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1 슬픈 저녁 =========================================================================
왜 거절하는 거야?
그럼 나는 대체 어쩌란 말인가?
로드리고는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어째서 이 노인이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그보다 이 계획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니...
하..하하하...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두르고 멍한 눈으로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정말로 낸시의 다리를 다시 고칠만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로드리고는 그 의문이 머리에 떠오르자마자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껏 피하려고만 했던 현실이 그를 사로잡고 사정없이 흔든다.
계집애처럼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에 뭔가가 틀어박힌 것처럼 도무지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헛된 희망을 부여잡고 꿈에 부풀어 현실을 피했던 것은 그에게 그나마 기쁨을 주었건만...
이제는 그런 싸구려 사치도 부릴 수 없게 되었단 말인가?
이 얼마나 잔혹한 세상일까?
이런 곳에서 70년이 넘도록 살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질 않아.
그건 꿈에 불과했던 것일까?
꿈이라면 악몽이었겠지.
틀림없다.
비명과 슬픔과 눈물과 고통이 절묘한 비율로 어우러진 그런 하나의 걸작이었을 거야.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나는 그 꿈을 제대로 즐기지 않았구나.
그것은 축복이었을까?
나는 신의 사랑을 받았단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어떻게 그런 것이 축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고통은 견디기 힘들도록 아프지만 이 고통이 이미 나에게 한차례 지나갔던 것이었다면 나는 지금 이리도 아프지 않았을 텐데...
더 이상 시선을 돌리려 하지 말자.
지금은 이대로 시선을 바닥에 두고 찬찬히 내 발부터 내려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어디 있는 것이냐?
이곳은 정말 어디일까?
나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그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버린 어딘가에 서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
이것은 저주다.
누군가는 이런 것을 축복이라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모르겠구나.
그런 교묘한 방법과 속임수를 알 길이 없어.
나의 삶이 다시 한 번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것은 내가 모든 이들이 일생을 살며 지불해야 했던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은 그것을 그대로 묵인할 생각이 없었겠지.
나는 내가 충분히 후회하고 슬퍼하며 일평생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알겠어.
신은 내게 말한다.
내 귓가에 말하고 있어.
끊임없이 말이야.
지금을 바라보라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에서야...나는 그 소리를 듣는구나.
어딘지도 모르는 정처 없는 표류 속에서 알지도 못하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오래 전 놓고 온 시간의 쳇바퀴를 다시금 돌리려 하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 걸까?
황혼의 기사는 알고 있을까?
그라면 내게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을까?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알겠구나.
이제는 막다른 길이다.
후회가 나를 사로잡지만 애초에 막다른 길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었겠지.
하하...하하하!
이제는 도망갈 곳도 없지 않은가?
내가 아직도 남겨놓은 곳은 죽음이란 도피처뿐이다.
그래.
죽음...
...죽음...
그곳으로 도망간다면 이런 무력감도...슬픔도...고통도 전부 멀리 흘려보낼 수 있겠지.
그것만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길일까?
지금의 나에게 현실을 마주 보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지 아니한가?
달콤한 심연 속으로 도망가는 편이 나에겐 훨씬 이로워.
그러나 로드리고는 다시 한 번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게 아니야!!!
죽음이라니...
그것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에 속아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도피 말고 무엇을 가져다준단 말인가?
이대로 도망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
어리석은 녀석!!!
여전히 남게 되는 문제를 생각해야지.
이 세상에 다만 ‘나’라는 하나의 개체가 사라지고 여전히 다리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낸시가 살아남아, 예정된 어딘가로 가게 될 테지.
나는 그것을 막으려 했지 않은가?
로드리고...너는 네 아픔을...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고, 낸시의 아픔은 모른 척 할 테냐?
그것이 정녕 네 선택이란 말이냐?
형편없는 계획으로 안위하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로막힐 때, 다시 한 번 남은 어딘가의 형편없는 길로 도망치는 것이 결국 너라는 인간이란 말이냐?!
가엽고 어리석은 인간아...
그럴 바에야 혼자서 도망치는 편이 낫지 않은가?
혼자라면 어렵지 않게 이곳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내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낸시를 피해서...
아니..아니다.
나는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고 있을 뿐이야.
이것이 아니다.
떠올려라.
황혼의 기사가 너에게 무엇이라 했는지 다시 한 번 떠올려 봐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의 충고를 떠올려 그것이 죽음보다 더 나은 길이라고 생각되면 개가 뼈다귀를 물 듯, 너도 거침없이 그걸 향해 달려들고, 절대로 놓지 마라.
나는...나는...
로드리고는 자신의 몸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이 안 되어 보였는지 헤나로가 로드리고의 손을 꼭 잡아 준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그 따스한 손길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그때,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꼬마야, 내 말을 들으렴. 집에 가거라. 그리고 네가 생각한 그런 허무맹랑한 계획일랑 모두 잊고, 침대에 누워 있을 그 소녀의 손을 잡아주란 말이다. 그것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란다.”
노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로드리고를 직시하고 있었다.
로드리고는 그의 말대로 하고 싶었다.
정말로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대로 그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한 결과도 그의 탓으로 돌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자.
로드리고는 형편없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웃어보려고 했지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속 깊은 어딘가에서 온몸을 옥죄는 사무치는 아픔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나는 물러날 수 없다.
나의 형편없는 엉성한 그림을 이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
이것은 올바른 일이 아닐지도 몰라.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다.
모래 위에 섰던 나의 생각은 거침없는 바람과 함께 저 멀리로 날아갔을 따름이야.
나는 망가져 버린 파편을 손에 쥐고 어떻게든 그걸로 다시 터를 다져야 한다.
하려는 일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 내부의 중요한 알맹이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내 눈은 지금 바로 눈앞을 보고 있어.
이대로 도망치지 않는다.
부질없는 노력은 끊임없이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려 구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로드리고의 입이 열렸다.
더 이상 목을 막고 있는 뭔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아닙니다. 당신이 절 믿을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아주 형편없는 계획이란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노인은 슬쩍 미소 지으며 꼬마의 재롱이라도 보듯 로드리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이어 벌어진 일은 노인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로드리고의 손에서 번쩍하고 뭔가 빛이 나는가 싶더니 노인을 가둔 목재 감옥의 한쪽이 반듯하게 잘리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바라보았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는 약하지 않아요. 아니...지금의 저는 약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어린 아이를 생각해서 제가 계획한 부실한 미래를 마음껏 재단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말하려는 것이 뭔지 압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일평생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았듯 저도 그럴 겁니다. 당신에겐 그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저는 당신이 다시 한 번 일생을 살더라도 똑같은 삶을 살 거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좀 더 기술적으로 유연한 모양새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 근본은 바뀌지 않겠죠. 이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니...후회해도 저는 다시 한 번 반복할 겁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로드리고는 노인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노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노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그저 신의 심판을 기다리듯 로드리고는 자신의 고집을 노인이 받아 들여 주기를 간절히 빌며 기다릴 뿐이었다.
마침내 노인의 입이 열렸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군. 하지만 꼬마야, 네가 다른 아이와 다를지라도 세상은 험악한 곳이다. 너 같은 아이에게 세상은 절대로 친절을 베풀지 않아. 항상 긴장하고, 아무도 믿지 않아야 한다. 네가 살아온 곳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야.”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도통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군. 나도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꼬마야, 그렇게 많은 시간을 벌지는 못할 거란다. 나는...이미 너무 늙었고, 지쳤어.”
“알아요. 저도 그렇게 많은 시간을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