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3 시작되는 여행길 =========================================================================
로드리고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적당한 굵기의 나뭇가지로 헤집어댔다.
그의 손길에 맞추어 불길은 더욱 크고 강하게 살아났고, 그는 열기를 느끼며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본다.
지금쯤이면 자신과 낸시가 사라진 것을 마을에서도 눈치 챘을 것이다.
헤나로와 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말을 타고 달리는 둘의 모습을 상상한다.
하지만 다시 그 생각을 수정한다.
아니...아니지.
그리 오랫동안 달리지는 못했을 거야.
체력적으로도 문제고...
무엇보다 둘이 말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은 그리 오랫동안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금쯤이면 잡혔을까?
어쩌면...노인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고집스런 눈빛은 더 이상 아무런 빛도 발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망막에 맺혀진 어떤 형상만을 비추겠지.
그렇게 한 인간의 생이 마감되는 것이다.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건 처참한 죽음이었을까?
아니면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았을까?
헤나로는 무사하겠지?
그러고 보면 헤나로에게도 너무 억지를 피웠던 것 같아.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다시 시작하게 된 이후로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나는 그의 죽음과 맞바꾸어 이 장소에 있다.
조금 전처럼 낸시에게 장난을 걸고, 놀리고...웃지.
이것은 행복일까?
이것이 내가 바랐던 것일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문 속에서 로드리고는 자신이 점점 희미해진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얼마간 시간이 더 지난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지금은 지금에 충실하면 되는 거야.
옳고 그름은 나중에 생각하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날까지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자.
로드리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낸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흔들리는 불길을 쳐다보며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감정이 조금 묻어났지만 세세하게 그런 것을 가늠해 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로드리고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슬쩍 그를 쳐다보고는 다시 불길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곧 다시 한 번 로드리고가 아직 자신을 쳐다보는지 확인한다.
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다.
“왜요?”
“내가 뭐?”
“자꾸 쳐다보잖아요?”
“그야 여기 너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저는 도련님 쳐다보지 않잖아요?”
“응. 그렇지.”
“......”
“......”
“그만 쳐다보세요.”
“야,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 정도는 내 마음이지. 그걸 네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 건 억지야.”
“그렇지만 왠지 불편하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죠?”
“응! 그렇지.”
“저...지금도 저 쳐다보고 있는데요?”
“응.”
“자꾸 왜 이래요? 불편하다니까...”
“하지만 나는 불편하지 않으니까.”
“...정말...못됐어...”
“내가?!”
로드리고는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한다.
그 모습에 오히려 낸시가 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나는 널 위해 굉장히 큰 걸 희생했어.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조만간 알게 되겠지.”
“저를 위해서 뭘 해요?”
“희생 말이야. 너 다리만 다친 게 아니라 귀도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귀는 멀쩡하거든요?”
“그럼 한 번에 좀 잘 알아들어. 자꾸 몇 번씩 묻는 거야?”
“이상한 말 하니까 그렇죠.”
“희생이란 말이 이상해? 어디가?”
“됐어요. 제가 말을 말죠.”
“뭐, 나도 됐어. 암튼 너는 모르지만 확실히 그런 게 있단다. 그보다 너, 내가 원하는 것 100가지 들어주기로 했었지?”
“제가요?!”
“이야, 이거 정말 콧구멍이 두 개라 숨 쉬는구나! 내기에서 졌잖아?”
“그건 말도 안돼요! 그냥 들고 있기로 했었는데, 절 안고 막 뛰었으니까...”
“암튼 내려달라고 했어? 안했어? 응?”
“...했어요.”
“그럼 100가지 들어줘야지.”
“하지만...”
“야, 다리는 아프지 않게 했잖아? 조금도 비겁하지 않았어. 완전히 공평했다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응? 내가 대신 얹어줘?”
로드리고가 자기 손을 낸시 가슴 쪽으로 가져가자 낸시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다.
“됐거든요!”
“뭐, 암튼 너는 100가지 들어 줘야 돼.”
“반칙이에요. 전 안 들어 줄 거니까...”
“하지만 내가 뛰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잖아?”
“그렇지만 뛰겠다고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랬지.”
“그러니까 반칙! 절대적으로 무효예요.”
“아니, 그건 아니지. 하지만 네 의견도 확실히 수용해서 50가지 들어주는 걸로 하자.”
“싫어요!”
