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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69화 (69/200)

00069  슬픈 저녁  =========================================================================

씁쓸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낸시를 방에 내버려두고 빠져나온 로드리고에게 헤나로가 기다렸다가 대뜸 묻는다.

“어떻게 됐어? 응?”

“...그냥...잘 됐어.”

“잘?”

“으..응...잘.”

“그러니까 어떻게 잘?”

“글쎄...울지 않았어. 그러니까 잘 된 거지.”

“그러니까...?”

“크..크큭....”

“오빠?”

“크..크크..크크크...”

“오빠?!”

“왜?!”

로드리고는 언성을 높이며 헤나로를 노려본다.

헤나로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고 만다.

“...됐어. 내가 들어가 볼래!”

헤나로는 기분이 상한 모양인지 살짝 인상을 쓰며 낸시의 방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 행동은 로드리고에게 저지당하고 만다.

“왜 그래?!”

헤나로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로드리고를 노려본다.

“내가 있을 때, 울지 않았다는 말이야. 지금 울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제야 헤나로의 눈빛이 흔들린다.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게 서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로드리고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네가 들어가서 뭐 하려고? 엉? 내버려 둬. 그냥 내버려 두라고.”

헤나로는 힘없이 어깨를 내려뜨리고 느린 걸음으로 터벅터벅 어딘가로 향했다.

그 장소가 어디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로드리고는 낸시가 혼자 있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헤나로가 자신이 본 낸시의 표정을 보지 않기를 원했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친절한 방법으로 헤나로를 쫓은 것은 아니지만 이게 로드리고의 방법이었다.

그는 동화속의 왕자님도 아니고, 전설속의 영웅도 아니다.

그저 로드리고.

바로 로드리고일 뿐이다.

그렇기에 헤나로에게 무안을 주어 자리를 뜨게 했다.

그 스스로도 몇 번 더 낸시에게 말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감정이라곤 조금도 내비치지 않으려는 죽어버린 눈동자는 계속해서 바라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견디기 힘든 죄책감에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을 뿐이었다.

결국 로드리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낸시의 곁에서 멀찌감치 물러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길을 걷는 그에게 사람들이 인사를 건넨다.

로드리고는 습관적인 몸짓으로 적당히 그 답례를 표한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덧 제페토 노인이 갇힌 곳 근처였다.

노인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남루한 옷차림이야 처음 봤을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나마 깔끔한 품새를 유지하던 것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지덕지 낀 눈곱과 여기저기 선명하게 묻은 흙먼지...

로드리고와 노인의 시선이 마주치자 노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올까?

기괴하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더욱 경계를 불러일으킬 법한 모양새가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로드리고도 힘없는 그 미소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 노인은 잘못이 없다.

그도 낸시처럼 피해자일 뿐이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노인을 위해 그 어떤 변론도 해주지 않았다.

물론, 일부러 나서서 그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걸음 물러나서 방관했을 따름이다.

아니, 그걸 방관이라고 해도 좋은 것일까?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를 상관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었고, 그를 미워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을 저 노인 탓으로 돌려 일부분 희석시켜 보려는 마음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앞장서서 손가락질 하며 노인에 대해 있는 말 없는 말 만들어 내며 그를 빠른 시일 내에 어떻게든 형벌을 내리도록 조장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당시에는 로드리고도 정신이 없었고,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을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노인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노인에게는 생명이 걸린 만큼 중요한 문제일 테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몬도...다리가 불구가 되어 버린 낸시도 그를 괴롭게만 한다.

그 사건에 간접적으로나마 연루된 저 노인을 마주보고 있으면 그런 씁쓸한 기억들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어 그를 아프게 할 뿐이지 않을까?

그래. 차라리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려라.

이곳을 떠나자.

로드리고는 이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노인은 서둘러 로드리고를 불렀다.

“꼬마야! 이리 와보렴. 응?”

그 힘없고, 간절한 목소리를 무척이나 호소력이 있었다.

크게 내키지 않음에도 어쩔 수 없이 걸음이 그리로 향하고 만다.

하지만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죽어가는 짐승에게 향하는 최소한의 동정을 담았을 뿐이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니? 응?”

“...알 것 없잖아요?”

로드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자기가 뭐라고 낸시의 안부를 묻는단 말인가?

“그러지 말고 알려주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고 싶구나.”

로드리고는 살짝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죽었어요. 이제 됐나요? 마음이 편해졌어요?”

노인의 지쳤지만 인자하던 눈빛은 순식간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만다.

“그게 정말이냐?!”

“흥!”

로드리고는 괜한 심술을 부리며 돌아서 버렸다.

노인은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마음속 내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삭이며 흐느꼈다.

“으...으흐윽...”

그 소리는 다시금 로드리고의 발걸음을 붙잡고 만다.

이 노인네는 대체 왜 슬퍼하는 것일까?

낸시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혹 그녀의 죽음으로 파생될 자신의 운명이 짐작되어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저 노인을 조금도 동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한 거짓말로 충분히 괴로워해도 그건 마땅한 일일 뿐이야.

그럼에도 저런 모습은 로드리고를 기쁘게 만들지 못했다.

말없이 자리를 떠나려던 그는 결국 자신의 거짓말을 정정해야만 했다.

“그만..그만 울어요. 낸시는 죽지 않았으니까.”

노인은 흐느끼다말고 고개를 든다.

그의 눈에서부터 흘러내린 눈물이 무척이나 추해보였다.

“?”

“죽지 않았어요. 다만 절름발이가 되었을 뿐입니다. 라몬이 도끼로 뼈를 아작 냈으니까. 그리고...그것 때문에 이제는 우리 집을 떠나야 해요.”

“......”

노인은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소녀가 살아있다는 말은 충분히 노인을 안도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다행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로드리고라는 소년의 표정이 무척이나 씁쓸해 보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말해줬죠. 너는 떠난다고. 하지만 이대로 떠나게 할 생각은 없어요. 좀 더 다른 방향으로...그걸 제대로 설명해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할 수가 없더라고요. 한없이 슬퍼하는 사람 앞에서 차근차근 어떤 희망을 설명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낸시를 둘러싼 무거운 공기가 제 말을 밀어 내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말하려면 말 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저는 그 무거운 공기를...그리고 그 죽어버린 시선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도망치듯 낸시의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제가...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당신에게 하는 걸까요?”

노인은 로드리고의 흐려져 가는 질문에 또 다른 질문으로 답했다.

“너는 내가 미우냐?”

로드리고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울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그렇지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미워하고 조금은 편해지고 싶습니다. 그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노인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면...얼마든지...마을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한다고 하더냐?”

“몰라요. 뭔가 결정을 내리겠죠.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지만 솔직히 저는 당신의 처분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빨리 결론이 나왔으면 좋겠군. 내 마지막이 그리 행복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건 꽤나 비참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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