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65화 (65/200)

00065  슬픈 저녁  =========================================================================

낸시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오른쪽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다.

그러나 소녀는 고통을 참는다.

기어코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리고 걸터앉은 모양새가 된다.

누워있을 때와는 다르게 피가 다리로 몰린다.

통증은 더욱 심해진다.

그럼에도 소녀는 기다렸다.

통증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통증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대로 자리를 지키고 침대에 몸을 맡긴다면 이 고통은 분명 수그러들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다.

지금 이순간도 그녀가 살아온 그녀만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되었던 일들이...

자신이 있어서 다행이었던 일들이...

자신이 있어서 도움이 되었던 일들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아주 착실하게 대체되어지고 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 이후로 매일, 같은 일상을 보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내려다본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규칙적이라는 사실 말고는 지금껏 누려온 그녀의 삶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녀의 주변을 둘러쌌던 세상은 차근차근 그녀의 존재 의미를 뱉어낸다.

침이 마르듯 더 이상 뱉어낼 것이 없어지면 그 순간 그녀는 완전히 사라질 지도 모른다.

‘쓸모가 없다.’

그것은 자신이 더 이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혹하고도 냉정한, 그리고 몹시도 두려운 결과를 향해 내모는 것이다.

기어코 오늘이 왔다.

초조함은 너무 커졌다.

소녀의 작은 가슴으로는 모두 담아둘 수 없는 크기가 된 것이다.

그동안 아픔은 착실히 그녀의 감정을 억눌러 주었다.

그러나 한계란 뚜렷이 존재한다.

그것이 오늘일 뿐이다.

낸시는 벽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주었다.

그녀의 체중은 온통 왼쪽 다리에 실린다.

그러나 오른쪽 다리에서부터 어김없이 지금과는 또 다른 고통이 밀고 올라온다.

머리가 쭈뼛 서는 통증이다.

그러나 버텨야 한다.

그렇게 되내이고 또 되내였다.

하지만 의지가 강해도 그걸 버틸만한 몸을 가지지 못한 소녀는 입술을 타고 내리는 핏물과 함께 그대로 다시 침대에 주저앉고 만다.

몸에 가해진 충격은 다시 다리의 통증을 더욱 키운다.

그것은 숨 쉬는 것도 잊게 만들었다.

떨려오는 몸에 가득 힘을 주고 온몸으로 치닫는 통증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하아...하아...

몸은 마침내 다시 숨을 쉬게 된다.

거친 숨이 이어진다.

소녀는 다시, 그리고 다시 몇 번이고 같은 일을 시도했다.

턱에 맺혀 있던 땀은 바닥에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소녀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고 굳건했다.

기어코 소녀는 일어섰고, 벽에 기댄 채로 걸음을 옮겼다.

소름끼치는 통증을 참아가며 한 걸음...다시 한 걸음...

문을 열었다.

마침 방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물레가 있는 방이 있다.

그곳에 가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린 걸까?

소녀는 그런 것을 가늠하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겨우 물레 앞에 앉아 익숙지 않은 왼쪽 다리로 물레의 축을 구른다.

구를 때마다 작은 충격이 오른쪽 다리를 흔들었다.

실을 잡아당기는 손이 쉬지 않고 떨려왔다.

눈앞이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시야 전체가 흐릿했다.

멍한 의식을 고집으로 붙잡고 그렇게 소녀는 물레를 돌렸다.

나는 아직...아직 이 집에 쓸모가 있어.

그러니까...버림받지 않을 거야.

주인어른도...마님도...

그리고 도련님도, 아가씨도...

내가 아직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아시면...

-----------------------------

낸시가 방에 없다.

로드리고는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다리도 성치 못한 그녀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검의 신전에서 현실로 돌아온 로드리고는 잠시 낸시를 보러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까지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일 소녀의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침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가 얼마 전까지 침대에 머물렀을 거라고 짐작케 하는 흐트러진 시트와 이불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한 순간 로드리고의 가슴은 쿵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심장의 박동은 빨라지고, 더불어 마음은 조급해 진다.

그때였다.

그의 귓가에 어떤 소리가 잡힌다.

평소라면 무척이나 규칙적인 음률 속에서 들려왔어야 하는 소리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하지만 또한 낯선 음률이 그의 귀를 간질인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마...

아니겠지?

닫혀있는 또 다른 방의 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창을 통해 비춰드는 찬란한 햇살 속에서 소녀는 앉아 있었다.

소녀는 로드리고가 방에 들어선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묵묵히 물레를 돌리고 있다.

대체 뭐하는 거야?!

로드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도저히 어린 아이의 깊이가 아니다.

가슴이 쓰려왔다.

뭔가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안타깝고, 슬프고, 미안하고, 짜증스럽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더 많고 복잡한 감정이 그 사이사이에 섞여 있다.

