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7 슬픈 저녁 =========================================================================
“그걸 결정하는 건 접니다! 저는 기사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가 아니에요! 뭐든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제가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저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름 결론을 내리고 있어요! 물론, 기사님이 보실 때는 멍청해 보일 때가 있겠죠. 하지만 삶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닙니까?!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낸시와 이야기하고 그녀가 뭘 생각하는지 제대로 듣는 것이 좋다는 걸 말이에요! 하지만!”
로드리고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깊게 숨을 들이쉰다.
그런 모습을 황혼의 기사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하지만 그걸 알아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겁니다. 저는 낸시와 이야기하는 게 두려워요. 그녀가 제게 무슨 말을 할지 그것이 너무 두렵습니다. 제가..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그랬다면...낸시를 혼자 내버려두지만 않았어도...사실을 숨기지만 않았어도...모두 후회됩니다. 그 일이 일어날 계기를 마련해 준 제 자신이 너무 밉습니다. 그래요. 기사님 말씀대로 저는 문제에 직면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요?! 대체 어쨌다는 말입니까?! 고통스런 일을 피하는 것이 그렇게도 잘못이란 말입니까?! 그녀 곁에 그대로 있는 것이 두려워 이곳으로 피한 제가 그렇게도 잘못입니까?! 말해보십시오?! 예?! 어서!”
숨을 몰아쉬며 황혼의 기사를 노려보는 로드리고.
그의 흔들리는 눈을 들여다보며,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이 아니네. 사람이란 모두 그런 법이지. 나 역시 자네와 입장을 바꾸었다면 결코 자네보다 더 잘 해나갈 자신은 없네. 하지만 로드리고, 세상일을 전부 알 수는 없는 법이야. 설령 자네가 주장하는 대로 삶을 다시 한 번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지.”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기사님은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세요.”
“아니. 나도 알고 있네. 다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자네가 내게 자신의 기분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조금 전 내 말은 지금 당장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괴리가 존재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근본적인 부분을 살펴본다면...”
“그만하세요. 그런 고상한 이야기 저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아는 것은 단 하납니다. 낸시와 지금 당장 뭔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요. 전 이곳으로 도망쳐 왔고, 아직 이곳에서 빠져나갈 용기가 없습니다. 그저 제 실력이 갖추어지면 하루라도 빨리 낸시의 다리를 고칠 수 있는 뭔가를 찾으러 떠날 겁니다. 그런 희망에 기대어 저는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를 짓누르는 죄책감에 겨우 버티면서 말이죠.”
“그러나 그 소녀와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하네. 이렇게 피한다고 해봤자 서로의 골이 더욱 깊어질 뿐이야.”
“그런 정답질은 제발 그만하세요. 아무리 뭐라 말씀하셔도 저는 제가 찾아든 굴을 떠나지 않아요. 제가 낸시와 다시 제대로 이야기 하는 때는 그녀가 다시 온전히 두 다리로 서서 걷게 되는 때입니다. 그 전에는 안 돼요.”
“하아...그래. 자네는 정말 겁쟁이군. 절대로 현명한 선택은 아니야. 자네는 자네가 보다 떳떳하고 온전하기 위해 낸시라는 소녀를 더욱 상처 입히게 될 걸세. 그건 비겁해. 그 소녀에게 제대로 된 대화가 필요한 것은 지금이야. 그녀의 다리가 온전해진 이후가 아니라! 자넨 그걸 알아야만 해!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에서 무슨 대화가 필요하단 말인가?! 힘들고 외로울 때, 이 세상에 자신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했을 때...바로 그때가 자신의 곁에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순간이야.”
“하지만 지금의 저는...할 수 없어요. 저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수련을 하지. 내 겁쟁이 제자가 혹독한 수련으로 거듭나 다시 용기를 되찾고 소녀의 슬픔과 외로움을 묵묵히 들어줄 수 있게 말이야.”
로드리고는 기사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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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튼튼하고 오밀조밀하게 짜인 실을 바라보면서 헤나로는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소녀에게 물레 돌리는 법을 가르쳐 준 베니 아주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해 주었다.
이정도면 낸시 언니도 분명 좋아해 주겠지?
헤나로는 신이 났다.
오늘은 직접 낸시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예전처럼 한껏 자랑하며 어리광을 피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걸로 낸시 언니가 다시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어.
일 따위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말이야.
헤나로는 자신이 직접 짠 실을 가지고 낸시의 방 앞에 섰다.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긴장된다.
주저함도 잠시, 힘주어 문을 열었다.
헤나로의 등장과 함께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낸시가 고개를 돌렸다.
“언니! 이것 봐! 내가 물레를 돌렸어! 제법 잘 되었다고 베니 아주머니도 칭찬해 줬다! 이만큼이나 짰다니까! 굉장하지? 응?”
