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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60화 (60/200)

00060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지금 여기에 왔다는 거야?!”

“응!”

헤나로는 로드리고를 올려다보며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빠가 데려왔어.”

“뭣 때문에?!”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나봐. 나 엄청 귀여우니까!”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헤나로.

“...입에 침이나 발라! 이 미친 계집애야!”

로드리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헤나로는 얼른 자기 검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귀엽다며? 오빠도 그렇게 말했잖아?”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헤나로.

하지만 로드리고는 더 이상 이런 어린애 장난에 장단을 맞추어 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얻을 것은 다 얻었다.

낸시도 이미 여기 있고, 말만 잘 하면 어떻게든 된다.

따라서 헤나로에게 아쉬운 소리 할 일도 없는 것이다.

이 계집애도 차갑고 쓰라린 진실을 알아야 해.

이건 다 이 계집애를 위한 일이야.

오늘 하루 동안 쌓인 짜증과는 조금도 관계없는 일이다.

“헤나로 잘 들어! 네 검지손가락 하나도 안 귀여워!”

로드리고는 시선을 헤나로의 눈에 똑바로 맞추고 순식간에 윽박지르듯 말해버린다.

“뭐...뭐라고!?”

헤나로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자, 네 검지손가락 잘 보라고. 응? 잘 들여다 봐.”

억지로 헤나로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앞에 들어 보인다.

그렇게 헤나로는 자기의 검지손가락을 자기 의지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했다.

그랬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귀여워보이던 검지손가락이 더 이상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그냥 평범한 손가락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에게 있어서 절대로 알고 싶은 진실은 아니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평생 동안 영원하고 행복한 거짓말로 남겨두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그러기에는 로드리고의 속이 너무 좁았고, 헤나로가 반나절동안 로드리고에게 요구한 것이 너무 많았다.

로드리고는 헤나로에게 짓궂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알겠어? 다른 손가락이랑 조금도 다를 바 없지? 꿈틀꿈틀...끈적끈적..아..진짜..너 침 흘렸냐? 짜증나게. 암튼 그냥 어린애 손가락이야. 진실은 알아야 하니까 말해주는 거야. 나도 그냥 넘어가면 좋지. 하지만 이렇게 말해주는 건 다 너를 생각해서니까. 그러니까 고맙게 생각해야 해.”

“......”

“야, 대답 안할래?”

“내..검지손가락...정말 별로 안 귀엽네...”

입술이 툭 튀어나온 헤나로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다.

“그러니까 방금 다 말해줬잖아?! 똑같은 말 또 하게 만드네?! 자! 말해 봐. ‘오빠 진실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하고.”

“...절대로 싫어!!!”

우울한 목소리는 이미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오기와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작은 소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이게 정말?! 오빠한테 말대답이나 하고?!”

“흥이다!”

“콧물 나왔거든?!”

“웃겨?! 안 나왔거든?!”

그러면서도 얼른 옷소매로 코밑을 훔친다.

하지만 콧물은 묻어나지 않는다.

“헤?! 속았지?”

로드리고가 이죽거린다.

“안 속았거든?!”

“방금 옷으로 닦았잖아?!”

“...이건 간지러워서 살짝 비빈거야!”

“거짓말쟁이 계집애는 절대로 시집 못가!”

“...거짓말 아니다, 뭐!”

“아무튼 헤나로는 시집 못가! 조금도 귀엽지 않으니까.”

“정말!!! 그렇게 말하지 마!!!”

헤나로는 로드리고에게 달려들어 배에 펀치를 한 대 날렸다.

하지만 그 주먹은 로드리고의 손에 잡혀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한다.

“알았어! 알았어. 계집애가 발끈 하긴! 시집 갈 수 있어. 자~! 시집 간다~! 됐지? 꼴에 계집애라고...”

“왕자님이랑!”

“야! 바랄 걸 바래!?”

“왕자님이랑!!!”

“아! 진짜! 알았어! 왕자님이랑! 그래서 엄청 불행하게 살 거야. 글씨 모른다고 구박받으면서.”

“이씨!!!”

헤나로는 계속해서 로드리고에게 오기로 달려들었지만 로드리고는 어렵지 않게 그 고사리 손을 전부 탁탁 쳐내며 한 대도 얻어맞지 않았다.

“그만해!”

“그럼 어서 취소하란 말이야!”

“그래. 그래. 취소. 됐지?”

그제야 헤나로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쉰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로드리고를 향한 채 노려보고 있다.

“야, 암튼 잠깐 저리 가있어. 낸시랑 중요한 이야기 중이니까.”

“그치만 나쁜 아저씨 있는데?”

“그러니까 낸시랑 이야기 다 끝나면 나도 가볼 테니까 잠깐 자리 피해 있으라고.”

“그럼 나도 여기 있을래.”

헤나로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여 자기 발을 내려다본다.

“야! 저리 가 있으라고! 중요한 이야기 한다니까!”

로드리고가 짜증을 내자 헤나로는 여전히 고개는 들지 않고 좌우로 휙휙 저으며 절대로 이곳을 뜨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야! 야!”

