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헤나로는 홀로 남아 고개를 푹 숙이고 고독을 맛봤다.
하지만 보다 적당한 표현을 찾아보자면 삐졌다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어쨌든 소녀의 눈에 보이는 거라곤 자신의 두 발밖에 없었다.
동구 밖까지 다녀와서 그런지 흙먼지가 뽀얗게 내려 앉아 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지만 전부 비밀...
나한테만 비밀!!!
흥! 그렇지만 어차피 알게 되도 별 거 아닐 거야.
나도 별로 궁금한 것은 아니야.
그런 거 몰라도 조금도 속상하지 않으니까...
헤나로는 괜히 마루를 툭툭 소리 나게 발로 두드린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이 모습을 봤다면 분명 혼을 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빠가 있으면 분명 내 편을 들어줬겠지.
아무리 엄마가 날 혼내도 내 곁에는 아빠가 있어.
그래.
이 집에서 어쩌면 내 편은 아빠밖에 없을 지도 몰라.
아빠는 내게는 조금도 비밀 같은 것은 없겠지?
그러고 보니까 조금 있으면 아빠가 올지도 모르겠다.
이맘때쯤이면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오시곤 하니까.
물론, 다른 곳에서 드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집에서 드실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녀는 이런 우울한 기분, 혹은 소외 받는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떠오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아빠였다.
넓고 따뜻한 품에 안겨서 잔뜩 어리광 부리고 귀여움 받으면 이 기분도 조금은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아빠는 ‘부비부비’도 해줄 거고,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귀엽다는 말도 질리도록 해주겠지.
지금 내겐 그런 게 필요해.
헤나로는 마룻바닥을 발로 두드리던 걸 멈추었다.
고개도 들었다.
더 이상 먼지나 잔뜩 묻은 발을 내려다보고 있을 필요는 없어.
아빠를 마중 나가자.
틀림없이 기뻐해 주실걸?
이렇게나 귀여운 내가 직접 마중 나가는 거니까.
소녀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앞마당으로 나섰다.
어림짐작한 그녀의 감과 시간이 적절했는지 저만치서 사내 둘이 걸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그들 중 한명은 아빠라고 확신했다.
물론 아직 멀어서 어떠한 근거를 대라고 하면 우물쭈물 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헤나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자기에게는 지금 아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금도 논리적인 설명이 될 수는 없지만 소녀에게는 애초에 논리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내가 아빠한테 달려가면 날 번쩍 안아서 빙글빙글 돌려주고, 나중엔 목마도 태워 주실 거야.
지금쯤 달려가면 될까?
아니...아직은 너무 머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어차피 ‘부비부비’하고 귀엽다는 말, 그리고 목마를 탈 수 있는 것은 지금 가나 조금 있다 가나 똑같으니까.
생전 보지도 못했던 낯선 곡예사가 마을에 온다는 말에는 올지 안 올지도 모르면서 동구 밖까지 기꺼이 마중 나갔던 헤나로.
그러나 아빠를 마중 나가는 것에는 왜 이리도 인색한 것일까?
아무튼 소녀는 멀리까지 뛰기 싫어 늑장을 부린다.
그리핀이 알게 되면 땅을 치며 슬퍼하고 심지어 앓아누울 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괜히 아빠를 섭섭하게 만들 만큼 헤나로는 멍청하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마당구석에 나뭇가지로 끄적거리며 낙서를 한다.
아빠가 근처까지 올 때까지 이렇게 시간을 보낼 작정인 것 같았다.
소녀는 딱히 뭘 그려야 좋을지 몰라 의미 없이 동그라미만 몇 개 그렸다.
그렇지만 전혀 흥이 나질 않는다.
그보다는 다른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오늘은 누구를 데려오는 거람?
손님인가?
누군가 오늘 올 거라는 말은 없었는데...
맛있는 거 많이 가져왔으면 좋겠는데...
선물도 좋고.
결국 헤나로는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궁금증에 얼마만큼 왔나 까치발을 서고는 내리막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순간적으로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리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때 마침, 헤나로를 봤는지 아빠가 번쩍 손을 들고 흔든다.
역시 아빠가 맞았다.
소녀는 그렇게 자기 생각이 맞았음에 기뻐서 싱긋 웃었다.
더 이상 옆에 따라오는 누군가에게서는 관심을 거두어들이고 오직 열심히 손을 흔드는 아빠에게만 시선을 맞춘다.
헤나로는 아빠가 걸어오는 길을 따라 있는 힘껏 뛰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지금쯤 뛰어 내려가면 아빠가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릴 거라는 걸 말이다.
얼굴에는 지을 수 있는 가장 귀여운 웃음을 짓고, 헤헤 거리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 하기도 했지만 조금 비틀거리고는 곧바로 중심을 잡고는 다시 뛰었다.
