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브라우닝 영지 =========================================================================
브라우닝 영지의 중심지, 프레사.
비교적 온화한 기후와 왕국의 수도에서부터 뻗어 나온 가도가 직접적으로 지나가는 도시다.
8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일대가 브라우닝 영지로 불리며, 프레사라는 지명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일대의 비옥한 토지는 브라우닝 가문에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물론, 광산이나 무역업으로 이름 높은 가문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수도에서 지방 귀족이라고 비웃음을 당할 정도는 아닌 셈이다.
역대 영주들이 보다 큰 권력과 부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옥한 토지라 하더라도 산출량은 어디까지나 변수가 많아 지속적인 발전 계획을 수행해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풍작이 이어지더라도 곡물가격이 폭락해 버리면 오히려 손에 쥐게 되는 것이 줄어들게 되는 경우도 있어 농업 이외의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해 뭔가 성과를 보기는 요원했다.
부유하지만 지금보다 한 단계 위로 도약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황이 과거부터 이어지는 것이다.
브라우닝 자작에게는 비욘느라는 딸이 있었다.
귀엽게 생긴 외모로 보건데 크면 미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지만 현재로서는 그의 근심거리였다.
귀족가의 레이디라면 어디까지나 자신을 치장하고 더욱 미를 가꾸며, 예법과 교양을 쌓기 위해 고심해야 할 터인데, 도무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사내아이처럼 뛰어다니기를 좋아하고, 기사를 동경해서 자신도 검을 배우고 싶다고 떼를 쓴다.
세상에!
여자아이가 검이라니!
브라우닝 자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에 손을 얹는다.
다른 귀족가에서 알게 되면 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을 일이다.
지금이야 아직 사교계에 데뷔시키지 않아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말 한마디만 실수하여도 천파만파 퍼져나가는 것이 소문 아니겠는가?
지금도 눈앞에서 검댕이를 가득 묻히고 자신의 눈치를 보며 눈알을 굴리고 있는 모습에 열이 치솟는다.
“모습이 그게 뭐냐?! 대체 뭘 하고 있던 게야?!”
“그냥...좀 놀고 있었어요.”
소녀는 시선을 피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놀고 있어? 예법 선생 말로는 네가 멋대로 사라졌다는데? 수업은 내팽겨 쳐두고 말이다!”
소녀는 피했던 시선을 다시 자작에게로 향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실과 달라요!”
“사실이 아니다?”
“예! 선생님과는 내기를 했어요. 저를 찾지 못하면 당분간 수업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아! 이게 아니다...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오?”
“......”
“왜 그러느냐? 좀 더 말해보지 않고?”
“......”
“하아...비욘느...”
“예...”
힘 빠진 자작의 목소리에 소녀는 마지못해 대답한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제대로 예절 교육을 받을 생각인 거냐? 레이디는 몸가짐이 좋아야 좋은 곳에 시집갈 수 있어. 우아한 몸가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생각해 보거라. 어느 사내가 이렇게 검댕이나 잔뜩 묻히고 돌아다니는 여자를 좋아하겠니?”
“전 괜찮아요. 그런 것쯤은...절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 없으면 혼자 살지요, 뭐. 그때쯤이면 아버지도 늙으실 텐데 제가 곁에서 모실게요.”
“그게 아니야!!!”
자작이 답답한지 고함을 지르며 테이블을 내려친다.
“그렇게 되면 비웃음을 당할 뿐이다! 다 큰 처녀가 시집을 가지 못하면 뭔가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질 것이 분명해!!! 넌 그래도 좋단 말이냐?!”
“...저는...별로 상관없는...”
“비욘느!!!!”
“......”
“하아...재혼이라도 해야 할까? 딸아이는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군.”
“계모는 싫어요! 분명 못된 사람이 들어와서 절 구박하고, 아버지는 독살할 거라고요! 정 재혼하실 생각이면 제이미 경에게 검술을 배우게 해주세요. 그럼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제가 직접 복수해 줄 테니까!”
“그만! 그만 해!!!! 대체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은 거야?!”
“하지만 책에서 보면 보통...”
“그 책 읽지 말거라!!! 이거야 원...그럴 일도 없겠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복수는 네 오라버니가 해야지, 왜 네가 한단 말이냐?! 여자는 그런 게 아니야!!!”
“저도 복수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해서 이렇게! 이렇게! 헤헤...”
비욘느는 손에 뭔가 잡은 것처럼 이러 저리 팔을 휘두르며 검술을 흉내 내본다.
“당장 나가서 씻고 예법 수업을 듣거라! 또 도망간다면 수녀원에 넣어 버릴 테니 그리 알아!!!”
비욘느는 아버지의 축객령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방을 나선다.
나도 검을 배우고 싶은데...
