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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64화 (64/200)

00064  슬픈 저녁  =========================================================================

그 후로 며칠간 로드리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방에서 보냈다.

식사 시간에는 가족들에게 얼굴을 비췄지만 그 외의 시간은 도무지 방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헤나로는 몇 번이고 오빠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녀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을 들여다보면 오빠는 자고 있었다.

오빠를 깨우고 싶었다.

그리고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헤나로는 외로웠다.

그리고 슬펐다.

아빠에게도 어리광을 피울 수 없었다.

집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해 온 그 어느 때 보다도 더욱 침울했다.

가족 간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아비슈는 지금껏 낸시가 해왔던 일을 마을 아낙들에게 배우며 묵묵히 해치워 나갔다.

그녀만은 집안 분위기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항상 쾌활하게 헤나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헤나로는 마주 인사를 건넬 수 없었다.

작은 소녀의 마음은 제대로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집에서 유일하게 밝게 빛나고 있는 아비슈에게 다가가 마음껏 웃고 떠들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한 자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헤나로는 결국 아비슈의 인사에 항상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할 뿐이었다.

그것이 헤나로가 도달한 결론이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헤나로는 낸시의 방 앞에서 서성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그 안에 얼굴을 쏙 내밀고 ‘언니~!’하고 부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가 낸시의 방에 들어설 때는 로드리고가 동행할 때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서도 밝은 얼굴로 낸시에게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로드리고의 주변을 맴돌다가 오빠가 방을 나서면 서둘러 따라 나갈 뿐이었다.

낸시는 헤나로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지만 헤나로는 제대로 답해주지도 못했다.

그러면 로드리고가 대신 적당히 말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헤나로는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헤나로는 혼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단편적이었고, 같은 자리를 자주 맴돌았으며, 그럴듯한 건전한 결론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한 가지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걸 이끌기에는 아직 어렸다.

소녀는 처음 경험하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실과 거짓을 구별해 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소녀의 혼자만의 생각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죄책감을 얻었다.

끊이지 않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기억이 떠오르고 사라지고 다시 떠올랐다.

식사 도중에도 그랬고, 낸시의 방 앞에서 서성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혹은 잠자리에 들고 어두컴컴한 사위를 보고 있노라면 불현 듯 떠오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어떨 때는 곡예사를 마중가자고 조르던 자신의 모습이 머리에 머물렀다.

종종 마차에서 내리려고 하던 오빠에게 고집을 피우며 광장에 같이 가자고 떼를 쓰던 모습이 튀어나올 때도 있었다.

광장에서 곡예사 노인이 저글링을 하며 재주를 피울 때, 손뼉을 치며 좋아하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곤 했다.

어쩌면 그 순간 낸시 언니는 라몬이란 곡예사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미어지듯 통증이 일었다.

소녀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참았다.

소녀는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헤나로 자신은 나쁜 아이였다.

모든 것은 자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라몬은 나쁜 사람이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헤나로 자신이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야.

소녀가 도달한 결론은 결국 그 하나였다.

소녀는 그렇게 웃음을 잃어갔다.

그리고 그런 소녀를 신경 써줄 사람은 더 이상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각자 자신의 아픔과 사정, 그리고 목표를 가지고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모두들 그 자체로 지쳐갔다.

소녀의 마음에 아로 새겨진 아픔이 혹 가시성이 있어 누군가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분명 가족 중 하나는 이렇게 말해주었을지도 몰랐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나 마음은 마음일 뿐이다.

서로 오랜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는 이상, 그 형태를 짐작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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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는 이불을 치우고 자기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불현 듯 라몬이란 사내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것 같았다.

소녀는 한차례 몸을 떨었다.

무표정한 가운데에서도 소녀의 눈동자만은 흔들렸다.

소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쉬기를 반복했다.

소녀의 이마에서뿐만 아니라 온 몸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소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오직 조금 거친 숨소리만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간 지났다.

소녀는 손을 들어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 손을 다시 움직여 오른쪽 다리를 만져보았다.

의사선생님이 대어준 부목과 붕대로 인해 뚜렷한 내부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소녀는 알고 있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이미 어떠한 기쁘지 않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라몬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그냥 뭉툭한 도끼 뒤편으로 뼈를 아작 낼 뿐이야. 한번만 하고 말면 혹시 제대로 뼈가 붙을 수가 있으니까. 그럼 제대로 된 교훈이 아니잖아? 완전이 가루를 내놔야 제대로 병신이 되지. 크크큭. 어디 절름발이가 되어 보라고. 그럼 세상의 혹독함을 너도 조금은 알거야. 아! 내 이름은 라몬. 네게 중요한 교훈을 준 사내의 이름이지. 크크큭.’

하악...하악...

다시 숨소리가 거칠게 변한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는 훨씬 정도가 덜했다.

그가 전부 말해주었다.

나는...절름발이가 되었다.

아마도 완치될 수 없겠지.

소녀의 눈에서는 또르르 눈물이 한방울 흘러 내렸다.

손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나 다시 한방울이 또 흐른다.

몇 번이고 같은 손길이 그녀의 눈가를 스치지만 도무지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마침내 소녀는 이불을 끌어와 눈가를 폭 덮어 버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노라니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절름발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것이 나다.

나는 이제부터 생각해야 해.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니까.

......

...

.

소녀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그것은 소녀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상처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상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소녀 스스로도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자신에게 머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묵묵히 살아오며 그녀는 그 일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버림받는 다는 것.

그것은 꽤나 비참하고 슬픈 일이었다.

소녀는 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녀는 이 거친 세상을 살기 위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한 가지 가져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도, 돈도 아닌 오직 ‘쓸모’라는 사실을 그녀 의식 깊숙이 자리 잡게 만들었다.

소녀는 열심히 일했다.

그것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소녀는 일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묵묵히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으면 뚜렷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빨래를 하면 옷은 다시 깨끗해졌다.

물레를 돌리면 실이 가득 만들어 졌다.

부지런히 방앗간에 다녀오면 배부른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소녀는 그런 것이 좋았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란 사실에 만족했고, 안도했다.

나는 쓸모가 있다.

버림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소녀는 지금 자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감정이었다.

더 이상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면...이 집에서 나는 필요가 없어.

찾아오는 헤나로 아가씨나 로드리고 도련님께 이것저것 물었다.

그중에는 자신이 하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애써 숨기는 절름발이가 된 사실보다 소녀에겐 그것이 더욱 중요했다.

다시 기운을 차리면 이 집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을까?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버림받은 소녀에게 있어 이들은 가족이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로 계속 남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듣는 이야기는 그렇게 사정이 좋지 못했다.

‘아비슈가 잘 하고 있다.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마라.’

그 말은 소녀의 근심을 더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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