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슬픈 저녁 =========================================================================
둘만 남은 마당에서 낸시가 말했다.
“아저씨, 그럼 저는 부엌에 있을 테니까 일 다 보시면 알려 주세요.”
라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장작 패는 도끼가 어디 있는지 아니?”
“도끼요?”
“그래.”
“알기는 알지만.”
“그럼 좀 알려주렴. 곡예 하는데 필요한 거라.”
“뒷마당에 있어요. 장작 쌓여 있는 곳에요. 그보다 배는 괜찮으세요?”
“아! 이제는 괜찮네. 하하! 뭐, 별것 아니었나보지. 암튼 나는 도끼나 챙겨서 가볼 테니까 너도 얼른 광장으로 가거라.”
“하지만 제가 안내해 드려야 해요.”
“그런 것 됐으니까.”
“안돼요. 주인어른이 말씀하신 건데..”
“이런 코딱지 만한 동네에서 길을 잃을까봐? 자, 어서 걱정하지 말고. 응?”
“기다릴래요.”
라몬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 계집애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확 그냥!
하여간 시골 멍청한 계집애들은 당최 들어 쳐 먹지를 않아!
결국 라몬은 딱히 계집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조금 귀찮지만 몇 가지 과정을 거치기로 결정했다.
이건 어차피 저 촌년이 자초한 일이다.
내 잘못 따위는 조금도 없지.
라몬은 뒷마당에 가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낸시는 그런 라몬을 따라 움직였다.
어딘지 그 사내가 의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대체 곡예를 하는데 도끼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광장에 가면 도끼 정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텐데?
라몬은 낸시가 따라오든 말든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낸시는 라몬을 불렀다.
“아저씨, 광장으로 가셔야죠.”
“......”
라몬은 듣지 못했다는 듯 그런 낸시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가 계속 움직이자 낸시는 그런 사내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저씨?!”
낸시가 소리치자 라몬은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왜?!”
“그러니까 광장으로...”
“거긴 내가 알아서 시간 맞춰서 갈 거니까 닥치고 가만히 좀 있어. 촌년이 확 뒤질라고!”
위협적인 사내의 말에 낸시는 겁을 집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명확해졌다.
저 사내는 뭔가 나쁜 짓을 하려는 거다.
사내의 사나운 눈초리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리가 떨려온다.
무서워...
하지만 지금 이 집에는 나밖에 없어.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하니까...
낸시는 이를 악물고, 마주 사내를 노려봤다.
하지만 사내는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 주인이 나한테 부탁한 것 때문이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돼.”
그러나 그런 거짓말을 믿기에는 이미 낸시의 확신이 너무 컸다.
사내도 마지막으로 그냥 한 번 던져본 말인지 결국 어깨를 한번 들썩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 하아...”
퍼억!
순간 낸시는 엄청난 통증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그녀가 부딪힌 탁자가 넘어지며 요란한 우당탕 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한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낸시의 사정이야 어떻든 라몬은 도끼를 번쩍 쳐들고 은촛대와 은쟁반이 들어 있는 상자의 자물쇠를 향해 내려쳤다.
콰앙~!
한차례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여전히 견고한 자물쇠는 나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라몬은 개의치 않았다.
다시 그가 머리 위로 도끼를 들어 올리고 내려쳤다.
일련의 행동이 끊이지 않고 몇 번이나 이어졌다.
어김없이 도끼는 자물쇠를 내려쳤고 결국 자물쇠는 힘을 잃고 떨어져 나갔다.
숨을 몰아쉬며 라몬이 도끼를 옆에 내려놓고, 은촛대와 은쟁반을 집어 들었다.
“크..크크큭...그렇지. 하하하! 30골드는 아깝지만 그래도 이게 있으면 남는 장사지! 하하하! 그 노인네도 지긋지긋했고. 포션도 챙겼으니까...하하하! 요즘은 일진이 정말 좋아! 하하하!”
라몬은 주변을 살피더니 적당한 포대자루에 촛대와 쟁반을 집어넣었다.
챙그랑 금속음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라몬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 곡예사는 지긋지긋해.
이런 걸로 언제까지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이야?
결국 나도 언젠가는 노인네처럼 되어버릴 텐데...
그런 뻔히 보이는 암울한 미래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 크크큭.
그가 막 주방을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발을 잡는 손이 있었다.
그는 뒤돌아봤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조소와 짜증이었다.
아직도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사내를 올려다보는 시골 소녀.
뭐야?
응?
어차피 얹혀사는 계집애가 그런다고 누가 칭찬이라도 해줄 것 같냐?
멍청한 계집애가!?
