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59화 (59/200)

00059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헤나로는 목마를 기대했지만 아빠는 지쳤는지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사랑은 무한하지만 중년의 체력은 유한한 것.

하지만 헤나로는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다만 아빠 때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손님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삐쭉 내밀었을 뿐이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손이었다.

뭔가 선물이라도 가져왔는지 살폈지만 빈손이었다.

실망감으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이 조금 위로 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내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헤나로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만다.

어느새 그 사내를 가리키고 있는 그녀의 검지손가락.

무척이나 귀여운 모양새를 지녔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지만 적어도 그 손가락을 마주해야만 했던 곡예사 라몬은 그리도 얄밉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검지손가락.

그러나 이 둘의 관계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그리핀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곡예사란다! 하하하! 이 아빠가 특별히 데려왔지. 우리 헤나로를 위해서 말이야.”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말을 어서 듣고 싶었지만 좀처럼 헤나로의 입에서는 그 말이 흘러나오질 않았다.

그저 곡예사와 아빠를 번갈아가며 쳐다볼 뿐이었다.

간혹 흘러나오는 소리는 “어..어...어...!”정도?

이건 너무 좋아서 내는 소리일까?

그 정도로 좋단 말이냐?

그래도 이 아빠는 헤나로가 제대로 말해 주었으면 좋겠단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어서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는 그리핀.

하지만 한참만에야 튀어나온 소리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에비!”

잠시 동안 그리핀은 헤나로가 내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곧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고,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헤나로는 “최고~!”라고 말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우리 귀여운 헤나로가 사람에게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할 리가 없지.

그러나 헤나로는 다시 한 번 외쳤다.

그것도 딴에는 아주 위협적으로.

“에비! 에비!!! 저리 가! 쉬잇! 쉬이잇!”

곡예사 라몬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놀랄 정도였는데, 마치 이 아이가 대체 왜 이러는지 조금도 모르겠다는 감정이 엿보였다.

그리핀은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헤나로가 이렇게나 예상 외로 반응하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좋은 결과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맞는 행동은 좀처럼 떠오르질 않는다.

그러나 이대로 있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리핀은 아빠로서, 그리고 손님을 초대한 집주인으로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헤나로, 뭐하는 거냐? 이러지 말고...”

“아빠~~! 저 아저씨는 왜 데려온 거예요?!”

그건 조금 전에도 말했을 텐데?

널 위해서...

다 널 위해서란다.

우리 헤나로!

그보다 헤나로가 날 질책하는 말투라니...

그리핀의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어쨌든 헤나로는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이대로 무너져 내릴 수는 없다.

지금은 어떻게든 헤나로 마음속에 다시금 아빠를 향한 사랑의 불꽃을 지펴야 한다.

곡예사를 그렇게도 기대했었는데...

조금 전만 해도 양 손으로 들어 올려 한 폭의 동화 같은 모습을 연출했던, 그래서 지금도 허리가 무척이나 쑤시는 그리핀으로서는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리핀은 라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저런 얼굴이니까 우리 헤나로가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리핀은 라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말했다.

“좀 웃어 보시오. 딸아이가 무서워해서...”

라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나로를 향해 씨익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헤나로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

어느새 헤나로는 아빠를 향해 뛰어왔던 것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숨도 쉬지 않고 집을 향해 뛰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그리핀은 그대로 주저앉으며 손을 뻗쳐 보지만 벌써 저만치 뛰어가는 헤나로가 잡힐 리 없다.

-----------------------------------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마주 본 채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며 우물쭈물 거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게 또 쉽지가 않은 걸까?

로드리고는 자기가 불러냈기 때문에 그 압박감이 더 심했는지 혹은 낸시가 너무 심한 압박감에 목이 메었는지 아무튼 처음 입을 연 것은 로드리고였다.

“여어~!”

손을 들어 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본다.

“...예...”

낸시도 살짝 고개를 움직이며 그 인사를 받고, 조금 더 숙여 인사를 건넨다.

낸시는 생각했다.

정말 얼굴이 다 나았구나.

포션을 사용했다는 말은 정말이었나 봐.

아직 뺨을 때렸던 내 손바닥도 따끔거리는 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얼굴이 저렇게 멀쩡할 리가 없지.

그런데 포션은 어디서 나신 걸까?

혹시 주인어른이나 마님이 상태가 심한 것을 보시고 사용하신 걸까?

낸시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생각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건 로드리고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가 인사를 건넸는데 거의 말도 않고, 고개만 까딱이는데 이건 무슨 의미지?

‘나는 너랑 말하기 싫어요.’라고 하는 건가?

