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슬픈 저녁 =========================================================================
로드리고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낸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혹은 기대어 시간을 보내다보면 할 일이라곤 거의 없게 마련이지.
저 계집애는 그 길고 긴 시간동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보내는 걸까?
로드리고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일거리를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일거리를 걱정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몸으로 바보처럼 물레를 돌릴 리가 없으니까.
그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걱정으로 보낸다고 치자.
하지만 그래도 다른 생각을 하며 보내는 시간은 있겠지.
그때는?
그때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날 밤을 생각하나?
젠장 맞을 그날을...?
라몬과 은촛대...은쟁반...
도끼...
....남겨 두고 떠나는 마차와....
뭐...그런 것들...
원망이라도 하냐?
라몬을?
...아니면 나를...?
그렇지도 않으면 아버지를?
...
모르겠다.
젠장...
...젠장...
이를 갈던 로드리고를 발견하고 낸시가 부른다.
“...도련님...”
“뭐해?”
“그냥...있어요.”
“그렇겠지. 거..움직이기 힘드니까...다 나을 때까지 그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자꾸 움직이고 그러면 안 되고..미련하게 물레는 돌리지 말고 말이야. 그거 헤나로가 배웠더라고. 그러니까...일 걱정 말고...그냥 쉬는 방향으로...그렇게 있으라고.”
“하지만 이제 아프지 않으니까...”
낸시는 고개를 저으며 뒷말을 흐린다.
“그래서? 또 일이라도 하겠다고?! 네가 하던 일 전부 아비슈가 하고 있다니까!!! 넌 그냥 좀 쉬고 있다가...떠나면 돼...”
로드리고는 마지막 말은 조그맣게 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작게 말해버려 낸시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뭐라고요?”
그녀가 다시 묻는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다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지럽게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더니 자신이 선물로 주었던 곰 인형을 발견했다.
“이거 가지고 있네?”
그가 몇 걸음 다가서며 집어 들자 낸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야...선물 받은 거니까...버리기는 아깝고...”
“그래? 하하! 이거 살 때만 해도 참 좋았는데...전부 잘 될 거라고만 생각했거든. 원하는 것도 얻고, 후회도 안하고...한없이 행복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그랬는데...뭔가 이상하게 되어 버렸어.”
“......”
“......”
둘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기고 말았다.
로드리고는 다시 이어보고 싶었지만 그럴듯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인형만 만지작거리다 다시 제자리에 올려 두었을 뿐이다.
그의 비어버린 머리는 도무지 뭔가로 채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낸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이상해요. 마치 제가 제 자신이 아닌 것처럼...하루가 이렇게 길었구나...그런 생각도 들고.”
“너도 그런 말 하는구나.”
“예?”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보다 전에 가슴 만진 거...미안해. 사과하려고 했는데 마땅히 기회가 없어서. 그게 여러 가지 바빴으니까...너도 알잖아? 그치?”
로드리고는 그렇게 말하고 이내 후회했다.
바보...
왜 그런 말은 꺼낸 거야?!
하지만 다행스럽게 낸시는 별반 표정 변화가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때린 거 미안해요.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당황해서...뺨...미안해요.”
“...아니...별로...사과할 필요는...”
“저도...별로...”
다시 어색한 분위기가 되고 만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서 그런지 말이야...너는 그냥 항상 옆에 있는 그런 앤 줄 알았어.”
“...지금도 어리면서...”
“야! 도련님이 말하는데...”
“...그냥...그렇다고요...”
“진지한 이야기야. 그냥 좀 들어.”
“...지금 이 이야기가요? 가슴 만진 이야기가...그러니까...진지한 이야기라고요?”
“그게 아니라!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진지하다고! 가슴은 잊어버려! 사과했잖아?!”
로드리고는 머리를 마구 비벼대며 짜증을 냈다.
“...알았어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요?”
“......”
“왜요? 말해 봐요. 듣기만 할 테니까.”
“거...그니까...다..다리...빨리 나으라고.”
“......”
낸시는 아무 말도 않고 자기 다리를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남의 일처럼 묻는다.
