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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70화 (70/200)

00070  슬픈 저녁  =========================================================================

더 이상 로드리고는 낸시를 방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황하듯 이리저리 다른 곳을 헤맨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검의 신전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학대하듯 수련에 힘썼다.

나날이 성장해 갔고, 황혼의 기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며칠의 학대가 그의 기분을 산뜻하게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조금도 바뀐 것이 없었다.

낸시는 차츰 낫는 것 같았지만 온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그날 식사동안 모든 것은 결정되었고, 그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해 뭔가를 한 기억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제페토 노인을 영주님께 데려가려 했으나 거리도 거리였고, 한창 추수로 바쁜 와중에 마을에서 노동력을 차출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결국 노인은 마을 광장에서 목을 매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드리고는 하나의 엉성한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건 결코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희생과 죄책감을 기반으로 배경을 그렸다.

협박과 질타로 색을 입힐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완성될 수 있을지는 로드리고도 알지 못했다.

황혼의 기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굳이 자신이 세운 계획을 그에게 말함으로써 듣게 될 도덕적 질타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기사가 말하는 것처럼 그는 좋은 친구는 아니었다.

그에게 뭔가를 상담하면 분명 보다 지혜롭고 좋은 길을 보게 될 테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항상 지불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결코 싸지 않았다.

로드리고는 자신이 애써 묻어두었던 추악하거나 어두운 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끄집어내어 전부 안다는 듯 말하는 그에게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것처럼 그러한 일들이 로드리고 자신을 성장하게 만들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고통은 결코 익숙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인생은 결국 혼자서 어떻게든 해나가는 것이다.

내가 기사에게서 기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강한 무력이고, 그 이상을 그에게서 취하지는 않겠다.

간혹, 정말로 간혹 그로부터 뭔가 조언을 받을 필요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다.

로드리고는 침대에 누워 엉성하고 조잡한 자신의 그림을 한차례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깊은 한숨과 함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면 낸시는 떠난다.

하지만 혼자서 떠나게 두지는 않는다.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사람들과 가족이라는 형태를 이루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선량한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내가 낸시를 좋아하는 것은 내 스스로도 똑똑히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일평생을 함께할 정도인지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계획한 일을 해야 한다.

로드리고는 일단 헤나로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똑! 똑!

두어 번 두드리자 방 안에서 누군가 부스럭 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방문이 열린다.

헤나로가 로드리고를 올려다보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길게 이야기 할 생각은 없다.

로드리고는 그런 헤나로를 살짝 밀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잠깐! 뭐하는 거야.”

헤나로가 기분이 상했는지 화를 낸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일일이 그런 사소한 물음에 답할 생각이 없는지 전혀 다른 소리를 내뱉었다.

“난 집을 떠날 거야.”

“뭐?!”

헤나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낸시와 함께 집을 떠날 거라고.”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낸시 다리를 고쳐줄 거야.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잘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럴 생각이야.”

“하지만 이미...”

“이미 뭐? 다 끝난 일이라고? 낸시는 영원히 절름발이가 되어서 여기저기를 떠돌아야 한다는 말이야?”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울컥하고 헤나로가 화를 낸다.

그러나 역시나 로드리고는 그 말에도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네가 도와줘야 해.”

“뭘 도와?”

“내가 낸시와 떠나는 데는 네 도움이 필요하니까.”

“미쳤어! 그런 일이 잘 될 리가 없잖아? 그리고 대체 어떻게 다리를 고친다는 말이야?! 돈도 없잖아? 금방 아빠한테 붙잡혀 올게 뻔하다고!”

“그러니까 네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야.”

“......?”

“네가 유괴되어야겠다.”

“뭐라고?!”

헤나로가 두 눈을 부릅뜨고 한걸음 물러선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넌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그냥 그러니까...”

“유괴되면 된다는 거야?”

헤나로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묻는다.

그러자 로드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냥 유괴되면 되는 거야. 그건 특별히 경험이 없어도 어렵지는 않아. 가만히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있으면 되는 거니까. 다 옆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해주거든. 너 같은 계집애도 할 수 있어. 내가 보증할게.”

“싫어!”

“낸시를 위한 일이야.”

“...그..그래도...”

“낸시를 좋아하잖아?”

“그렇지만...”

“그런가? 넌 낸시를 좋아한다고 했어도 결국 그 정도만 좋아했었던 거구나. 네가 뭔가 낸시를 위해 해주려는 생각 따위는 없지. 그래. 낸시는 그냥 하녀니까. 내가 널 너무 믿었었나 보다.”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럼 뭔데?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그날 밤 말이야. 내가 집에 남으려고 했을 때, 네가 고집을 부렸지. 그래서 집에는 낸시 혼자 남게 된 거야. 라몬....그 개자식과 같이 말이야!!!”

