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3 슬픈 저녁 =========================================================================
“아버지!”
로드리고는 소리쳤다.
하지만 그리핀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낸시는 평생 동안 불구가 될지도 몰라요!”
로드리고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그리핀은 요지부동이었다.
“안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낸시는 내게도 딸 같은 아이다. 나도 마음이 아파. 그러나 생각해 보거라. 은촛대와 은쟁반을 잃었다. 그건 이렇게 몰락해버린 우리 가문의 가보와 다름없어. 너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의사를 부르러 가지 말고, 곧장 그 사실을 알리러 광장으로 왔어야만 했다. 그것이 가문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는 있었느냐? 우리가 한때 귀족이었다는 걸 증명한단 말이다. 우리 가문의 문장이 찍혀져 있어!”
“그깟 은촛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딸이라고요?! 딸처럼 생각하셨다고요?!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아버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낸시를 위해 포션을 구해주세요! 딸이라고...정말 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만!!! 오냐오냐 해줬더니 정도를 모르는구나! 그만 나가 보거라!”
그리핀은 고개를 저으며 축객령을 내린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이를 악물며 다시 소리쳤다.
“만약 헤나로가 그렇게 되었더라면...그때도 똑같이 말씀하실 건가요?! 잃은 것이 너무 커서 포션을 살 수 없다고?! 아니요! 아버지는 분명 어떻게든 포션을 구해서 헤나로를 치료해 주셨겠죠! 땅을 팔든 집을 팔든 어떻게든요!!! 빚이라도 져서라도 분명히!!!”
콰앙!!!
그리핀은 책상을 내려쳤다.
“그만! 나가거라!!! 여기서 당장 나가!!!”
그리핀이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로드리고에게 소리쳤다.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낸시는 정말로 가망이 없다.
영원히 다리를 절며 살아야 한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나중에 포션을 구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니...어쩌면 이미 포션을 구해도 소용이 없을 지도 모르지.
벌써 그 날로부터 보름이나 지났다.
집안사람들이 낸시를 대하는 어색한 분위기를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매일 같이 찾아가서 잠시 동안 그녀를 살핀다.
그녀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다.
로드리고는 아직 가슴을 만졌던 것에 대해서도 사과하지 못했다.
그저 낸시의 이불 안에 숨겨진 오른쪽 다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올 뿐이다.
돈을 먼저 벌었어야 했나?
하지만...이런 어린애 몸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
라몬...개자식!!!
그 자식을 그냥 봐주는 것이 아니었어!
내가 놈이 날 때렸던 것을 숨기지만 않았었더라면...
노인이...내게 부탁하지만 않았었더라면...
아니..아니다..적어도.그날...낸시 대신 내가 남았었더라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후회가 밀려왔다.
이대로는 안 돼.
후회해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단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아버지에게 돈을 기대해 봤자 내어주실 것 같지 않다.
기연...
내가 알고 있는 기연으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젠장!!! 그렇지만 장소가 너무 멀어.
지금의 내 힘으로 그런 곳까지 찾아 갈 수는 없다.
아니!
잠깐만!
내 손에도 이미 기연이 하나 있어!
황혼의 기사라면 분명 무슨 수가 있을 거야!
그를 만나자.
로드리고는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지만 서둘러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내팽켜 두었던 루트를 찾아 손에 쥐고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그를 만나는 것은 조금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감정에 주저할 수는 없다.
이제 그런 감정 따위 너무도 하찮게 느껴질 뿐이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낸시다!
그녀만...그녀만 생각하자.
그는 눈을 감았다.
점점 세상이 멀어진다.
어느 순간 의식이 몽롱해지고 다시 정신을 차린 순간, 로드리고는 자신이 다시 검의 신전에 들어선 것을 알 수 있었다.
황혼의 기사가 천천히 다가오며 빙그레 웃는다.
그가 인사를 건네며 로드리고를 맞아 주었다.
“하하! 다시는 오지 않는 줄 알고 걱정했다네. 그날 자네를 너무 몰아친 것 같아서...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군. 받아주겠나?”
로드리고는 적당한 말을 주고받는 대신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똑바로 황혼의 기사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황혼의 기사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도움?”
