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등에 짐을 진 낯선 사내가 마을에 들어섰다.
조금 전 로드리고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던 그 사내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붙들고 물었다.
“형씨, 여기 여관이 어디요?”
“외지인이군. 어디서 왔나?”
“곡예사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알아?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다니는 거지.”
“오호! 곡예사! 안 그래도 마을에 소문이 쫙 퍼졌어. 이리 올 줄 내가 알았지! 하하하! 자네 덕분에 내기에서 이겼단 말이야.”
“그런 소리 됐고, 여관이나 알려주쇼.”
“여관이라...하지만 이 마을에는 여관이 없어.”
“뭐요?!”
곡예사는 인상을 찌푸린다.
뭐 이런 거지같은 동네가 다 있어?
씨발...이거 벌떼처럼 모여들어도 개미 눈꼽만큼밖에 못 버는 거 아니야?
하여간 그 늙은이 덕분에 아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이쪽으로 오기 싫다니까...마을 있다고 해서 와봤더니 완전 촌것들 아니야?
아유~! 짜증나...
이번에는 전부 내가 갖던지 해야겠는데...
그러지 않고는 수지가 맞지 않지.
아무리 노인네가 질질 짜도 소용없어.
그동안 내가 노인네를 너무 오냐오냐 해줬던 것 같아.
이참에 확실히 휘어잡고 주제를 알게 해야 해!
한참 속으로 짜증을 부리고 있던 사내에게 마을 사람이 말했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말게. 재주를 보여주고 나면 누군가 하룻밤쯤은 재워줄 테니 말이야. 지금은 모두 일 나가서 사람들이 얼마 없지만 저녁때쯤에는 제대로 반겨줄 거야.”
하지만 그런 말은 조금도 곡예사의 비틀린 기분을 풀어주지 못했다.
퉁명스런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게 언제요?! 대체?! 아...진짜...여기까지 걸어와서 이게 뭐야?!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마실려고 했더니...”
마을 사람은 자기 잘못도 아닌데 안절부절 못하면서 미안해한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곤란하군...아! 그래! 그러면 되겠어! 날 따라와 보게. 내가 그리핀님께 안내해 주겠네. 그분도 꽤나 곡예사를 기대했으니 말이야. 혹시 아렌트 가문이라고 들어봤나? 이 주변에서는 꽤 유명한데 말이야. 그분이 가주님이시지. 이 마을은 거의 그분 소유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야. 옛날엔 귀족가문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유야무야 되어버렸다지. 그래도 여기서는 귀족이나 다름없으시지. 훌륭한 분이시네.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잘 챙겨주시고. 절대로 가혹하게 대하지 않으시지. 그 집안 아가씨께서 곡예사를 좋아하시니까 틀림없이 자네를 환대해 주실 걸세. 며칠 쉬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고. 마음에만 들면 크게 한몫 챙겨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실 테니까. 지금쯤이면 밭에서 일하는 것 감독하고 계실 테니 날 따라와 보게.”
마을사람의 말에 곡예사는 귀가 솔깃해 졌다.
“그러니까 부자란 말이요?! 씀씀이도 괜찮고?”
“아! 그렇다니까.”
“그렇다면 뭐하는 거요?! 이 아저씨가! 어서 앞장서! 하..하하! 이것 참...또 간만에 내 기량을 완전히 뽐내 봐야겠는데? 나는 어중이떠중이랑은 달라서 꽤 재주가 뛰어나거든. 틀림없이 그분이 날 마음에 들어 하실 거요. 덤으로 당신들도 겸사겸사 구경하고 말이야. 크크크. 아! 물론, 마을사람들도 관람료는 내야 하는 거 알고 있지?”
“이거 참! 아주 돈독이 올랐구먼. 허허!”
“나처럼 끊임없이 떠돌다보면 어쩔 수 없소. 돈이 있어야 안심이 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니까.”
“그도 그렇군. 나 같은 촌무지렁이야 뭐 그런 형편 같은 거 알겠나? 그래도 대충은 알 것 같아. 추수 끝나고 창고에 밀 포대를 쌓아두면 나도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거든.”
곡예사는 얼굴에 짜증을 드러내며 핀잔을 주었다.
“나참...그런 거하고는 다른 거요. 아무튼 좀 더 서두릅시다.”
“아! 그래.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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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그럼 부탁 좀 하겠네.”
“아이고! 부탁이라뇨!? 나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좀 더 속도를 내서 내일까지는 다 끝내 놓을 테니 말입니다. 저 한스입니다!”
한스라 불린 사내는 자기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럼. 내 알지! 자네가 얼마나 성실한지 말이야. 그래도 힘들어질 것 같으면 사람 더 필요하다고 말하게. 어디 일이란 게 계획대로 다 되던가? 계획은 계획일 뿐이니까. 무리하면 다치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몸 상하면 안 되지. 그럼 고생하게. 나는 이만 가보겠네.”
“예! 나리! 살펴 가십시오!”
한스는 고개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한다.
그 모습에 그리핀은 손사래를 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전반적으로 풍작까지는 아니지만 평작 이상은 되었다.
추수 진행도 괜찮은 편이고.
삯꾼들도 열심히 일해 줘서 싫은 소리 할 필요도 없다.
크게 신경 쓸 일은 없는 것이다.
이제 이쪽은 전부 돌았으니, 점심 먹고 나면 반대쪽을 돌아봐야겠구나.
어서 집에 가서 헤나로의 재롱이나 보았으면 좋겠군.
딸내미를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거참...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귀여운지.
이거 이러다 몇 년만 지나면 이 지역 최고의 미녀로 소문나는 건 아닌지...
허..허허..크허허허...
이것 참...
하..하하..하하하...
