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토미의 손은 여전히 아비슈의 가슴 위에 올려 진 채였다.
그렇다고 토미를 엉킁하고 속이 시커먼 사내아이로 오해하면 안 된다.
그가 무척이나 성욕이 왕성한 혹은 호기심이 한창 많을 나이이기 때문에 아비슈의 가슴에서 손이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손을 얼른 떼어내려고 했다.
아주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뻔히 보고 있는 중에 대놓고 호기심을 채울 만큼 뻔뻔한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무지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나름 힘에 자신이 있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비슈의 가녀린 손조차 뿌리칠 수 없는 것이다.
뭐...뭐야?!
보라고!
어른이 보고 있단 말이야!!!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비슈에게 눈짓을 보낸다.
하지만 아비슈는 마치 노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토미를 쳐다보며 그에게만 들리게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만족했어? 나도 손해 본 거지?”
그런 아비슈의 물음에 토미도 덩달아 속삭이듯 말한다.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절박했다.
“그런 건 됐으니까 어서 손이나 놔!”
하지만 아비슈가 장난치듯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가는 모양새가 더욱 토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속삭임은 다시 이어진다.
“빨리 인정해. 그렇지 않으면 이 손은 떨어지지 않아.”
토미는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알았어! 알았으니까!!!”
그제서야 토미의 손은 자유를 되찾았다.
힘없이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는 자신의 손을 보면서 소년은 무엇을 느꼈을까?
그의 눈에는 안도감과 아쉬움의 상반된 감정이 혼재되어 있었다.
아직도 아련하게 부드럽고 폭신한 느낌이 손끝에 조금 남은 것 같았다.
꿈결과도 같은 감촉은 소년의 심장 박동을 무척이나 빠르게 만들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내가 미친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저 가슴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싶었다.
아니...이건 아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야.
나는...나는...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낸시의 얼굴이었다.
대체로 무표정 미묘하게 부끄러워하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리고 의식 저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가슴 만져요. 가슴 만지라고요. 어서...’
허억...
하아...하아...
부드럽고 차분한 낸시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재촉한다.
그래.
내가 만지고 싶었던 것은 저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발랑 까진 계집애 가슴이 아니라...
그치만...부드러웠지.
낸시 가슴은 틀림없이 내가 만진 것보다 더....
도련님은 만져봤겠지?
매일 만지는 것일까?
혼자서 잠시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토미의 귀에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흠!”
토미는 번쩍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노인이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노인은 다 안다는 표정을 지은 채 씨익 웃어준다.
하지만 토미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그런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
“허허! 나도 안단다. 그런 거 아니지. 허...허허허! 한참 그럴 때지.”
이 노인네가!?
대체 뭘 안다는 거야?!
완전히 오해하고 있잖아?!
물론, 기분은 좋았지만...
토미도 남자라 당황했음에도 느낄 건 전부 다 느낀 모양이다.
그래도 창피한 것은 싫었던지 어떻게든 오해를 풀려고 발악을 해본다.
“야!”
토미는 아비슈를 돌아보며 뭔가 설명해 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싱긋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 자신이 실수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불안해!
미칠 듯이 불안해!!!
그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아비슈에게 통할 리가 없다.
아비슈는 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몰라~! 시집은 다갔어! 흑..흑흑...”
그러고는 숫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기 시작한다.
토미는 입만 뻐끔거리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노인과 아비슈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노인의 표정은 어느새 착잡하게 바뀌어 있었다.
“아..아니에요...저는 정말로...야! 너...정말로...이...이건 아니지! 자..장난도 정도가 있는 거지! 하..하나도 안 웃기거든?! 자! 봐! 저 할아버지도 안 웃으시잖아?!”
“으아아아아앙~! 토미 오빠 너무해~!”
오빠?!
지금까지 반말 찍찍 해댔으면서 오빠?!
지금 와서 오빠?!
우와아아아~!
이거 정말!!!
급기야 아비슈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곁에 있는 알지도 못하는 노인의 품에 안겨버린다.
노인은 흠칫하며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조심스럽게 아비슈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쓰다듬으며 달래어 주었다.
그 모습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보던 토미는 노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런데 노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강한 질책이었다.
토미는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적으로 자신이 불리했다.
노인은 한참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비슈를 달래주고, 토미에게도 부드럽지만 가벼운 질책이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토미는 반쯤 혼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예...그렇죠. 암요...제가 잘못했어요. 그렇죠. 여자는 도구가 아니죠. 공감합니다. 아니요. 정말로 가슴 만진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건 믿으셔도 됩니다.’ 같은 말을 늘어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토미의 의식은 상당 부분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께서 아침으로 주셨던 멀건한 스프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것이어도 상관은 없었다.
그저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멀건하고 싱거운 스프.
언제부터 먹었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의 기억이 시작된 이후로는 항상 먹고 있었다.
건더기는 거의 없고, 찰기만 조금 있는 스프.
음식 투정을 하면 곧바로 쏟아지는 어머니의 잔소리.
‘너 그거 먹고 지금 그렇게 큰 거다! 이놈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먹어야 할까?
1년?
아니면 10년?
아마도...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부자가 되고 싶다.
좀 더 맛있는 것 먹고 싶고...
어머니도 항상 말씀하시는 않던가?
거지 집에 시집와서 이때껏 고생 할대로 고생했는데 이런 이야기까지 듣고 싶지 않다고...
아...젠장...
그래도 내가 좀 더 제대로 먹었더라면 도련님보다 결코 못해 보이지 않았을 텐데...
아...내일도 그걸 먹어야겠지.
의식의 일부가 도피되어 있던 토미는 더 이상 그의 귀에 들리던 잔소리가 멈춘 것을 깨달았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에 초점을 잡아 노인을 바라보자 다행히 노인은 그리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아직 그의 말이 멈춘 것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구나.
토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아비슈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뭔가 어정쩡한 기분이 들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토미는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대체로 한 방향으로 귀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밉다...
혹은 얄밉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보면 가만 안 둔다.
하지만 되도록 피해 다녀야겠다.
무척이나 분명하다.
놀랍게도 아직 살아온 날이 많지 않은 소년은 자신의 감정을 한걸음 물러난 채 조용히 관조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눈은 무척이나 고요했고, 맑고 비어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비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빠, 우리 그럼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자. 가슴 만진 건 용서해 줄게.”
“......”
분노가 일었다.
고요했던 눈은 핏빛으로 물들어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꾹 참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쟤는 정말 뭘까?
혹시 악마 아닐까?
노인도 아비슈도 그런 토미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도 ‘고맙다’는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의 소중한 뭔가가 산산조각 날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끈질긴 이 노인과 소녀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소년은 할 수 없이 뭔가 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과는 안 된다.
난 잘못한 게 하나도 없으니까!
소년은 화재를 돌리기로 했다.
“그보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아! 이것 참. 나는 곡예사란다. 옆 마을에서 왔지. 그보다 너희들 아렌트 가문이 어디인지 알고 있느냐? 마을사람들이 내 동료가 거기로 향했다는구나. 너희들이 혹시 안내해 줄 수 있니?”
아직도 노인의 곁에 서있던 아비슈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럼요! 저도 거기서 살아요. 오빠! 우리가 안내해 주자! 응?”
천진한 표정의 소녀를 보며 토미는 느낀 것은 공포였다.
아무리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이건 죄인 것 아닐까?
“나는 일이 있어서...”
토미는 슬쩍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아비슈를 보고는 이내 말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뭐...나중에 하지. 하..하하...”
토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다리를 질질 끌며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