그는 일부러 소리 나게 쿵쾅쿵쾅 마루를 울리며 힘주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낸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물레에 고정되어 있다.

다가갈수록 햇살에 숨어 있던 소녀의 모습이 더 또렷이 보인다.

턱을 타고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땀방울은 어느새 눈에 보일 정도로 마루를 적시고 있다.

실을 잡고 부들부들 떨리는 가녀린 손은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인다.

쿵쿵 거리며 필요 이상의 힘을 주며 밟고 있는 물레의 축과 그 옆에 아무렇게나 놓인 붕대에 감싸인 오른쪽 다리.

로드리고는 거칠게 낸시의 손목을 낚아챘다.

낸시는 그제야 고개를 움직여 자신의 손목을 잡은 또 다른 손을 발견한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움직였다.

낯선 손을 타고, 길게 이어진 팔을 지나, 그 어깨와 머리...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강렬하고 화가 난 눈을 발견한다.

“...도련님?”

말라비틀어진 입술에서 겨우 나온 작은 목소리.

“지금 뭐하는 거야?!”

로드리고는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추궁하듯 물었다.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도 않던 미소가 낸시의 얼굴에 자리 잡는다.

처연하고 조금은 비굴한 미소다.

그녀는 억지스런 밝은 음색으로 말했다.

“이것 보세요. 실...제가 이렇게 짰어요. 아직은 조금 엉성하지만 조금 더 연습하면 틀림없이 훨씬 좋은...”

“뭐하는 거냐고?!”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로드리고는 언성을 높였다.

아니...그건 고함에 더 가까웠다.

이 미소는 뭐냐?!

이 목소리는 뭐야?!

이건 그가 아는 낸시가 아니다.

그녀는 이렇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는 그의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화가 났다.

마음속 저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는 그의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그에게 잡힌 소녀의 손은 어느덧 파랗게 물들어 버린다.

그러나 소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기 어려운 슬픈 눈으로 억지 미소를 띠며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했을 따름이다.

“지금은 이렇지만...곧...예전과 다름없는 실을 뽑아낼 테니까...그러니까...”

그러니까 뭘?

무슨 말을 하려고?

로드리고는 그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그는 낸시를 지켜봐왔다.

특별히 시간을 정하고 진지하게 지켜본 적은 없을지 몰라도 그녀는 항상 꿋꿋했고, 오연했으면 묵묵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비굴하지도 않았다.

회귀 전에는 우는 모습을 본적조차 없었다.

그것이 낸시였다.

오랜 세월을 살며 평생 동안 그녀를 우러러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동경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에게 있어서 낸시였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 뚜렷한 하나의 이미지가 그 빛을 잃고 형편없이 퇴색되어 버리는 건 결코 달가운 경험이 아니었다.

로드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자.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까...”

“그렇지만 실은...”

로드리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깟 실이 대체 어떻단 말인가?

왜 침대에선 기어 나와 여기에 있는 거야?!

대체 왜?!

실이 그렇게 중요해?!

어?!

그의 분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마침내 실이라는 형체를 갖춘 사물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는 낸시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까지 짜놓은 실을 아무렇게나 잡고 뭉뚱그렸다.

실은 엉켜버렸다.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그걸 보는 낸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실 따위는 됐어! 이딴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여기는 뭐 하러 온 거야?! 저 딴 거 조금도 필요 없다고! 알아?! 그냥 누워 있으란 말이야!”

로드리고의 고함에 낸시는 기어코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전 그가 보았던 엉엉 우는 눈물이 아니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그건 귀엽지도 않았고, 색다르지도 않았다.

그저 슬프고 아렸다.

하지만 어딘지 익숙했다.

로드리고는 이렇게 우는 낸시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런 모습을 꽤 자주 보아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낸시는 나와 함께했던 한평생을 저런 소리 없는 눈물 속에서 보냈던 것은 아닐까?

낯설고도 익숙한 모습...이건 확실히 낸시다.

그러나 내 가슴에 차오르는 후회는 무엇 때문일까?

로드리고는 낸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가슴 언저리가 너무 아파왔기 때문이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울지 마라.

바보처럼...울지 마라...이...계집애야...

미약한 소리가 떠듬떠듬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쓸모...없지...않아요...”

흐느낌은 없다.

다만 단어와 단어가 긴 시간을 두고 떨어져 있을 따름이다.

로드리고는 자기 때문에 이미 헝클어져 바닥을 구르는 엉킨 실 뭉치를 바라봤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걸까?

그런 비굴한 미소까지 입가에 두르고...

땀을 이렇게 흘리면서...

통증을 참고...

너는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냐?

말없이 로드리고는 낸시를 부축했고, 그녀의 방에 데려와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한동안 낸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로드리고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머리가 복잡하다.

그리고 마음은 더욱 복잡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