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56화 (56/200)

00056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소녀는 오전 동안 물레를 돌렸다.

그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도 시간이 길어지면 모든 일들이 그렇듯 녹록치 않은 일이 되어 버린다.

허리도 뻐근하고, 어깨도 결린다.

쉬지 않고 발을 굴러서 그런지 다리도 저려왔다.

그래도 뽑아놓은 실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

소녀는 분주히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기지개를 켰다.

장시간 긴장해 있던 근육이 이완되고 피로가 잠시간 자취를 감춘다.

소녀는 직접 만든 실을 집어 찬찬히 들여다봤다.

균일하고 올곧은 제대로 된 모양새다.

고개를 한차래 끄덕이곤 실을 정리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충실한 반나절을 보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소녀의 얼굴에는 미미하지만 미소가 감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만다.

도련님, 뺨을 사정없이 몇 번이고 때렸지 않던가?

손을 펴고 손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여전히 붉은 기운이 맴돈다.

때렸던 내 손이 이 정도니까 지금쯤이면 도련님 뺨은 더 많이 부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정신없이 얼굴을 때렸지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지만 소녀도 억울하다면 억울했다.

갑자기 가슴을 마구 만져대면 누구라도 당황하기 마련이지 않을까?

끝까지 놓으려고 하지도 않고 말이야.

그 점이 더 괘씸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뿐.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래도 그렇게 때린 건 잘못이지.

한 대만 때렸어도 됐을 텐데...

어째서 나는 그렇게나 심하게 때렸을까?

게다가 정작 도련님이 만지기 전에는 나도 오기가 생겨서 만져보라고 막 소리쳤었고...

정말로 만질 줄은 몰랐지만...

아...몰라...정말 어쩌자고 그랬던 거람?

소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발갛게 물든 뺨을 가리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무거운 공기가 겨우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무리 들어봐도 작은 가슴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소리다.

이런 한숨을 반나절동안 몇 번이나 쉬었을까?

소녀는 일일이 세어 보진 않았지만 단순히 ‘많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잊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남은 하루를 보내고 싶지만 좀처럼 뒷골을 당기는 찝찝함이 그러도록 내버려두질 않는다.

소녀의 어깨는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장시간 물레를 돌린 탓도 있겠지만 이런 심리가 소녀의 자세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소녀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건 생각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작은 소녀의 생계가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발을 붙이고 허드렛일을 하며 입에 풀칠을 했다.

전적으로 주인어른과 마님의 호의에 의해 가능했던 일이다.

그걸 알기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해 왔다.

아직 어린 몸이라 어른들만큼 잘하지 못하는 것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은 그런 걸로 혼을 내거나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항상 자상하게 대해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도련님을 때린 일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사정이 돌변할지도 몰랐다.

아마 주인어른과 마님은 소녀에게서 배신감을 느끼게 되실 지도 모른다.

뭔가 변명하고 싶지만 그래도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뺨을 때린 것도 사실.

그분들이 화가 나서 쫓아내 버리시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도시에서 데려온 아비슈도 있지 않은가?

허드렛일을 할 계집아이가 둘이나 필요할까?

소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오른다.

결국 소녀는 보다 실질적인 현실적 문제에 직면한 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여기서 쫓겨나면 나는 어디 가서 살아야 할까?

쉽사리 떠오르질 않는다.

혹시 주인님께서 당분간은 내 사정을 봐주셔서 헛간 같은 곳에서 며칠 정도 지내게 해 주실 지도 몰라.

말은 항상 서있어서 어쩔 수 없지만 소는 눕기도 하니까 그 품에 기어들어 어떻게든 한밤의 추위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까지 소랑은 별로 친해져 본 적이 없는데...

이름이 데이지였던가?

삯꾼들이 그 암소가 순하다고 했었는데...내가 같이 자자고 하면 품을 내어줄까?

낯선 내가 품을 파고들면 괜히 화를 내는 것은 아닐까?

가슴 만진 걸로 나도 그렇게 도련님을 때렸으니 암소가 그런 걸로 화가 나서 날 때린다고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

그래도 좀 무서워...

소나 말의 뒷발에 채이면 크게 다치거나 심하면 죽기도 한다는데...

괜한 짓은 아닐까?

그냥 좀 춥더라도 빈 공간에서 몸을 움츠리고 자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과나 다른 맛난 과일이라도 몇 개 던져줘서 평소에 안면을 익혀두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더라면 이참에 쉽사리 그 품에 잠들 수 있었을 지도 몰랐을 텐데...