‘네가 도련님이니까 나오기는 나왔다. 하지만 더 이상 상대하지는 않겠다?’ 뭐 그런 거?

그럼 여기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무슨 결과가 나오는 거야?!

그때, 낸시가 로드리고도 들을 정도로 꼴깍 소리 나게 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로드리고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미세하게 다리를 떨며 낸시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말은 귀로 듣는 것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눈으로 그 내용을 확인하는 것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포...포션 이야기 들었어요...아...아가씨한테...”

포션?

왜 갑자기 포션?

설마, 나 다쳤던 걸 걱정해 주는 건가?

그새 촉새 같은 계집애, 헤나로가 또 미주알고주알 전부 까발렸구나.

뭐, 그래도 걱정해 준다면야...이야기가 훨씬 쉬워지지. 헤나로 굿잡!

“아! 포션...그 이야기 들었구나. 뭐, 다행이었지. 머리가 핑핑 돌았었는데...처음엔 너무 어지러워서 제대로 일어서지를 못하겠더라고. 그냥 땅바닥에 철푸덕 쓰러져 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그렇게나요?!”

웬일인지 낸시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다시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다.

“응. 정말 아팠거든. 도무지 정도란 것을 모르는 것 같았어. 정말 인정사정없이 ‘퍼억~!’ 소리와 함께 땅바닥을 굴렀으니까. 데굴데굴 한참 말이야. 공중에 잠시 동안 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힘이 장난 아니었어.”

낸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구나.

그럴 줄 알았어.

대체 언제 몸이 공중에 떴었다는 거야?

그만큼 힘도 없는데...

애초에 그런 힘이 있다면 빨래하는데 그렇게 애먹지도 않았을 텐데...

게다가 많이 때리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땅바닥을 구르지는 않았었는데...

나도 눈이 있는데 그렇게 심한 거짓말은 너무하잖아?

반성하고 있는데...그렇게까지 말하면...

지금 사과해도 분명히 뭔가 이유를 들면서 잔뜩 괴롭히고 협박하고...결국에는 또 가슴을 만져 대겠지.

나...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가슴정도는 각오했지만...

그렇지만 또 당황해서 얼굴을 때려버리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아.

나...마음의 준비가 제대로 된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잘...참을 수 있을까?

낸시의 시선은 로드리고의 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낸시가 한참 만에 다시 묻는다.

“주인어른이나 마님도 아시나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낸시의 좁은 어깨는 눈에 보일 정도로 파르르 떨렸다.

“아니, 아직 모르셔. 솔직히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 뭐, 딱히 말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누군가 은혜를 베풀면 그에 대한 보상은 필요한 법이니까.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잖아?”

로드리고는 자기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포션을 사용해 준 노인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듣는 낸시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낸시가 눈을 감고 한차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올게 왔다.

드디어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어.

대체 왜 내 가슴에 그렇게나 집착하는 거야?

장난이라도 이건 너무 심해.

그래도...나도 잘못했으니까...

도련님이 베푸는 비밀로 해주는 은혜(?)에 이게 적절한 보상이 되어 준다면...더 이상 망설일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계속해서 만져대면 어쩌지?

내가 얼마만큼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또 못 참고 뺨을 때리면...그때는...

그래도...가슴 정도 만지지 못하게 한다고 그게 사람도 아니라고 말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모르겠어.

아무튼 가슴...

참으면 주인어른도 마님도 모르게 지나갈 수 있어.

하아...하아...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지만 왜인지 서러움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낸시를 바라보는 로드리고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계속 대화를 피하고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슴 만졌던 거에 대해서 말이야.

아주 사무적인 대화만 이어지는 기분이야.

아무튼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왔으니 잠깐 상대는 해주겠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까?

지금 저렇게 눈도 감고 숨도 몰아쉬고 하는 것도 진짜 나랑 말하기 싫지만 이렇게나 참고 있다고 대놓고 보여주는 거냐?

이거 정말...

사과할 타이밍을 찾을 수가 없어!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어!

그래도 일단 말하고 보자.

이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진행되는 것은 없으니까!

로드리고가 막 이렇게 결심한 순간 낸시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도 일단 조금 전 일은 정말 미안했다고 말하려고 눈을 뜨고 로드리고를 쳐다본다.

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그들이 막 입을 열고, 결전의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람이 나타났다.

건물 모퉁이에서 헤나로가 쏜살처럼 달려 나온 것이다.

“오빠~! 에비! 에비가 나타났어! 아까 그 나쁜 아저씨!!!”

“뭐?”

로드리고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곡예사 말이야!!!”

“뭐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가 담긴 목소리로 로드리가 되묻는다.

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낸시는 사과하려던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입안 어딘가에 잡아두고 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