밝은 얼굴로 낸시의 앞에 내려놓는 실뭉치.
낸시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만졌다.
실이었다.
조금 엉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렇다고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 낸시가 짰던 실보다 훨씬 잘 만들어졌다.
낸시는 칭찬을 바라는 아가씨께 뭔가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한참 생각한 끝에 그녀는 겨우 이렇게 말했다.
“좋은 실이에요. 정말 잘 하셨어요.”
하지만 그 순간에도 실을 만지고 있는 낸시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응! 그렇지? 헤헤! 물레는 이제 내가 돌릴 거야. 얼마 있으면 언니 못지않은 실력이 될 거야. 틀림없어. 베니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했는걸.”
낸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잠시 돌리고 헤나로가 눈치 채지 못하게 이불을 집어 눈물을 닦아냈다.
나...이제 이곳에 쓸모가 없어.
낸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하던 일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망가진 자신이 이곳에서 계속해서 쓸모 있는 채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의 혹독함을 배우라며 웃어대던 라몬의 말이 뇌리에 떠오른다.
그래.
이것이 세상의 혹독함일까?
그렇다면 정말 아프구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나는 다시 이렇게 버림받게 되는 걸까?
누군가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에 뛰어 들어와 나 같은 것은 필요 없으니 이곳에서 나가라고 할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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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다.
가족 모두가 모인 아침 식사시간, 그리핀은 불현 듯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소식이 왔더구나. 낸시를 맡아 줄 집을 찾았단다.”
로드리고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곧 그 의미를 깨닫고 나서는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낸시는 집을 떠날 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비슈만으로 충분해.”
“하지만 낸시는 가족이에요!”
“그래. 가족처럼 지냈지.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린 이 아비도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쉽지 않았다구요?! 가족처럼이 아니라 가족이라구요! 가족!”
“맞아요! 아빠, 언니를 보내지 마세요.”
헤나로가 끼어들어 그리핀에게 사정한다.
하지만 그는 헤나로는 무시한 채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드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집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도 알게 아니냐?! 이건 꼭 필요한 일이야. 낸시도 그런 일을 당하고 이곳에 계속 있고 싶겠느냐? 나 혼자 좋자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느냐?! 잘 생각해 보거라!”
로드리고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생각이요?! 그렇다면 말씀드리죠! 제 생각을 말입니다! 아버지, 헤나로나 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다른 집에 그렇게 보내버리실 겁니까?! 그게 아버지께서 생각하는 가족이고, 자식입니까?!”
흥분한 로드리고를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질책한다.
“로드리고! 아버지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하지만!”
“그만! 어서 자리에 앉아 식사나 하렴. 이 일은 그렇게 결정된 거야. 네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이런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가란 말이니?! 요즘은 유령의 집이나 다름없어!”
“그래서 그 일 자체를 없는 셈 치겠다는 말인가요?! 가족을 버리면서!”
“낸시는 그냥 일하는 아이야! 가족이 아니라!!!”
“......”
로드리고는 그저 어머니와 아버지를 노려볼 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이내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만다.
자리에 주저앉으며 그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떠나는데요?”
그리핀은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일주일 쯤 후에는 좀 움직여도 더 상태가 심각해지지는 않는다는구나. 더 늦으면 날이 너무 추워질 테니까 늦출 수는 없지.”
“...낸시도 알아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식사 후에 말할 생각이다.”
“아니요. 제가...제가 말할게요.”
“네가?”
그리핀은 의외라는 듯 로드리고를 바라봤다.
“예. 그편이 좋아요.”
“그렇지만...”
“부탁드립니다.”
“좋다.”
로드리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나로도 서둘러 로드리고를 따랐다.
주방을 나서며 헤나로가 묻는다.
“오빠, 낸시 언니 정말로 떠나는 거야?”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너도 다 들었잖아?! 뭘 또 묻고 그래?”
짜증스런 목소리로 로드리가 답했다.
“...그렇지만...내가 다시 아빠한테 말해볼래. 그러면...”
“됐어. 네가 어떻게 한다고 변하는 것은 없어. 낸시는 이곳을 떠나야 해.”
“오빠!!! 낸시 언니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오빠는 이대로 좋은 거야?”
“비켜. 낸시한테 가야 해.”
“지금? 지금 가서 언니한테 말하려고?!”
“왜? 그럼 네가 말할래? 너 이집에서 떠난다고 네가 말할 거야?”
로드리고가 이죽거리듯 물었다.
그러자 헤나로는 어깨를 흠칫 하고는 시선을 내려뜨렸다.
바닥으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
그런 헤나로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으며 로드리고가 중얼거렸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는 여기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할 때가 온 것뿐이야. 젠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