왜 아버지는 안 된다고 하실까?
제이미 경에게 배우면 얼마 안가서 분명 대단한 실력이 될 텐데...
바보처럼 ‘호호’거리며 웃는 법이나 배워야 한다니...
자수도 재미없고...
바늘로 대체 뭘 하란 말이야?
그런 걸로 아무리 예쁜 꽃을 수놓아 봤자 아무도 알아 주지도 않는 걸...
제이미 경도 늙어가는 데 더 늦어지면 제대로 가르칠 수나 있겠어?
지금이 적기인데 말이야.
아무리 내가 가르쳐 달라고 졸라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럴 수 없다고 고집만 피우고...
나쁜 늙은이...
그래도 그 나이에 아직도 젊은 기사들과 대등하게 겨루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연병장에 가서 기사들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더 이상 아버지를 화나게 했다간 정말 수녀원에 보내 버릴지도 몰라.
일단은 세뇨르 선생에게 가자.
아...또 두어 시간은 꼼짝 못하고 예법 수업을 들어야 할텐데...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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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왜?”
“마을로 돌아가는 것 맞아요?”
“그렇다니까 자꾸 왜 물어?”
“올 때랑 길이 다른 것 같아서요.”
“그건 네가 머리가 나쁘니까 그런 거고. 이 길이 맞아.”
“하지만 분명 다른...”
“야! 그냥 믿어! 좀 믿으라고! 응? 뭔가 그렇게 걱정인데? 내가 다른 데로 너 데려갈 까봐?”
“네! 그걸 걱정하고 있어요.”
저 계집애...정말 한 대 때려줄까?
아무튼 쓸데없는 곳에서 눈치가 있단 말이야.
“낸시야, 나 로드리고야. 약속은 지킨다니까. 지금은 마을에 가는 것이 맞아.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좀 길이 다르게 보이는 거야.”
“흐음...?”
“왜 또?!”
“갑자기 상냥하게 말하니까...좀 이상해서...”
“이야! 너 정말 삐뚤어졌구나! 이제 상냥한 것 가지고도 꼬투리를 잡아?! 너 정말 이상하다. 너 성격 이상하다는 소리 많이 듣지? 혹시 고양이나 강아지 잡아서 목만 자른 다음 침대 밑에다 몰라 보관하는 취미 있는 거 아니니?”
“그..그럴 리 없잖아요?!”
“왜 말을 더듬어? 나...지금 좀 오싹한데? 사실을 말해봐. 난 기본적으로 개인의 취미 생활은 존중하는 타입이라서 네가 설령 그런다고 해도 별로 비난할 생각은 없어. 물론 평소대로 널 대하는 건 좀 무리가 있을 테지만...”
“아니라고요! 그런 취미 없어요!!! 괜히 생사람 잡지 말아요!”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면 왜 그렇게 마을로 돌아가는 거에 집착하는 거야? 네 침대 밑에는 분명 뭔가가 있어. 고양이나 강아지 머리가 아니면, 개구리 팔다리 같은 걸 수도 있겠네. 바짝 마른 걸 보관하고 틈틈이 쉴 때나 자기 전에 보는 거지.”
“그만 해요! 이제 화낼 테니까!!!”
“아니, 나는 그냥 좀 이상해서. 하지만 네가 아니라면 뭐, 믿어야지. 하지만 마을에 도착하면 네 침대 밑을 한 번쯤 보여 줬으면 좋겠는데...”
“싫거든요!”
“왜? 거리낄 것이 없으면 상관없잖아?”
“거리낄 것은 없지만 절대로 안보여 줄 거예요!”
“그럼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마음대로 해요!”
완전히 토라져 버린 낸시는 더 이상 로드리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로드리고는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자꾸 말 돌리는 것도 힘들었는데 말이지.
뭐, 마을에 가는 것은 맞으니까.
몇 년 걸려서 그렇지만...그래도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여기저기 많이 들르면 말이야.
그때, 낸시가 가만히 있다가 불쑥 말을 걸었다.
“저기...정말 제 침대 밑에 그런 거 없어요.”
“응? 아~! 난 믿지. 암 믿고말고. 그래서 마을에 도착하면 보여주는 거야?”
“...싫지만...의심받는 건 더 싫으니까...잠깐만 보는 거라면...”
“그래. 하하하. 정말 잠깐만 볼게. 아주 잠깐만. 그때도 기억한다면 말이지만.”
“며칠 사이에 잊어버릴 리 없잖아요?”
“뭐, 며칠 사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하하하.”
“왜 자꾸 웃어요?”
“내가 웃었어?”
“그래요. 아까부터 자꾸 웃는다구요.”
“뭐, 그럼 그런가보지. 하지만 웃으면 좋잖아?”
“전...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