떻게든 되거든. 자 조금 입에 넣고 우물거려 보거라. 안에 찢어진 상처도 금방 나을 거란다.”
로드리고는 노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입 안의 상처도 더 이상 쓰리지 않았다.
손으로 만져 봐도 붓기는 조금도 나아 있지 않았다.
“이야~! 신기해요!”
헤나로는 입을 떡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포션은 상등품이든 그렇지 않든 무지하게 비싸다.
귀족들이 아니고서는 소지한 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회귀 전 전쟁을 경험했던 로드리고는 심지어 귀족 중에도 포션을 사용하지 못해서 불구가 되는 사람도 여럿 봤다.
그만큼 아무리 하급품이라 하더라도 이런 노인이 소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거 비싸지 않나요?”
그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겠지.”
“훔친 거예요?”
곡예사에 대해 그리 좋지 못한 인식을 갖고 있는 로드리고는 아무리 노인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하더라도 좀처럼 신뢰할 수는 없었다.
노인은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야..훔치지 않았단다. 이건 받은 거야. 높으신 분 앞에서 재주를 보이고 말이야.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지.”
“재주를 보이고 포션을 받아요?”
좀처럼 믿기 힘든 말이다.
“그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건 무척이나 멋진 일이야.”
“그치만 대체 누가 재주 따위를 보고 포션을 준단 말인가요?”
“글쎄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이 있어. 상식은 어디까지나 자주 일어나는 일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을 뿐이지. 모두 그 잣대 위에 올려두고 이해하려 들면 많은 손해를 보게 되지.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절대로 나쁜 짓을 해서 얻은 것은 아니니 말이야.”
아무리 의심스런 눈으로 살펴봐도 노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이미 도움을 받은 마당에 추궁하듯 계속 다그치는 것도 미안해 이쯤에서 그만 두기로 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로드리고가 말하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감사 인사는 되었단다. 이건 우리 잘못이니까. 하지만 내가 다시 한 번 사과할 테니 마을에 이 일은 비밀로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비밀이요? 하지만!”
로드리고 조금 인상을 쓰고 되묻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뿐이야. 운이 좋아 좀 돈이 모여도 큰돈은 아니지. 잘못은 인정하지만 너의 자비를 구할 뿐이다.”
“하지만 돈이 필요하면 그 포션을 팔면 되잖아요? 그럼 곡예사 따위로는 절대로 벌 수 없는 돈을 벌 수 있을 걸요? 그 아저씨는 잘못했어요. 대단한 처벌은 무리겠지만 조금은 곤란하게 되어야 합니다.”
“포션은 내 실력을 추억해 줄 수 있는 기념품이야. 이건 그 자체로 내 삶이지. 절대로 이걸 팔지는 않을 거란다. 나는 다만 이 마을에서 곡예를 하고 싶을 뿐이다. 뭐, 그래봤자 이젠 할 수 있는 거라곤 저글링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대로 떠나고 싶지는 않아. 돈이 없는 것은 곤란하지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한 곳이라도 더 많은 곳에서 내 곡예를 선보이고 싶단다. 예기치 않게 다친 너에게 이대로 그만 참아 달라고 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지만 노인의 하소연도 좋고, 투정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 도와다오.”
수긍할 수 있는 논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노인의 눈을 보고 있자니 로드리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최고 무기인 힘없는 노인네 스킬을 사용하면 좀처럼 고집을 부릴 수 없다.
“...뭐, 좋아요. 얻어맞은 걸로 문제 삼지는 않겠습니다. 이젠 다 나았고...굳이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창피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사내는 언제든 다시 그 정도 문제는 일으킬 걸요? 이번은 어떻게든 넘기더라도 그 포션은 무한하지 않아요. 곧 바닥나 버리면 이렇게 유야무야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요.”
“알고 있어. 하지만 나 같은 노인은 혼자서는 여행 할 수 없단다. 지금 와서 이 나이에 누가 나 같은 늙은이를 일행에 받아주겠니?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과거의 추억으로...볼품없는 미래를 조금씩이지만 사는 셈이지.”
“그럼 마을에 정착하세요. 그리고 가끔씩 재주를 보이면 되죠. 우리 마을은 꽤 살기 좋은 편이니까요. 그런 사내와 같이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걸요?”
“후..후후...난 곡예사야. 곡예사는 정착하지 않는단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기력이 있다면 재주를 보이고,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아야 하는 거야. 어느 한곳에 정착하게 되면 그건 더 이상 곡예사가 아니지. 그냥...힘없는 늙은이가 될 뿐이란다.”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튼 이상하다고요. 그런 거.”
“아이가 이해하기는 힘들 거야.”
“저는 할아버지 생각처럼 나이가 어리지 않아요.”
“하...하하...하하하! 그래. 그렇구나.”
노인의 웃음소리는 로드리고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저건 뭐람?
나도 저 노인 못지않게 살았다.
인생 대부분을 남의 탓만 하며 허송세월하긴 했지만 저런 노인네에게 무시당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해봤자 떠돌이 곡예사 주제에 인생의 신념이 있는 척을 해봤자 아니꼽고 멍청해 보일 뿐이다.
흥!
속으로 콧방귀를 끼고는 헤나로를 닦달해서 노인보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멍청한 노인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걷는 내내 헤나로는 성가시게 로드리고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손을 소리 나게 툭 쳐내도 잠시만 방심하면 용케 알아채고 뺨을 톡톡 건드린다.
“이 계집애야! 그만 좀 하란 말이야!”
로드리고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냈지만 헤나로는 그런 오빠의 기분은 이해하지 못한 채 말한다.
“하지만 정말 신기한 걸? 정말로 다 나았어! 아프지 않은 거야? 하나도?”
“망할 계집애! 조금 전까지 엉엉 울어 대더니! 정말로 나 걱정했던 거는 맞냐? 너는 그냥 신기할 뿐이지?!”
“나도 걱정했다 뭐! 하지만 지금은 다 나았으니까 신기해서 그런 거잖아?! 내가 나쁜 아저씨한테서 오빠도 지켜주고 그랬는데 이러기야?! 고맙다고도 안하고!?”
“뭐라고?! 조금 전까진 자기 때문에 그랬다고 펑펑 울어대더니! 지금은 네가 지켜줬다고?! 하이고! 아이고!!! 답답해!!!”
“내..내가 언제 울었다고?! 오..오빠야 말로 한 대 맞고 바로 뻗어서...와..완전 볼품없었단 말이야! 절대로 남자답지 못해! 그..그리고 아프지 않다고 그랬잖아?! 솜주먹이라며?! 오빠 말 믿고 안심했으니까...조..조금 신기한 것 쯤 물어볼 수 있잖아...”
“아휴~! 내가 말을 말지. 너 아무튼 집에 가면 낸시나 좀 불러 와봐. 알았냐? 내 칭찬도..좀...하고...”
“시...싫다..뭐...”
“뭐?!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고생을 했는데?!”
“그..그치만 오빠가 나한테...못되게...구니까...”
“됐어!!! 더 이상 너한테 부탁 안 해! 다시는 네가 뭐 해달라고 해도 절대로 안 들어 줄 테니까 그리 알아!”
“...우...우....부..부르면 되잖아...치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