아...정말 모르겠어.

어느새 엄지손가락을 들어 이빨로 그 손톱을 깨물고 만다.

소녀는 생각했다.

외양간에서 잠을 자는 것은 싫다.

추울 뿐만 아니라 몹시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나 외양간도 며칠 지나면 떠나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쫓겨난 신세이니까.

그러면 갈 곳은 숲밖에 없다.

아니면 물레방앗간에서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은 밤이면 귀신이 나온다.

소문을 듣지 않았던가?

여자의 흐느낌과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밤마다 들린다고.

마을 아낙들이 빨래터에서 그 무서운 이야기를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깔깔대며 하는지 소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게 빨래는 힘에 부쳤고, 좀처럼 숨을 몰아쉬며 방망이를 휘둘러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 자리에서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에 섞여서 간간히 들려오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무서운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고 있노라면 개중에 짓궂은 아낙은 ‘너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는 아나?’하고 묻곤 했다.

당최 귀신 이야기를 하다가 왜 아기 이야기가 나오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무서운 이야기가 그쳐서 다행이라 여기며 ‘남자와 여자가 입을 맞추면 생겨요.’하고 답했다.

그러면 반드시 아낙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자지러지듯 웃으며 ‘맞다~! 아하하! 맞아!’하고 소녀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소녀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들의 쓰다듬는 손길이 싫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결하게 느껴졌고,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녀는 그런 기억을 더듬으며 쫓겨나더라도 절대로 물레방앗간에서는 머물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며 소녀는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직 주인어른과 마님께서 이날까지 키워주신 은혜를 다 갚지도 못했을 뿐더러 자기를 잘 따르는 헤나로 아가씨도 계속해서 챙겨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더 깊게 살펴보자면 이런 이유와는 동떨어진 소녀만의 비밀스런 이유도 있었다.

그건 어떠한 사연을 내포한다기 보단 소녀의 내적인 마음에 기인하는 이유였는데 여기에서 살펴보자면 이야기가 너무 지루해지는 감이 있어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어쨌든 소녀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이곳이 소녀의 집이고, 주인어른과 마님, 그리고 헤나로 아가씨...모두 소녀의 가족이다.

도련님?

그분도...뭐...어쨌든 가족이다...

결국 소녀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간 현기증이 일어 잠시 동안 비틀거렸지만 이미 소녀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빨리 도련님을 찾자.

그리고 사과하자.

일단 도련님 화가 풀리면 아침 일은 비밀로 해줄지도 모르니까...

그치만 지금까지 도련님이 했던 짓을 생각해보면 그냥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아.

혹 비밀로 해주더라도 그걸 빌미로 무슨 짓을 강요할지 알 길이 없는 걸.

장난인걸 알지만 그래도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어.

예전엔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장난이 심해지셔서...

그게 언제였더라?

소녀는 잠시 시선을 올리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생각해본다.

맞아! 아침에 이상한 말하고 의사선생님이 오시고...그때부터 장난이 부쩍 심해지셨지.

게다가 언젠가는 이상한 말로 부르지를 않나...

예전 도련님은 훨씬 얌전하셨었는데...

어른들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어.

사내아이들은 나이 들면 장난이 심해진다고.

그치만 왜 하필 그 대상이 나람?

아...몰라...이번에 뭘 해달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곤란한 부탁이라도 어쩔 수 없어.

난 선택할 입장이 아니니까.

소녀는 자신의 봉긋한 가슴에 손을 대어본다.

왜 이게 만지고 싶은 걸까?

정 원하면 마님께 부탁하면 될 텐데...

마님은 나보다 훨씬 큰데 말이야.

그런데 여길 만지면 기분이 이상해.

얼굴도 달아오르고, 가슴도 막 두근거리고...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진단 말이야.

도련님께 용서를 빌면 그 조건으로 이번에도 가슴을 만지게 해달라고 할지 몰랐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소녀는 막막했다.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것은 몹시도 싫다.

묘한 수치심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왔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집에 계속 머물 수 있게 된다면 이를 악물고 시선을 돌린 채 참아보리라.

소녀는 그렇게 다짐하며 방문을 나섰다.

그때 마침, 소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언니!”

헤나로 아가씨였다.

아가씨가 짓는 생긋거리는 밝은 표정에 소녀의 가슴에 가득하던 근심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세요, 아가씨?”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녀가 묻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