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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61화 (61/200)

00061  슬픈 저녁  =========================================================================

주방이 가득 찼다.

평소에 쓰지 않던 테이블까지 내와서 라몬이라 불리는 곡예사와 조금 후에 아비슈가 데려온 나이 많은 곡예사까지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처음 라몬 녀석은 날 보고는 시선을 피했지만 내 뺨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고는 오히려 씽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순간 울컥했지만 옆에서 난처한 미소를 짓는 노인을 봐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버지는 과장된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을 꺼냈고, 두 이방인은 그런 아버지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어머니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혹은 조금은 지루하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아버지와 곡예사를 지켜보셨다.

식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만 양이 좀 더 많아졌을 뿐이다.

저녁을 먹고 마을 광장으로 가서 둘이 재주를 보이기로 했다.

그러나 나도, 헤나로도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꽤 섭섭했는지 아버지는 잠시 울상을 지었지만 막상 구경하게 되면 분명 좋아할 거라는 라몬의 장담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식사 후에 나와 헤나로는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낸시는 뒷정리 때문에 남고, 그런 낸시를 아비슈가 돕겠다고 했다.

헤나로와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데 노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고맙구나.”

노인의 감사 인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할 건 없어요. 아무튼 오늘 저녁이 지나면 빨리 마을이나 떠나 주세요.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고...”

“그래. 그건 걱정하지 마렴. 너희 아버지께서 라몬에게 30골드를 약속하신 모양이야.”

“30골드나요?!”

로드리고가 언짢은 투로 노인을 추궁하듯 물었다.

“그래. 과한 돈이기는 하지.”

“그래도 포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건 그렇지. 오늘 저녁에는 멋진 재주를 보게 될 거야.”

“할아버지가요?”

“아니. 나는 이미 늙었으니까. 그렇지만 라몬은 꽤 재능이 있어. 실망하지 않을 거란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지켜보렴. 성격과 재능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이만 실례하죠.”

그렇게 로드리고는 자리를 떴고, 헤나로도 얼른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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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몬은 그리핀이 내어 준 방에 놓여있는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조금 후 노인이 그 방에 들어섰다.

라몬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노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뭐?”

“애새끼 볼떼기 말이야. 분명 조금 부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었나보지.”

노인은 자세한 말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라몬은 그렇게 넘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묻는다.

“이봐, 나는 바보가 아니야. 어서 말해 봐. 응?”

“대체 뭘 말인가?”

“뭐긴 뭐야? 어떻게 애를 싹 낫게 했냐는 말이야?”

“그냥 운이 좋았었다니까.”

“그래?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아마 그런 거겠지?”

라몬은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이 없는 건지 그래도 자리에 누워버린다.

노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라몬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며 말했다.

“그럼 이건 내거로군. 이제부터 말이야.”

노인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내놔! 그건 내 거야!”

“크..크큭...뭐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란 말이야?! 그냥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았어? 이렇게 옴팡진 노인네를 봤나? 포션이야! 포션이라고! 하하하! 이거 한 몫 단단히 했군 그래. 하하하!”

“어서 내 놔!”

노인은 평소와는 다르게 몹시도 집착하며 사내에게 사정했다.

“됐어. 그동안 내가 돌봐줬으니까 이건 그 대가라고 생각하란 말이야.”

“어서 내놓으란 말이야!!”

노인은 결국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창때의 사내를 당해내기에는 불가능했다.

노인은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다 늙어서 뭔 욕심이 그리 많아? 노인네가 가지고 있어봐야 그런 하찮은 새끼들 치료해주는데 낭비할 게 뻔한데...그럴 바에야 내가 갖는 것이 훨씬 낫지.”

“제발...그걸 돌려줘...그건...크으윽...”

노인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라몬도 그 소리에는 기분이 착잡해 지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씨발! 닥치지 못해? 재수 없게 왜 그렇게 지랄이야? 그냥 내가 좀 맡아두고 있을 뿐이야. 나중에 필요하면 내게 말하면 내가 내어줄 테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가지고 다니다가 노인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니 내가 맡아 두는 편이 훨씬 낫지.”

“돌려줘...”

“아! 진짜! 좋아...좋아. 정 그렇게 바라면 이렇게 하자고! 오늘 저녁에 노인이 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공연 하라고. 응? 내가 자리를 내어줄 테니까. 어때? 좋지? 응?”

“......”

“이건 그냥 맡아 두는 거야. 포션은 비싼 건데 그렇게 조금 다친 애새끼들한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 앞으로는 이걸 공동 소유로 해서 둘 다 합의할 때에만 쓰는 거지. 응? 그렇게 하자고. 알았지?”

