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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74화 (74/200)

00074  시작되는 여행길  =========================================================================

둘의 시선이 교차한다.

상대방을 향한 눈빛은 사뭇 사나웠다.

“가만히 좀 있어! 다 널 위한 일이야! 아버지는 널 버렸어!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나는 아니야! 헤나로도 아니고! 누구 말을 들어야겠어? 응? 말해봐! 말해보란 말이야! 널 버린 우리 아버지? 응? 아니...그건 아니지. 바보도 알겠다. 안 그래? 지금 네 편이 누군지 잘 보란 말이야!!!”

“누구 편이 어디 있어요? 두 분은 제게 부모님 같은 분이세요. 어린애처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둬요! 그리고 돌아가요. 많이 걱정하실 거예요.”

“걱정? 누구를? 나? 아니면 너?”

“......”

낸시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왜 말을 못해? 답은 알고 있잖아?”

비꼬는 어투로 로드리고가 말했다.

“그게 어때서요?!”

이어지는 낸시의 발끈하는 목소리.

“어떠냐고? 글쎄...어떤 것일까?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가 아파. 가슴 언저리가 많이 아파. 내 걱정 따위 하려면 얼마든지 하라고 그래. 나는 돌아가지 않아. 그리고 너 혼자 돌아가 봤자 반겨줄 사람이라곤 헤나로밖에 없어. 아버지는 네 부모님이 아니야. 어머니도 네 부모님이 아니고.”

“알아요...저도...알아요...”

“그래. 가족이 아니지. 네가 망가지니까 버렸어.”

“아니까..저도 아니까! 그만 해요!!!”

낸시가 소리쳤다.

주변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아무것도 몰라. 그런 시시한 사실 따위 아무려면 어때? 네 앞에 누가 있지? 응? 지금 누가 있어?!”

“......”

“나 로드리고가 있어. 네 도련님이 있다고! 그리고 나는 네 가족이지. 이건 시시한 사실이 아니야. 그러니까 기억하면 아픈 그런 사실 따위는 전부 잊어버리고 지금 내 말을 기억해! 알겠어? 내가 네 가족이다.”

낸시는 눈을 좁히며 그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지럽게 흔들리는 모닥불 때문에 그녀의 눈빛에 스쳐지나가는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도련님은 바보예요...”

어딘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낸시가 말했다.

로드리고는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지금은 네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야.”

“아무튼 이상해요. 얄밉게 놀리기만 하더니...짓궂은 짓은 혼자서 다하고...그랬는데...분명히 그랬는데...”

“왜? 지금은 멋있냐?”

“하나도 멋없거든요! 여전히 이상할 뿐이에요. 그래도...가족이라고 해준 건...고마워요. 섭섭한 마음이 아주 없었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래도 전 주인님과 마님을 좋아해요. 그분은 어찌되었든 제게 부모님 같은 분이세요. 그런 분들을 걱정시킬 수는 없어요. 설령...그게 저를 향한 것이 아니더라도...저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건 사양하고 싶어요. 이제...이제 충분해요. 돌아가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대로 여기서 자고...그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돌아가요. 조금 혼이 날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도련님을 꼭 안아 주실 거예요. 저는 며칠 내로 원래 가기로 했던 집으로 보내지겠죠. 그래도 그렇게 멀지는 않을 거예요. 나중에 도련님이 혼자서 여행가실 수 있을 정도로 크면 헤나로 아가씨와 같이 놀러오세요. 저는 그걸로 충분하니까. 진짜 가족은 아니었어도 제게 가족이 있다면 그건 도련님과 헤나로 아가씨...그리고 주인님과 마님뿐이에요. 다리는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노력하면 분명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조금 움직이는 게 불편하고 느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만큼 더 분주히 움직이면 남들만큼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잘 안되면 조금 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면 될 거예요.”

로드리고는 손을 내밀어 낸시의 손을 잡았다.

낸시는 순간 흠칫했지만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나는 괜찮지 않아. 네가 괜찮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괜찮지 않아.”

낸시의 표정이 굳는다.