로드리고가 재차 두 번이나 부른다.

그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꽤 거친 목소리에 헤나로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로드리고는 결국 손을 내밀어 헤나로의 팔을 잡고 억지로 끌었다.

“야! 저리 가 있으라고!”

“나 혼자는 싫단 말이야! 무섭고...”

“무섭긴 뭐가 무서워? 아버지 계실 거 아니야?!”

“그래도 무서워!”

“너 맞고 갈래?! 자꾸 고집 부리지 마!”

“고집 부리는 거 아니다! 뭐.”

“이게 고집 부리는 거야!”

“그럼 그냥 고집 부릴래.”

“그건 내가 싫거든?”

“나도 싫어.”

“그럼 고집 안 부리면 되겠네? 빨리 저리 가 있어.”

“그게 아니라! 저리 가는 거 싫다고! 고집 부리는 거는 좋고!”

“그럼 이 오빠도 고집 좀 부려야겠다. 저리 가!”

“나만 고집 부리는 거 좋다고! 오빠가 고집 부리는 거는 싫고!”

“야! 빨리 안가?!”

“왜 나한테만 전부 비밀인데?!”

“뭐?!”

“오빠도 그렇고, 낸시 언니도 그렇고! 나한테는 전부 비밀이야!!!!”

헤나로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나..나도...흑...흑흑...여기...있을 거란 말이야!!!”

아...정말...계집애들은 툭하면 운단 말이야.

로드리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짜증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정말...계집애...누굴 닮아서 이러는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나랑 같이 가자. 그 곡예사 있는 데로 나랑 같이 가자고! 하아...낸시야...저기...조...조금 있다 할 이야기 있으니까...저기...암튼...이따 부르면 좀 나와.”

헤나로에게 말할 때랑은 완전히 다른 상냥하고 부드러운...그리고 조금 주저하는 목소리가 로드리고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낸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보던 헤나로가 엉엉 울며 로드리고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나한테도...흑..흑흑...좀더...상냥하게...말해줘...오빠...나도...그런 게 더 좋단...흑..흑흑...말이야...그리고...내 검지손가락 귀엽다고 하면...흐윽...안 돼?”

로드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그래...네 검지손가락 귀여워. 그냥 그렇다고 치자. 그러니까 울지 마. 너 울면 아버지한테 혼난단 말이야! 일단 저기서 눈물 닦고 가자. 울었던 거 모르게. 야! 빨리 눈물 안 그쳐?!”

“흐..흐윽...사...상냥하게....흐끅...흐끅....”

“아..진짜~! 그래. 상냥하게. 이 오빠는 헤나로가 안 울었으면 좋겠어. 귀여운 얼굴 엉망이 되니까.”

“...그..그렇게 말하면...차...참아볼게...흐..흐윽...”

헤나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로드리고는 생각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짜증나.

이 계집애, 오지게 우네?

아버지 오실 때까지 버팅 겨서 나 혼나보라고 이러는 거 아니야?

암튼 이래서는 낸시랑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되잖아?

그런 분위기...또 겪어야 한단 말이야?

미치겠다...

로드리고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곡예사에 대한 하찮은 앙심보단 낸시와의 관계 회복이 더 먼저였다.

그 곡예사 놈은 다 잊으려고 했는데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이야?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그 순간 노인의 간절한 부탁이 귓가를 스치는 것 같았다.

그냥 모른 척 하자.

뭐, 얻어맞은 것은 확실히 기분 나쁘지만 분명 그 노인도 일이 커지면 곤란해 질 테니까.

게다가 방금 전 낸시한테 말해 놓은 것도 있는데 여기서 고자질하듯 크게 떠들어봐야 나만 우스운 녀석 될 테고.

로드리고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려는 헤나로를 말리며 찍어내듯 자기 소매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괜히 비비면 눈꺼풀이 부어올라 누가 봐도 울었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의도야 어떻든 그런 부드러운 오빠의 손길이 마냥 좋은지 헤나로는 금세 ‘헤헤’거리며 웃는다.

“야, 헤나로. 아까 동구 밖에서 그 아저씨랑 있었던 일...그거 비밀로 하자.”

“왜?!”

헤나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는다.

“그 할아버지...불쌍하잖아?”

“...그치만...”

불만 가득한 눈으로 로드리고를 바라보는 헤나로.

“응? 우리 그렇게 하자. 비싼 포션으로 치료까지 해줬는데 전부 까발리면 좀 그렇잖아?”

“...오빠가 그렇게 하자면...뭐...나도...비밀로 할게.”

“그래.”

로드리고는 헤나로의 머리를 한차례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다.

그 손길을 느끼며 헤나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오빠...이거 우리끼리 비밀이다. 그치? 나도 오빠랑 같이 비밀 있는 거지~?”

이 계집애 또 무슨 소리 하려는 거야?

당최 무슨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로드리고는 더 대답해주기도 귀찮아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헤나로는 좋아서 생글생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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