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너..너어~! 거기 안 서?!”
토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거친 숨을 뱉고 들이쉬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다리는 풀려 버렸는지 비틀거린다.
도무지 어떻게 되어 버린 거람?
계집애가 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 있어?!
마을에서 또래 중 발이 가장 빠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런 계집애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것도 아니다.
오늘은 그냥 몸이 좀 안 좋은 것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잡아서 혼줄을 내줬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저런 계집애보다 다리가 느린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런 핑계를 아무리 가져와 붙여도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 계집애를 따라서 뛰다보니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마다 토미를 보며 살며시 조소를 내비치곤 했다.
그건 저 계집애가 계속해서 ‘토미는 낸시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 따라잡지 못하고 계속 뒤쳐져 있는 그를 향한 한심함도 한몫 단단해 했을 것이다.
“서면 어떻게 하려고?”
아직도 한참은 여유 있어 보이는 아비슈가 뒤로 걸으며 묻는다.
무척이나 느리다.
이미 토미 따위는 더 이상 자신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걸 뻔히 보면서도 비틀리는 다리로는 도무지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다.
“그..그야!”
“그야?”
“......”
“때릴 거야?”
아비슈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아..아니..그..그럴 리 없잖아?”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토미의 표정은 무척이나 살벌했고 처절했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의 내용과는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없달까?
“그럼 뭐 할 건데?”
아비슈는 순진한 눈망울과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 보았다면 꽤 귀여운 소녀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토미에게는 그 모습이 그리도 얄미울 수 없었다.
뭘 할 거냐고?
멍청한 질문이다!
당연히 때릴 거다!
잡히기만 하면 울고불고 해도 소용없어!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숲속의 비둘기일 뿐이다.
아무리 손을 뻗치고 뛰고 또 뛰어도 푸다닥 날아오르면 저리로 멀어진다.
가슴에 이는 분노를 다스리느라 입술을 씹었고, 그러다보니 좀처럼 그럴듯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비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나랑 야한 짓 할 거야?”
“!!!? 야...야한 짓...?”
순식간에 토미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토미의 전혀 준비되지 못한 부분을 파고든 셈이다.
그러니까 거...뭐시기...그게...그러니까...
불태우던 분노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우물쭈물 거리며 시선을 돌린다.
“관심 있지?”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치만 관심 있잖아?”
“그..그렇지는...”
“왜 말을 자꾸 흐려? 응?”
짓궂은 질문에 토미는 더욱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조금 꼬았다.
“내...내가 뭔가 말하기 전에 네가 자꾸 끼어드니까...그런 거야.”
“흐음? 그럼 무슨 말 하려고 했는데? 응? 응? 응? 응?”
나는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
뭔가 대단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신이 내게 이런 벌을 내리실리 없는데...
저 계집애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제대로 뭔가 말하지 못하는 걸까?
자꾸만 ‘응? 응? 응?’하며 재촉하는 물음이 그의 어깨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다.
“나...나는...”
그래도 힘을 내서 뭔가 말하려는 데, 이번에도 아비슈가 끼어든다.
“가슴?”
“그..그래..가슴...아!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나는...그런 게 아니라...”
푹 숙였던 고개도 번쩍 들고 허공중에 손을 어지럽게 휘저어가며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해 본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아비슈는 들을 생각이 없는 걸까?
“분명 가슴이라고 말했어.”
“그치만 그건 네가!”
“내가 뭐?”
“그..그러니까...가...”
“뭐라고?”
“그..그러니까....가슴이라고...”
“또 말했다! 가슴이라고!”
“아니잖아! 이건 네가 자꾸!”
“자꾸?”
“너 또 내게 말하게 하려고 하는 거지?! 그렇지?”
“뭘?”
“그..그러니까 가...슴...”
“이야! 너 대체 가슴을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또 가슴이라고 말했어! 그치? 이 짧은 시간동안 몇 번이나 말한 거야? 혹시 잠꼬대도 가슴이라고 하는 거 아니야?”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토미는 그걸 부인했다.
“그런 말 자꾸 하지 마! 왜...왜 자꾸 나한테 그러는 거야?! 넌...정말...”