한쪽 손을 뻗어 귀에 붙이고 하늘을 향해 흔들며 애타는 목소리로 불렀다.
“아빠~!”
그러자 아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기 시작했다.
“헤나로~!”
둘의 목소리는 마치 10년 만에 다시 만난 가족 상봉처럼 처절하기 그지없다.
그리핀은 숨을 몰아쉬면서 열심히 뛰었다.
딸아이가 아빠가 그리워 저리 열심히 뛰어 오는데 어떻게 조금 숨차다는 이유로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아니 될 말이다!
다리가 부러져도 나는 손으로 기어서라도 헤나로의 곁으로 갈 거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리핀은 달리고 또 달렸다.
저 모습 좀 보라지!
저 귀요미가 내 딸이란 말이지!
하..하하!
내가 곡예사를 데려온 것을 보면 더 좋아 하겠지.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 아빠의 엄지손가락을 꼬옥 붙잡고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고 말해주겠지?
그럼 나는 또 묻지 않을 수 없지.
‘얼만큼?’하고 물으면 틀림없이 팔을 이만큼 벌리며 ‘이마아안~큼!’하고 말하겠지?
바보 같은 미소를 얼굴에 한가득 채우고도 결국 흘러넘쳐 입가에는 ‘흐...흐흐흐...흐흐흐흐...크큭...크크큭!’하는 바보 웃음이 맴 돈다.
헤나로, 너는 이 아빠의 기쁨이란다.
세상 전부를 준다고 해도 너와는 절대로 바꾸지 않을 거야.
네 엄마 일곱을 데려와 너와 바꾸자고 해도 네 머리털 하나 하고도 바꾸지 않을 거야!
애 엄마가 들으면 머리털을 몽땅 뽑히고 말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며 뛰고 또 뛴다.
마침내 둘은 길 한복판에서 만나고 헤나로는 당연하다는 듯 양 팔을 넓게 벌렸다.
그리핀도 당연하다는 듯 두 손을 헤나로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는 번쩍 들어 올려 뱅글뱅글 돌며 ‘아하하하하하하~!’하고 웃기 시작했다.
그에 맞추어 헤나로도 ‘까르르르르~!’ 귀여움을 한껏 가장한 알량한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아빠! 아빠! 세상에서 누가 가장 귀여워요?!”
헤나로가 묻자 그리핀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외쳤다.
“그야 우리 헤나로지!”
“얼만큼요?”
그러자 그리핀은 헤나로를 든 채로 좌에서 우로 한껏 있는 힘껏 휘두르며 ‘이마아아안~큼!’하고 말한다.
그런데 그리핀은 알고 있을까?
지금 자신이 조금 전 상상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뭐, 어쨌든 그리핀의 표정을 보건데 충분히 그는 만족하고, 또한 행복한 것 같으니 괜한 여기서 딴지는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이러나저러나 딸과 아빠의 나름 흐뭇해 보이는 장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걸 보는 사내는 무척이나 찝찝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곡예사 라몬.
돈을 밝히고 어린애라고 절대 봐주지 않는 강철심장을 가진 사나이.
그는 저 소녀가 무척이나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뭐지?
대체 뭘까?
여기는 처음 와보는 마을이고 절대로 낯이 익을 리는 없는데...
그런데 낯이 익단 말이지?
내가 이 마을에서 본 어린애라고는 동구 밖에서 봤던 짜증나는 애새끼들밖에는 없었는데?
라몬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리핀이 뱅글뱅글 돌려대는 꼬마 계집애를 좀 더 살폈다.
.....
...
.
제...젠장!!!!
라몬은 순간 떠오르고 말았다.
저 계집애!!!!
씨...씨바알!
좇 됐잖아?!
이 집 애였단 말이야?!
후회가 물밀 듯 밀고 내려온다.
내...30골드...씨발...
한동안 좀 편하게 지내나 했더니...
이게 뭐야?!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아, 젠장할!
노인네는 뭐하고 있었던 거야?!
이 애새끼들 잡아두지 않고?!
제대로 일처리 좀 하라니까!
씨발!
아...씨발!!!
그때, 완전히 파묻었어야 했는데...
주변에 보는 사람도 없었고...
눈물이 앞을 가릴 것만 같다.
간만에 큰 월척 좀 건져 올렸나 했더니 완전 헛수고였던 셈이지 않은가?
아니지.
아니야.
어린애들은 다 멍청하니까 내가 누군지 기억 못할 수도 있고.
그래!
그냥 잡아떼자!
애가 하는 말 따위 믿어 줄 리 없잖아?
아니야.
저 모습을 보라고!
저렇게까지 딸 바보면 소랑 개랑 눈 맞아서 붙어먹었고, 새끼는 고양이를 낳았다고 해도 믿어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