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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72화 (72/200)

00072  시작되는 여행길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헤나로는 로드리고에게 방금 전 그가 보여준 일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을 뿐 일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헤나로는 그것이 못내 아쉬운 것 같았지만 굳게 다문 로드리고의 입을 열수는 없었다.

로드리고는 오늘밤과 내일 있을 일을 생각했다.

어두워지면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나오자.

헤나로를 노인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는 거야.

말 한 마리도 데리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자잘한 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노인과 헤나로가 사라지는 거야.

이 마을에서.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멀리 가는 거지.

마을은 혼란에 빠지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경은 온통 그쪽으로 몰리겠지.

나는 유유히 그 틈을 타서 낸시를 마차에 태우고, 이곳을 떠난다.

적당한 짐을 챙겨서 말이야.

돈은 집에 있는 것을 슬쩍하고.

그날 밤부터 시작된 엉성한 계획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잘 이루어졌다.

노인을 따라 가는 헤나로를 한번 꼭 껴안아 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돌아와서는 잠을 청했다.

검의 신전에는 가지 않았다.

루트는 이미 로드리고가 챙겨둔 짐 속에 고이 간직된 후였다.

아침은 소란스러웠다.

로드리고는 유유히 돈을 슬쩍하고, 아버지의 검도 훔쳐냈다.

그리고 낸시를 마차에 태웠다.

아무도 로드리고와 낸시를 신경 쓰지 못했다.

낸시는 무슨 일인지 소란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로드리고가 뭔가 말해주길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무시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차를 몰았다.

그렇게 그와 낸시는 마을을 떠났다.

“도련님이 저를 데려다 주시는 건가요?”

낸시가 묻는다.

“그래.”

“혼자서요?”

“그래.”

“바로 옆 마을이에요?”

낸시는 계속해서 묻는다.

“그건 아니고.”

“그런데도 도련님 혼자서 저를 데려다 준단 말이에요? 그걸 주인님이 허락하셨어요?”

낸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 진짜! 야! 너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좀 조용히 있지 못해?! 가만히 좀 있으란 말이야! 가뜩이나 심난해 죽겠는데...”

“제가 뭘요?”

“뭐긴 뭐야?! 좀 조용히 하라고 한거지! 도련님이 명령한 거라고! 알아들어?!”

“저 데려다 주는 게 그렇게 심란할 일이에요?”

“아! 몰라! 모른다고! 짜증나게 자꾸 그러지 좀 마!”

낸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짐칸에 비스듬히 앉아 서러움에 조용히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다.

떠나는 마당에 주인님과 마님께 제대로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그리고 헤나로 아가씨도 보지 못했고.

토미 오빠도 만나지 못했다.

제대로 모두에게 인사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렇게 큰 소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큰 소망이었던 모양이다.

새롭게 어딘가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낸시의 입장에서는 꽤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까칠한 것일까?

그래도 로드리고 도련님 혼자서 나를 데려다준다면 그리 먼 곳은 아닐 것이다.

옆 마을이 아니라면 그 다음 마을정도 되겠지.

해질녘 정도에 도착하고 나면, 거기서 도련님도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이면 떠나시겠지.

그럼 정말 혼자서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그곳에서도 가족이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친절한 분들이면 좋겠는데...

얼마쯤 가다가 로드리고는 입을 열었다.

“야!”

“......”

“야!!”

“......”

“아, 진짜! 야!!!!”

로드리고는 결국 뒤돌아보며 고함을 쳤다.

“왜...왜요?”

“너, 대답 안할래?!”

“...고함 안 질러도 다 듣고 있어요.”

“삐졌어?”

“안 삐졌어요!”

“근데 왜 대답 안 하는데?”

“...그냥요.”

“삐진거네! 하여간 계집애들은...”

“삐지지 않았거든요!”

“그럼 왜 대답 안했는데?”

“하기 싫었던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아까 내가 좀 짜증 부렸다고 말 안 한 거잖아?”

“......”

“야, 그런 걸 사람들은 삐졌다고 하거든. 그러니까 넌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100퍼센트 삐진 거지. 알겠냐?”

“...그런 거 몰라요.”

“아~아! 그래? 난 네가 궁금해 하길래 뭔가 말해 주려고 그랬는데. 뭐, 네가 싫다면 알았어. 그냥 이대로 가자.”

“...시..싫다고는 안했어요.”

낸시는 어쩔 수 없이 고집을 꺾는다.

“그럼 뭔데? 그냥 싫지 않은 거 말고 말이야. 좀 더 정확히 말해줘야 알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는데?”