“그럼 내가 가지고 있겠어. 공동 소유라면 내가 갖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잖아?”

노인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라몬이 말한 합의점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걸 여전히 라몬의 손에 맡겨 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라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한 달 동안 내가 보관하고 그 다음에 노인이 맡아둬. 그럼 되겠네. 그렇지?”

“그렇지만...”

“이봐, 더 이상 여행하기 싫어? 응? 나도 많이 양보했잖아? 잠시 내가 맡아둔다는 것뿐이니까. 오늘 공연 기대할 테니까. 나는 사실 노인네가 하는 공연 싫지 않거든. 내가 하는 것도 다 노인한테 배운 거고. 그러니까 한번 실력 좀 보여보라고. 매일 그 지루한 저글링만 하지 말고. 알았지? 응?”

노인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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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점시 때와 마찬가지로 식사를 했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것은 아버지께서 오랜 옛날부터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은촛대와 쟁반을 식탁 위에 내놓으신 것이다.

사실 아직 날이 완전히 저문 것이 아니라 은촛대에 불을 붙일 필요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기어코 불을 붙이셨고, 어머니는 잠시 핀잔을 주셨지만 그걸 막지는 않으셨다.

은촛대와 은쟁반은 가문의 자랑이었다.

물론, 내전 이후로는 더 이상 소유하지 못했다.

재산의 대부분은 찾을 수 있었지만 소재를 파악하기 힘든 것 까지 다시 회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도 오랜만에 본 그 물건들이 꽤 반갑기는 했다.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라몬과 노인은 연신 고개를 숙여대며 고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은촛대와 은쟁반을 항상 보관해 두시는 상자에 다시 넣으셨고, 자물쇠를 채웠다.

몇 번 흔들어 보았지만 자물쇠가 잘 채워졌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곧 우리는 짐마차를 올라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마부석에 앉으셨다.

막 라몬도 올라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그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아이고! 이거 배가 탈이 난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마부석에서 내리시더니 라몬을 부축하며 살피셨다.

“괜찮은가?”

“저기...그게...오랜만에 너무 잘 먹어서 탈이 난 것 같습니다. 이거 염치없습니다요. 나리. 저기 괜찮으시다면 제가 뒷간에 좀...”

“그럼 어쩔 수 없군. 기다리지.”

“아이고! 그건 제가 염치없는 인간이 될 뿐이죠.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출발 하십시오. 오늘 제페토 노인이 자기 실력을 충분히 보일 테니까 제가 좀 늦어도 충분히 빈자리를 채울 겁니다요!”

“그래도 어찌 그러겠나?”

“저를 부끄럽게 하지 마십시오. 나리. 사람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요.”

“후우...그렇게까지 말하겠다면 어쩔 수 없군. 그럼 아이들 중 하나를 남길 테니 볼일 보고 따라오도록 하게.”

“그러실 필요 없으신데...저 혼자서도...”

“그만하게. 나도 체면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더 이상 말 말게.”

“뭐...그러시다면...헤..헤헤...”

“누가 남겠느냐?”

아버지는 짐칸에 타고 있는 우리를 향해 물으셨다.

헤나로는 절대 싫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물론, 아버지께서 헤나로가 남는다고 해도 남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도 남고 싶지는 않았다.

저 형편없는 인간이랑 같이 집에서 광장까지 동행하는 것은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눈치를 보던 낸시가 말했다.

“제가 남을 게요. 주인어른. 아직 저녁 식사 끝나고 정리를 다 하지 못했으니까요. 곡예사 분을 기다리면서 정리하면 대충 시간이 맞을 거예요.”

“오! 그러면 되겠구나. 그럼, 낸시야 부탁하마. 라몬, 저쪽에 마차 한 대가 더 있으니까 말을 매어서 타고 오게. 괜히 걸어오지 말고.”

나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그래서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저도 남을래요.”

그러나 헤나로는 고개를 저으며 내 팔을 꼭 붙잡았다.

“나 혼자만 먼저 가는 거 싫어.”

“아비슈도 같이 가잖아?”

“그래도 싫어.”

“그래. 로드리고, 괜히 고집부리지 마라.”

아버지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지 마부석에 곧바로 몸을 싣고 마차를 출발시키셨다.

나는 고개를 돌려 멀어져가는 낸시를 쳐다봤다.

그녀도 잠시 나를 쳐다봤다.

나도...그리고 다른 그 누구도 몰랐다.

다시..다시..한 번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런 기적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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