“네가 괜찮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투성이야. 나는 그걸 알 수 있어. 예전에는 훨씬 오랫동안 같이 있었어도 알 수 없었데 지금은 분명하게 느껴지거든. 나는 이미 정했어. 이 여행은 계속할거야.”

“거짓말이요? 아니요.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돌아가요.”

“그걸 결정하는 것은 나야. 너는 그냥 따르면 되는 거고. 오늘은 일단 자. 네가 먼저 자고 내가 다음이야. 오늘은 이렇게 불침번을 서자. 마을에 들르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어. 여긴 그리 위험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그래요. 오늘은 자고 내일은 돌아가요.”

“아니, 오늘은 자고 내일은 이어서 여행하는 거야.”

“그래요. 오늘은 자고 내일은 마을로...”

“아! 정말!!! 고집 더럽게 쎄네!!! 암튼 자! 자라고!!!”

기어코 폭발한 로드리고는 억지로 낸시를 눕히고는 모닥불에 나뭇가지 몇 개를 더 집어 던졌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은 잘 타올랐다.

정말로 돌아가야 할까?

로드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을 찾아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매어 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제페토 노인이었다.

그다지 연이 깊은 사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여기 있을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가슴이 콕콕 쑤신다.

아니...아니지.

그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어.

죄책감 따위 가질 필요 없다.

고마워하면 되는 거야.

그걸로 됐다고.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낸시가 알게 되는 것은 달갑지 않다.

지금이야 알 길이 없지만 마을에 돌아가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 챌 것이다.

낸시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호의적인 시선으로 날 바라볼 것 같지는 않다.

굳이 비난받을 것이 거의 뻔 한 상황으로 기어 들어갈 필요는 없지.

물론, 정말로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자 만감이 교차한다.

이렇게 떠나고 나니 그러한 심정은 더하다.

젠장...

가슴이 두근거리고 뭔가 기대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겁도 난다.

어떻게든 급조된 무력이야 대충 손에 넣었지만 그렇다고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하다.

아마 낸시가 걱정하는 것도 이런 것이겠지.

뭣보다 부모님께 못할 짓을 했다.

낸시를 버렸네 뭐네 소리치긴 했지만 세상사 잘잘못 따지면 고개를 똑바로 쳐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감정적인 면을 좀 누그러뜨리고 부모님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대로 따를 수도 없었다.

그래.

낸시 말대로 걱정하시겠지.

날 찾으라고 사람을 구할지도 모른다.

좀 무리해서 꽤 실력이 좋은 용병이 나를 추적하게 될지도...

잡히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한판 붙어야 하나?

이길 수 있나?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날 온전히 데려가야 할 테니까...

아니..벌써부터 이런 걱정이나 해서 어쩌자는 거야?

여행의 목적을 잊지 말자.

낸시의 다리를 고쳐주는 것을 생각해야지.

이런 시답지 않은 것만 생각하며 머리를 어지럽혀서야 뭣도 안 되지.

로드리고의 시선이 낸시의 다리로 향한다.

모포를 덮은 채라 보이지는 않지만 부목을 댄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씨발...

로드리고는 중얼거리듯 욕설을 내뱉는다.

라몬 개자식...

지금 와서 놈을 욕해봐야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감정이 쉽사리 가라앉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리도 앙심을 품어 보기는 회귀 전을 생각해 보아도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조셉은 앙심을 품었다기보다는 좀 더 복잡한 심정이었달까?

부러워하고, 미워하고, 그래...가끔은 증오 비슷한 감정을 품기도 했었지만 그렇다고 만약 능력이 된다 했더라도 놈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라몬 자식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여러 번 가죽이 벗겨졌다.

만나면 놈은 가만 두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내가 지금 생각해야 하는 것은...그래...낸시의 다리다.

내일은 브라우닝 영지로 가보자.

이런 상황에서 딱히 비욘느를 보고 싶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아니...조금은 보고 싶을지도...

아무튼 브라우닝 영지는 주변 지역에서는 꽤 발달한 영지니까 이런저런 소문은 들을 수 있겠지.

거기서 제대로 된 실마리를 찾아보자.

회귀 전 들었던 그럴듯한 유명인의 소문은 지금으로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들도 대체로 나만한 어린애들일 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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