“...정말...!”

“하하..하하하!”

로드리고는 오랜만에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웃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혼자였고, 낸시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시선을 멀리 던진다.

한참 만에 웃음이 잦아든 로드리고가 말했다.

“며칠 안에 도착하는 곳은 아니야. 꽤 긴 여행이 될 거야.”

“멀리 간다고요? 오늘 저녁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아주 멀리.”

“그렇게 먼 곳에 도련님 혼자서 저를 데려다 줄리 없잖아요? 속지 않아요. 바보 아니니까.”

“하하! 믿어. 믿으라고. 이 로드리고를 믿으란 말이야. 내가 너에게 거짓말 할 리가 없잖아?”

“지금도 거짓말 하고 있잖아요? 자기 기분대로만 말하고...”

“아, 이런 고집 센 계집애.”

“제대로 말해줘요. 정확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괜히 고집 피우는 건 자기면서...”

“난 사실을 말하는데 네가 믿지 않는 거잖아?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말해주지.”

“무슨 말이 그래요? 전 앞으로 제가 지내야 하는 곳에 대해 알아야 한다구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심술궂게 굴지 말아요. 예?”

“낸시, 어리석은 낸시...앞으로 네가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은 나뿐이야. 말했듯이 오랜 시간을 여행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괜히 쓸데 없는 걱정은 하지 마렴. 알겠어?”

“아니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낸시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도 로드리고는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다시 마차를 몬다.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낸시는 입을 다물고, 그렇게 둘은 마을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말은 꾸준히 마차를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밤이 왔다.

로드리고는 적당한 자리에 마차를 멈추고, 나무를 주워와 불을 붙였다.

낸시는 그가 하는 것을 보고 마차에서 내려와 도우려 했지만 여전히 통증이 있는지 움직임이 시원치 못했다.

그걸 보고 로드리고가 말했다.

“야! 그냥 가만히 있어. 좀 정리되면 내가 마차에서 내려줄 테니까. 이런 거 일도 아니고. 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알았냐?”

“저도 할 수 있어요.”

낸시는 고집 부리며 기어코 마차에서 내려서려 한다.

“그냥 내가 한다고!!! 말 더럽게 안 들어먹네!”

“......”

낸시는 그가 뭐라 하던 통증을 죽여 가며 조금씩 움직인다.

기어코 로드리고는 하던 일을 내팽겨 치고는 낸시 곁으로 가서 그녀를 억지로 안아 들었다.

“꺄아~..뭐..뭐하는 거예요? 내..내려줘요.

로드리고는 짜증내던 것이 어디로 갔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낸시를 쳐다봤다.

“너...지금 뭐라고 한 거야?”

“뭐..뭐가요?”

“방금 ‘꺄아~’라고 했잖아? 그렇지?”

낸시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어요.”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그..그건 잘못 들은 거죠.”

“이렇게 지척에서?”

“그..그게...”

“다시 해봐.”

“뭐..뭘요?!”

“‘꺄아~’ 말이야.”

“!!!”

“어서!”

“시..싫어요!”

“그럼 나도 안내려줘. 이대로 계속 안고 있어야지.”

“무거우니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낸시,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쎄단다. 우리 누가 이기는 지 내기할까?”

“내기요?”

“그래. 네가 졌다고 할 때까지 나는 널 안고 있는 거야. 만약 내가 먼저 힘들어 너를 내려놓게 되면 네가 원하는 거 한 가지 들어줄게. 하지만 네가 먼저 졌다고 하면 넌 내가 원하는 것 100가지를 들어주는 거지.”

“왜 저는 한가지고 도련님은 100가지예요?!”

낸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야 내 마음이지. 모든 내기가 전부 공정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난 도련님이고 넌 시녀니까.”

“......”

“뭐 어때? 응? 나는 금방 힘이 딸려서 널 내려놓게 될 텐데...그럼 네가 이기는 거야. 넌 원하는 것 한 가지 말하면 되는 거고. 아휴...지금도 아주 무겁네. 너 보기보다 굉장히 무겁구나. 이거 땀나는 것 같은데?”

“그..그렇게 무겁진 않아요....”

“아무튼 그렇다고. 이거 네가 아주 유리한 내기야. 나라면 바로 할 텐데...응?”

“그..그렇지만 100가지는...”

“야, 어차피 네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잖아? 안 그래? 아휴~! 무거워. 이건 돼지 한 마리를 안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정도 아니라고요!!!”

“하하! 작은 돼지. 큰 돼지 말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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