“!!!”

헤나로는 몸을 움찔하고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여기서 로드리고는 멈추려 하지 않았다.

아직 그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으니까.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헤나로에게 다가가 그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말했잖아? 너 혼자 먼저 가는 것 싫다고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지? 낸시가 어떻게 됐냐고?! 알량하게 쓰레기 같은 실뭉치나 짜서 내놓으면 네가 저지른 일이 이대로 사라져 버릴 거라고 생각한 거냐? 엉?! 말해봐?! 용서될 것 같아?! 헛소리! 그건 헛소리야! 낸시의 다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아. 네가 그날 밤 고집부린 덕분에...가엽은 낸시...너...정말로 낸시를 좋아하긴 한 거냐? 나는 모르겠는데?”

“그만...그만 해...흑...흑흑...”

헤나로는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드리고도 가슴에 통증이 인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여전히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속으로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필요한 것을 얻지 못했다...젠장...

“헤나로...위험은 없어. 너에게 약속할게. 네가 사라지고, 마을이 혼란스러워지면 나는 낸시와 같이 마을을 떠날 거야. 모두가 네 실종에만 주의를 기울이겠지. 아무도 우리가 없어진 것을 알지 못하게 도와줘. 너만이 할 수 있어. 이건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야. 나는 낸시의 다리를 반드시 고쳐줄 거야. 그러니까...도와 줘.”

“...그렇지만 어떻게?”

“나도 몰라. 나도 아직 몰라. 하지만 마법사든 아니면 뭔가 진귀한 것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봐야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낸시는 다시 온전해 질 거야. 너도 죄책감 때문에 힘들지? 그걸 해결하는 거야. 더 이상 낸시에게 미안한 마음 가질 필요도 없어. 해줄 거지? 응?”

“...누..누구에게 납치당하는 건데?”

헤나로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로드리고를 쳐다보며 묻는다.

“제페토...그 노인이 할 거야. 그도 거절하진 않겠지. 그의 비참한 죽음이 조금은 가치 있게 될 테니까. 죽는 것은 똑같겠지만 그 내용은 다르지.”

로드리고의 가라앉은 눈빛이 서늘하게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헤나로는 오빠가 무척이나 낯설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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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는 헤나로와 같이 제페토 노인이 갇힌 엉성한 감방 앞에 섰다.

한창 바쁜 시기라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네 동생을 유괴하란 소리냐?”

제페토 노인이 묻자 로드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해주는 겁니다.”

“...나는 지쳤어.”

노인이 힘없이 땅바닥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를 악물어!”

로드리고가 나무 창살을 붙잡고 고개를 내밀며 낮지만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은 다시 시선을 들어 로드리고를 쳐다본다.

“좋아...그래서 내가 얻는 것이 뭐가 있지? 내가 다시 살 수 있나?”

“그건 모르지.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확실히 죽어. 저기 보이는 저 나무에 목이 매달려서 대롱대롱 흔들리다 죽어버릴 거야. 분명 고통스럽겠지. 그 순간 당신이 무엇을 생각할까? 내 인생은 정말 가치 있었나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 않겠어? 그때, 당신이 뭐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어? 응? 말해봐.”

“나는...”

제페토 노인은 억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래. 당신은 가치 있지 않았어. 그러니까 마지막은 가치 있는 일을 해. 내가 바로 그 기회를 주는 거야.”

“하..하하...”

노인은 진지한 남자 아이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내 꺼져가는 불꽃처럼 연기를 흐리며 잠잠해질 뿐이다.

“나는 낸시의 다리를 고칠 거야. 반드시! 그러니까 당신의 죽음에 분명한 가치를...”

“됐어. 됐단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돼. 어떻게 다리를 고칠지는 묻지도 않으마. 하지만 꼬마야,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어.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하지 않아. 넌 분명 그 소녀와 여행을 떠나게 되면 며칠 못가서 죽어 버릴 거다. 혹은 어딘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팔려 갈지도 모르지. 아무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현실을 받아 들이 거라. 그게 가장 좋아.”

“동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늙은이, 잘 들어. 네가 말하는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이 일을 계획한 건 아니야. 나도 알고 있어. 세상이란 건 나도 알고 있다고. 그래도 나는 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조금 더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그냥 헤나로를 납치하고,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자위나 하란 말이야!!!”

“......”

노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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