아니지!
기분이 한껏 날아갈 것만 같았던 그는 퍼뜩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입가에 둘렀던 미소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분명 어떤 놈팽이 자식이 나타나서 홀랑 채갈 것이 분명하다.
그건 안 돼!
절대로 안 된다!
헤나로는 오래오래 이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한다.
재롱도 떨고, 아양도 떨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지도 모르는 놈에게 그런 기쁨을 나눠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손주는 로드리고가 알아서 어떻게든 하겠지.
헤나로는 그냥 그대로 있어주면 되는 거야.
그나저나 곡예사가 올까?
꼭 와야 하는데...
우리 마을을 그냥 지나쳐 버리면 어쩌지?
그럼 헤나로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그는 몇 번이고 해왔던 상상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마을사람이 잔뜩 모인 곳에서 재주를 구경하고 싶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헤나로...
손가락을 입에 물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차있다.
입술이 살짝 움직이며 부르는 소리...그건...‘아빠...’
그러면 이 아빠가 짠하고 나타나서 이 튼튼한 어깨에 착 올려서 목마 태워 보여주면 그거야말로 ‘이 세상에서 아빠가 최고야! 나는 이다음에 아빠랑 결혼할래!’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우오오오오~!
자기도 모르게 코에서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핀은 그렇게 바보 웃음을 지은 채 실실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는 저만치서 사내 둘이 오는 것을 보고 누군가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나는 익히 아는 사람이지만 다른 하나는 낯설다.
등에 짐을 지고, 낡은 여행자 옷을 입고 있다.
누구?
혹시...곡예사?
그리핀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마을 사람이 그리핀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것도 건성으로 받고는 다짜고짜 묻는다.
“자네는 누군가?”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곡예사 라몬입니다. 혹시 부자...아니...아니...그리핀님이십니까?”
“그렇네! 하...하하하! 이것 참 우리 마을에 잘 와주었어!”
“아..뭐...겸사겸사 해서 들렸습죠. 듣자하니 따님께서 곡예 구경을 좋아하신다고...그 말을 듣고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습니까? 귀여운 아가씨께서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시면 또 이 곡예사 라몬이 달려오지 않을 수 있나요? 하하하!”
“아니, 우리 헤나로 소문이 다른 마을까지 퍼졌단 말인가?”
“아...그게...”
“그게?”
슬쩍 눈치를 살피니 그리핀의 눈빛이 무척이나 초롱초롱하다.
이 양반, 아주 딸 바보군.
조금 칭찬 좀 해주면 아주 짭짤해 지겠지?
크크크.
“당연합죠! 이 지방에서 가장 귀여운 아가씨로 소문이 자자하단 말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지...”
“그렇단 말이지? 하..하하..흐흐흐...”
“제가 다른 바쁜 일이 있는데도 굳이 여기로 달려온 이유는 다 헤나로 아가씨 때문이죠. 제가 또 재주가 상당해서 여기저기서 초청받는 사람인데, 그런 초청을 전부 마다하고 여기로 달려왔다는 거 아닙니까? 분명 거기로 갔으면 한 30골드는 받았을 텐데...”
“30골드?”
“아! 그게 좀 많지만 그만큼 제 제주가 뛰어나다는 말이니까...”
“음...30골드...”
씨발...존나 쪼잔하네...
뭔 부자새끼가 30골드에 벌벌 떠냐?!
농촌 새끼들 반 년치 생활비밖에 더 되냐?!
이참에 한몫 단단히 챙겨 보려고 했는데 아주 좇된 거 아니야?
아..젠장...한 15골드만 불러 볼걸...
괜히 초친 거 아닐까?
살짝 어색한 웃음을 띠면서 라몬은 좀 액수를 낮춰야 하나 고민을 했다.
막 10골드 정도만 주셔도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리핀의 입이 열렸다.
“뭐, 30골드 정도야. 그 정도는 내가 보상해 주겠네. 뭐라 해도 우리 딸의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와준 것 아닌가? 우리 딸 때문에 손해를 봐서야 내 체면이 살질 않지.”
크으~!
그렇지!
내가 누군데!
정확한 베팅!!!
크크큭!
라몬은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열심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리! 역시나 절 실망시키시지 않으시는군요! 제가 아주 아가씨를 확실히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역시 소문대로 최고십니다! 하하하!”
“허..허허..뭘 그런 것 가지고. 일단 우리 집으로 가세. 거기서 목도 좀 축이고, 식사도 하면서 쉬다가 저녁쯤에 광장에서 솜씨 좀 보여 보게.”
“아니, 원하시면 제가 집에서 아가씨만을 위한 공연을 해 보이겠습니다.”
라몬은 그리핀이 30골드를 약속하자 무척이나 신이 나서 말했다.
그 나름대로의 배려였지만 웬일인지 그리핀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말일세! 반드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광장에서 재주를 보여야 하네! 집에서는 절대로 안 돼! 알겠나?!”
얼떨결에 라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라몬은 이러나저러나 30골드만 받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핀을 따라 걷다보니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씨발...한 50골드 불렀어야 했나?
내가 너무 조금 부른 거 아니야?!
아...젠장맞을...
뭐, 그래도 좀 열심히 하면 딸내미가 좋아하겠지.
그럼 지놈이 몇 푼 더 안 넣고 배길 수 있겠어?
얼마나 걸었을까?
약간 높은 지대에 시골 마을에서는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확실히 훌륭한 건물이었다.
그리핀은 라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네. 집에 딸내미가 있었으면 좋겠군. 자네를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하하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라몬은 집의 규모를 보고는 조금 전보다 훨씬 정중하게 그리핀을 대한다.
그 순간만큼은 둘 사이가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