“가슴이라고?”
“그만!!!!”
정말 화가 났는지 꽤나 눈빛이 험악하게 바뀐 토미를 보며 아비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이제 그만 놀릴게. 하지만 관심 있지? 그렇지?”
“그만 놀린다고 말했으면서!”
“이건 놀리는 거 아니야. 봐! 내 얼굴. 웃고 있지 않잖아? 그렇지? 나 진지해.”
“눈이 웃고 있어!!!”
“어머! 내 눈을 그렇게 들여다 본 거야? 이 거리에서?”
“됐어!! 이제 갈 거야. 너는 정말 최악이야! 아주 나쁜 계집애라고!”
“그치만 이런 날 자극한 건 너잖아? 가녀린 나한테 폭력을 쓰려고 하니까 말이야.”
“그건...”
“그러니까 날 그렇게 나쁜 계집애라고 하면 안 돼지.”
“그래도 너는 너무 지나쳐!”
“뭐, 좀 장난이 심했을지도 모르지. 오늘 저녁쯤에는 마을에 온통 네 소문이 퍼질 테니까.”
토미는 그 말을 듣자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아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넌 악마야! 대체 왜 그런 거야!? 이제 그 누구도 나랑 놀아주지 않을 거라고! 친구들은 전부 날 놀릴 거고! 낸시는...으아아아~!”
그런 토미가 조금 안되어 보인 걸까?
아비슈는 조금 더 토미 곁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그럼, 내가 놀아줄게.”
“됐거든!!!”
어느새 고개를 번쩍 든 토미가 거칠게 거절한다.
“뭐, 아무튼 심심하면 내가 있다고. 그걸 잊지 마.”
“야! 이 일은 전부 네가 저지른 거야! 마을에서 완전히 바보된 건 전부 네 탓이라고! 그런데 너한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리 없잖아?! 아무리 외톨이가 되어도 너랑은 관계되기 싫다고!!!”
“그건 모르지. 그렇게 너무 한 가지를 정해놓고 살면 손해 보는 일이 많아. 좀 속상한 일이 있어도 툭툭 털어버려야지.”
“넌 손해 본 게 전혀 없으니까 그렇지! 나만 바보된 거니까!!! 이제부터 낸시는 어떻게 보라는 거야?!”
“눈으로?”
“너..너 정말...!!!”
“그렇게 화낼 것 없잖아? 어차피 사람들 다 금방 잊을 거야. 며칠은 조금 괴롭겠지만...”
“흥!!!”
“정말 쫌스럽네...뭐, 어쩔 수 없지.”
아비슈는 성큼성큼 토미에게 다가왔다.
토미는 그런 아비슈를 보며 ‘어? 어어?’하며 의아해 했다.
이거...잡아도 되는 건가?
지척으로 다가온 아비슈의 손목을 자기도 모르게 움켜쥐며 말했다.
“자..잡았다!”
희열이 깃든 토미의 표정을 보며 아비슈는 눈을 찡긋 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려고? 응?”
“어?”
“후우~!”
아비슈는 토미의 귀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토미는 온몸에 소름을 느끼며 잡았던 아비슈의 손목을 놓고는 자기 귀를 막아버렸다.
“뭐..뭐하는 거야?!”
“글쎄?”
“너..아무튼 이상해!!!”
“그럴지도. 너랑은 다른 곳에서 살아왔으니까. 네게 당연한 것이 나에겐 당연하지 않은 것도 있고, 그 반대도 있을 거고.”
“난 갈 거니까 저리 비켜.”
“그치만 관심 있잖아?”
“뭐가?!”
“가슴. 이러면 나도 손해 보는 거지? 조금이 아니라 좀 많이 보는 것 같지만 뭐..어쩔 수 없지. 암튼 비밀이야.”
어느새 토미의 손을 움켜쥔 아비슈가 그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렸다.
토미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상황을 깨닫고는 비명을 질렀다.
“으...으아아아~~~!”
그때였다.
둘만의 상황에 너무 집중했던 것일까?
어이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하하...이것 참...요즘은 참 빠르군.”
시선을 돌린 둘의 눈에는 커다란 짐을 등에 진 낯선 노인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