“낫는데요?”
“뭐?!”
“다리요. 이거 낫는데요?”
“...아..아마도...?”
“......”
로드리고는 진짜로 무지하게 진지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몸조리 잘하고 조만간 어디 좀 가게 될 테니 그리 알라는 이야기인데 그걸 말하려니 입이 바짝 마른다.
적당히 다른 말을 하다가 그 부분으로 넘어가고 싶지만 이래도 그렇고 저래도 그렇고 건드리고 싶지 않은 부분만 계속해서 건드리게 된다고 할까?
“야!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뭐, 죽는 것도 아니고! 다..당연히 다리는 낫지! 자연치유력이 엄청나거든! 내가 예전에 봤는데 말이야, 도마뱀 꼬리 잘라졌는데도 얼마 지나니까 아주 멀쩡해 지더만! 사람이 도마뱀보다 못하냐?! 엉?! 이..이거 별것 아니야~! 금방 나아요! 아주 금방!”
로드리고는 그렇게 자기 말에 취해버려 얼떨결에 낸시의 부목한 다리를 탁탁 치고 만다.
“아얏!!”
낸시가 통증에 깜짝 놀라 움찔하고 만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낸시와 시선이 마주친 로드리고.
순진하고 슬퍼 보이는 그 눈망울을 정면에서 접하며 로드리고는 생각했다.
낸시...이 계집애...이렇게 어렸구나...
그냥...어린애잖아?
매일 뚱해 있어서 잘 몰랐는데...그냥...애야...
“아..아프잖아요...”
낸시는 이내 시선을 피하며 작게 핀잔을 준다.
“미..미안..”
“...지금은 괜찮아요. 잠깐 놀란 것뿐이니까...그래도 도마뱀과 사람은 달라요.”
그야 그렇지.
로드리고는 속으로 변변치 않은 예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것을 느꼈다.
“야, 암튼 헤나로가 물레 돌린 것 봤는데, 그럭저럭 괜찮더라고. 어떻게든 쓸 수 있는 것 같다니까 넌 그냥 다리 낫는 것만 생각해.”
그때, 볼멘 목소리가 낸시에게서 튀어나온다.
“...그래도 제가 더 잘해요.”
“뭐?!”
로드리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계집애, 뭐라는 거야?
도대체 물레 돌리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 거냐고?!
“저는 좀 더 튼튼한 실 짤 수 있다고요. 아주머니들 못지않았어요. 지금은 몸이 불편해서 형편없을지 모르지만 기운을 차리면 예전처럼 질 좋은 실을 잔뜩 짤 수 있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낸시는 실 짜는 것만은 마을에서 제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묘한데서 자존심을 세우네?
그때는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야 네가 더 오래했으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처음 하는 코흘리개 계집애랑 비교해서 뭐하려고?”
“......”
낸시는 조금 전 말이 자기가 생각해도 창피한지 시선을 떨구고는 손으로 부목한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야, 아무튼 넌 쉬기만 해. 일주일쯤 있다...그러니까..아...진짜! 암튼 어디 가야 하니까 그리 알고.”
낸시는 로드리고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묻는다.
“어디요?! 어디 가는데요?!”
무척이나 절박한 표정이다.
로드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런데 있어. 넌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이내 시선을 피해버리는 로드리고.
낸시는 입술을 깨문다.
올 것이 온 거야.
이렇게 버림받는 것일까?
쓸모없으니까?
일주일...
앞으로 일주일...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겠어?
쓸모없는 내가 나쁜 거야.
애초에 난 가족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여기 있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운이 좋았던 셈이지.
벌써 각오했던 일이잖아?
“여기서 멀리 가나요?...다시는 여기 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말이에요....그렇게...멀리?”
로드리고는 낸시의 물음을 듣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계집애, 벌써 눈치 챘구나.
젠장할!
“멀리 갈거야. 아주 멀리.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곳은 아니야. 너 혼자도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로 너는 네 몸만 신경쓰면 되니까. 알겠어?”
“그런 말 안 해도 돼요. 저...울지 않으니까...”
“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