“고집 부리지 마. 내가 양보했으면 너도 좀 양보해야지.”
“저만 손해 보는 거잖아요?!”
“나도 손해 보는 거지! 원래 100개를 절반으로 줄여줬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흥!”
“야, 가슴 이리 내봐. 좀 만져봐야겠다. 거기 양심 있는지 말이야.”
로드리고가 억지로 만지려고 손을 내밀자 낸시는 얼른 그 손을 잡아서 밀어낸다.
“고집 부리지 마. 잠깐 만져보기만 할거니까.”
“싫어요.”
“그래. 그래. 그럼 이걸로 한 개 까줄게. 앞으로 49개 남았어. 알았지?”
“됐어요!”
“아, 진짜...너 이렇게 고집부리면 나중에 좋은 남자 못 만나. 남자들은 나긋나긋한 애들 좋아하거든.”
“도련님한테 데려가라고 안할 거니까 신경 끄세요.”
“너 나한테만 유독 심하게 대하는 것 같지 않냐?”
“제 가슴 만지려는 사람은 도련님 밖에 없으니까요.”
“알았어! 알았어. 아, 진짜 별 조막만한 거 하나 못 만지게 하네. 난 그냥 양심만 확인하려고 했을 뿐인데 말이야. 딱히 그렇고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었거든.”
낸시는 힘주어 로드리고의 손을 밀어내고는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린다.
로드리고는 그 모습에 뭔가 울컥하지만 깊게 몇 번 숨을 들이쉬고는 나뭇가지로 다시 불길을 헤집었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낸시가 물었다.
“내일은 도착하나요?”
로드리고는 여전히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쑤셔대며 되묻는다.
“어딜?”
“제가 가야 하는 곳이요.”
“아니. 오래 걸린다고 했잖아? 너 생각보다 머리가 굉장히 나쁘구나.”
“머리 좋아요!”
울컥한 낸시가 곧바로 반박하자 로드리고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분명히 오래 걸린다고 말했는걸. 그것도 기억 못하면 머리 나쁜 거지.”
“기억해요! 단지 그건 거짓말이니까.”
“거짓말 아닌데?”
“?”
“......”
“......”
“그렇게 볼 것 없어. 정말 오래 걸린다니까. 하루 이틀 사이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럼 사흘?”
“아니. 대충 생각해 보건데...”
“보건데?”
“한 5년? 아니면 10년? 뭐, 더 걸릴지도 모르고.”
“예?”
“뭐, 나도 모르니까 정확히 말해 줄 수는 없지.”
“......”
“......”
“그러면 재미있어요?”
낸시가 미간을 좁히며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내가 한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내용이 있었나? 난 도무지 모르겠는데?”
“자꾸 거짓말하잖아요?”
“거짓말 아니라니까. 낸시야, 내 눈을 봐. 거짓말 같아?”
낸시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계집애가 정말...! 야, 잘 들어. 너 원래 가기로 했던 곳으로 가는 거 아니야. 알아들어?”
“아니요. 모르겠어요. 그럼 어디 가는데요?”
“다리 고치러 가지.”
“제 다리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못 고친다고...”
“그야 모르지. 암튼 세상은 넓고 재주 가진 사람도 많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는 널 고쳐주려고 이렇게 마차를 끌고 널 데리고 나온 거야. 그러니까 넌 다른 사람은 됐고, 나만 신경 쓰면 되는 거지. 알겠냐?”
“또 장난치는 거예요?”
“이게 대체 어디가 장난처럼 보여!? 몰래 너 데리고 나왔다고! 이제 감사 좀 해보지 그래?!”
“대체 뭘 감사해요?! 미쳤어! 정말 미쳤어요!? 다시 마을로 돌아가요.”
“야, 내가 도와주겠다는 거야. 내 말 알아들었냐? 네 다리 고쳐준다고! 그런데 네 반응은 고작 이거야?”
“당연하죠! 우리 같은 어린애 둘이서 대체 뭘 한단 말이에요? 어서 돌아가요. 주인님도 분명 용서해 주실 테니까...며칠 늦어지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야! 나는 어린애 아니거든?!”
“그런 점이 어린애라는 거예요!”
“암튼 난 안가. 가려면 너 혼자 가던가.”
“......”
낸시는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그걸 보고는 그대로 낸시의 팔을 잡고 일어서지 못하게 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