라몬은 발을 들어 올렸다.
미약한 힘으로 발을 붙잡고 있었던 소녀의 손은 이내 떨어져 내렸다.
그의 발은 어김없이 소녀를 향했다.
퍼억~!
“아악~!”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냥 떠나려고 했더니 꼭 이렇게 귀찮게 군다면 따끔한 교훈을 내려주는 것도 어른의 의무이지 않은가?
비릿한 미소가 라몬의 입가에 지어졌다.
아직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벌레 같은 계집애.
라몬은 아무렇게나 내팽겨 두었던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소녀에게로 다가왔다.
“야,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나는 너한테 뭐, 특별히 억하심정은 없지만 그래도 세상의 비정함을 좀 알아야 하지 않겠냐? 응?”
낸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내는 바닥에 포대자루를 잠시 내려놓고는 두 손으로 도끼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하..하지 마요...아..아저씨..제발...”
낸시의 말에 사내는 낄낄대며 말했다.
“크크큭...하하하! 뭘 하지 마는데? 응? 왜 하면 안 되지? 날 설득해 보던가?”
“저..저는 은혜를...갚아야 해요...제...제발...”
낸시의 눈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사내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비릿한 미소와 함께 도끼가 낸시의 한쪽 다리에 떨어져 내렸다.
“꺄아아아아~!!!!!!!!!!”
낸시의 비명소리가 집을 가득 매웠다.
하지만 그에 반응하는 사람은 도끼를 내려친 라몬밖에 없었다.
“하하하! 아하하하하! 그런 헛소리는 살다 살다 처음 듣는다. 아하하하하하!”
라몬은 도끼를 들고 다시 한 번 자세를 취했다.
낸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라몬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불쌍한 표정 짓지 마. 응? 원래 뭔가 배우려면 아픈 법이거든? 난 너 같은 애가 정말 싫어. 아직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니까 그런 헛소리나 지껄이지!!! 하지만 뭐, 걱정하지는 마. 다리를 잘라내는 건 아니니까. 그냥 뭉툭한 도끼 뒤편으로 뼈를 아작 낼 뿐이야. 한번만 하고 말면 혹시 제대로 뼈가 붙을 수가 있으니까. 그럼 제대로 된 교훈이 아니잖아? 완전이 가루를 내놔야 제대로 병신이 되지. 크크큭. 어디 절름발이가 되어 보라고. 그럼 세상의 혹독함을 너도 조금은 알거야. 아! 내 이름은 라몬. 네게 중요한 교훈을 준 사내의 이름이지. 크크큭.”
다시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처절한 낸시의 고통어린 비명이 다시 한 번 집안을 흔든다.
그렇게 라몬은 떠나고, 낸시는 정신을 잃었다.
그 시간 로드리고는 혼자서 밤길을 뛰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불길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았다.
아버지께 적당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광장을 빠져 나왔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너무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뛰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불길함 때문일까?
그 의문은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에야 풀렸다.
불길함...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장판이 되어 버린 주방.
자물쇠가 뜯겨져 나간 상자...
바닥에 쓰러진 낸시...
손이 떨려온다.
아니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발...아니지?
살아있어라...
제발...
제발...
로드리고는 낸시의 입가에 귀를 바짝 붙였다.
미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살아있어!!!!!!
로드리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는 그제야 엉망이 되어버린 낸시의 오른쪽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되어 버린 거야?
옆에서 뒹굴고 있는 도끼 자루.
그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기억이 없다.
그는 뛰쳐나갔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기억이 다시 이어진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낸시는 방에 누워있었고,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착잡한 표정이었다.
낸시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어떻게...어떻게 된 거예요?!”
의사 선생님의 몸을 미친 듯이 흔들며 로드리고는 물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단다. 하지만 절름발이가 될 거야.”
로드리고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는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법이 없나요?”
“포션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불가능하단다. 뼈가 형편없이 잘게 부서져 버렸어. 정말 잔인한 짓이야...”
포션?!
로드리고는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정신없이 노인을 찾았다.
하지만 그 노인에게도 포션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만든 엉성한 감옥 안에서 노인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라몬...그가 가져갔어...”
그러나 라몬을 잡으러 갔던 마을 사람들은 결국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그렇게 낸시는 절름발이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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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나 지난 후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낸시가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 헤나로조차 특별히 언급한 적도 없는데 그걸 비밀로 했다.
헤나로가 어느 날, 로드리고에게 말했다.
“오빠, 나는 아무래도 비밀이 싫어. 그런데 비밀은 어쩔 수 없어서 비밀인가 봐.”
로드리고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말없이 헤나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나로는 로드리고의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