“예. 낸시가 아파요.”
“흐음...예의 그 아가씨 말이군. 그래?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하겠어. 나는 경청할 준비가 되었네.”
로드리고는 곡예사를 만났던 일부터 낸시가 절름발이가 되어 버린 일까지 모두 말했다.
간혹 감정이 격해져서 자신 때문이라고 중얼거리며 흐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황혼의 기사는 안타까운 침음을 흘리기는 했지만 로드리고를 다독이며 차근차근 모든 사정을 들었다.
로드리고는 황혼의 기사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방법이 있나요?! 낸시의 다리를 고칠 방법 말이에요?!”
황혼의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라고 만능은 아니라네. 몸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지는 잘 알지만 치료는 또 다른 영역이거든. 물론, 내 몸이 현실 세계에 제대로 존재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 방법이라고 해봤자 자네가 경지에 들어 그녀를 치료하는 것밖에 없어. 그러나 그건 단순히 대륙을 호령하는 강자의 경지에 드는 것과는 또 다른 부분이야. 못할 것은 없지만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네. 자네의 몸을 치료하는 것이라면 보다 빠르겠지만 내가 직접 해주는 것이 아닌 자네가 제대로 깨닫고 직접 그녀를 치료해야 하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그래서 얼마나 걸린 다는 말인가요?”
로드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상대로라면 몇 십 년은 필요할 것 같군.”
“뭐라구요?!”
“진정하게나. 몸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야. 누군가를 힘으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내게 있어서 무척이나 쉽다네. 그건 내 전문분야니까. 그러나 치료하는 것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야. 내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그걸 해결하려 들면 무척이나 돌아가야 한다는 말일세. 그보단 오히려 그쪽 분야가 전문가인 자에게 맞기는 편이 훨씬 낫지.”
“포션은요? 혹시 포션 만드는 방법은 모르십니까?!”
“후우...난 오직 검만 알 뿐이야. 이곳은 치료의 신전이 아니라 검의 신전일세.”
“젠장!!!”
“미안하네.”
“......”
로드리고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번쩍 고개를 쳐들고는 황혼의 기사에게 말했다.
“저를 빨리 강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거라면 하실 수 있으시겠죠?! 당신이 말하는 전문 분야니까 말입니다!”
황혼의 기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거라면 손쉽다네. 하지만 아무리 속성으로 하더라도 1년쯤은 걸릴 거야.”
“지금은 당신 말대로 대륙을 호령하는 경지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일단 저 혼자라도 여행할 수 있을 정도라면 충분하니까 그 정도 수준이라면 얼마나 걸리죠?”
황혼의 기사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그 수준이란 게 명확하질 않으니까...”
“그런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흐음...뭐 좋네. 그럼 한 달! 그 정도면 여행해도 괜찮을 경지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군. 오거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좀 더 강한 경지를 원한다면...”
“됐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자네가 말했던 회귀의 이점을 활용하겠다는 건가?”
“어차피 제대로 믿지도 않지 않습니까?”
“됐네. 믿고 믿지 않고 그런 거야 뭐, 무슨 소용인가. 여긴 자네와 나밖에 없는데. 내가 자네에게 해준 말이라고 전부 사실만은 아니야. 그래도 우린 이렇게 꽤 친한 사이가 되었으니 그런 하찮은 거야 더 이상 따지지 않는 편이 좋아.”
“지금부터 시작하죠.”
“하하! 서두르는 군. 하지만 서두른다고 경지에 드는 것은 아니라네. 차근차근 단계를 밟다보면 어느 순간 주변에 아무도 없게 될 뿐이지.”
“뭐부터 하면 되죠? 전에 배운 마나로드부터 하면 되나요?”
“그래. 일단은 차곡차곡 쌓을 것부터 쌓아야 하니까. 다만 빠른 경지를 원한다면 자네에게 이제부터 낮잠은 필수가 되겠군. 하지만 그러면 결국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말텐데...”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지. 자네 마음이 이리도 급하다니 내가 좀 돕도록 하지.”
로드리고는 마나로드를 운용했고, 황혼의 기사는 로드리고의 몸에 한 손을 올리고 그를 도왔다.
그의 몸에는 희미한 빛이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