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6 브라우닝 영지 =========================================================================
멀리서도 보이는 높게 치솟은 성채에 낸시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조금 벌려진 입은 다물어 질줄 모르고 그녀의 심정을 거울에 비추듯 보여준다.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 위에서 낸시가 말했다.
“굉장해요. 저렇게 큰 건물은 처음 봐요! 누가 지었을까요? 우리가 살던 집보다 몇 배나 클까?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살겠지요?”
“훗! 촌티내긴? 하여간 너도 참...시골 계집애라 어쩔 수 없네. 야! 저런 거 별거 아니야. 저런 시시한 거에 감탄하고 그러면 모두 비웃는다고. 쪽팔리게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지금까지 도련님도 저랑 같은 집에서 사셨잖아요? 제가 시골 계집이면 도련님도 별다를 바 없다고요. 그러니까 도련님도 시골 도련님인 거죠.”
낸시는 로드리고도 별다를 바 없는 처지에 자신을 놀리자 퉁명스럽게 답한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리고는 좌우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잖아? 너와는 많이 다르지. 굳이 말하자면 나는 그냥 도련님. 혹은 세련된 도련님이라고 해야 맞지.”
“그건 모르죠. 실은 엄청 놀랐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는 지도...”
“아니.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 왜냐면 저런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도 많이 봤으니까.”
“더 대단한 거요?”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미심쩍은 목소리다.
“그래. 나 수도에 가본 적이 있거든. 거긴 저런 건 대단한 축에도 들지 못해. 변두리에 있는 저택도 저런 것보단 훨씬 화려하고 멋있거든. 물론 그런 건 저것보단 좀 작지만 그래도 멋스러움은 절대 떨어지지 않아. 게다가 수도에 있는 왕성은 크기에서도, 그리고 화려함에서도 결코 덜하지 않지. 아, 그 찬란한 모습이라니...아마 너는 그걸 보게 되면 오줌을 지릴지도 모를걸? 저런 것만 봐도 정신을 못 차리는데 당연한 거지. 뭐, 촌에서 풀뿌리나 캐면서 살았으니 어쩔 수 없지만...그래도 나는 조금도 네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 마. 자라온 환경이 시골이었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잔뜩 뻐기는 로드리고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심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거짓말 마세요. 도련님이 수도에 가봤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걸요? 게다가 저런 걸 보고 놀라면 안 되는 건가요? 멋진 걸 보고 감탄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저는 계속해서 감탄하고 쳐다볼 거라고요.”
로드리고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찡긋 거렸다.
“우리 시골소녀 낸시, 기분이 상했어? 하하! 기분 풀렴. 그리고 내가 수도에 가봤다는 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야. 사실이라니까. 나중에 수도에 가게 되면 내가 얼마나 구석구석 잘 알고 있는지 보여줄 테니까 두고 보라고. 그리고 네 잘못이라고 생각 안 한다니까 그러네. 그냥 내가 하는 말은 별것도 아닌데 호들갑 떠니까 좀 수준 떨어지는 것 같고 뭐, 그렇다는 거지. 너 왜 그렇게 곡해해서 듣고 그러냐? 응? 확! 그냥! 너 환자라서 내가 참는 거야. 아니었으면 한 대 맞았을 거라고.”
“흥!”
낸시는 고개를 돌리지만 여전히 높게 솟은 건물에서 눈을 떼지는 못한다.
로드리고는 도시에 들어가려고 줄을 길게 늘어선 행렬 끝에 적당히 마차를 몰아간다.
그는 프레사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비욘느를 볼 수 있으려나?
뭐, 지금이야 어린아이일 테지만 그래도 귀엽겠지?
그 미모가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닐 테니까.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봤으면 좋겠다.
그래도 이곳에 온건 어디까지나 낸시의 다리를 고칠 법한 사람을 찾기 위한 거니까 그걸 잊으면 안 돼.
먹을 것도 조달하고, 잘 곳도 잡으려면 이만저만 돈이 들겠는데...
도시 안에 들어와서도 노숙을 할 수는 없으니...
어디서 돈 나올 구석 없을까?
들고 나온 돈을 아무 계획 없이 마구 써댈 수는 없어.
그랬다가는 금세 개털 될 테니까.
암튼 오늘은 푹 쉬자.
여관에 들어서 말이야.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로드리고 차례가 되었다.
경비병이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꼬맹이잖아? 무슨 볼일이야? 어른은 어디가고? 응?”
“어른은 없어요.”
“아...정말. 그래. 아무튼 신분패나 내놔. 애든 어른이든 절차대로만 하면 되니까.”
“없는데요.”
“뭐?! 그럼 뭐해?! 빨리 비켜서지 않고?! 꼬마 새끼가 장난하나?”
“하지만 아직 신분패 받을 나이가 아니라서 없는 거니까 어떻게든 해주세요.”
“꼬맹이면 그냥 집에서 농사일이나 돕지 여긴 왜 왔어?!”
경비병은 사사건건 짜증을 부린다.
“부모님이 아프셔서 약값이 필요해요. 집에서 부려먹던 계집애를 팔아보려고요.”
로드리고가 뒤편을 가리키며 말하자 경비병은 짐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낸시를 쳐다본다.
다리는 부목을 했고, 아직 어리다.
뭐, 밉상은 아니고, 그럭저럭 귀엽게 생긴 아이지만 그다지 돈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얘를 팔겠다는 거야?”
“뭐,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흐음...”
경비병이 안됐다는 듯 낸시에게 시선을 준다.
하지만 낸시는 그 시선을 받기 보다는 손을 뻗쳐 로드리고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도련님! 저 팔 거예요?! 아니죠?!”
로드리고는 귀찮다는 듯 낸시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가만히 좀 있어! 계집애가 짜증나게! 야! 그동안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줬으면 이렇게라도 보답해야지!”
“하..하지만!”
어느새 낸시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로드리고는 뜨끔하지만 애써 무시하며 경비병에게 시선을 주었다.
경비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꼬마 놈이 가차 없고만. 너 크면 악당이 될 거다. 이놈아.”
“아무튼 들여보내줘요.”
“알았다. 알았어. 하지만 저 계집애 얼마 못 받을 거야. 아직 너무 어리니까. 몸 팔기에도 좀 그렇고. 다리도 성치 않은 것 같고. 웬만하면 다시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 거다. 암튼 들어가서 허튼짓은 하지 말고.”
로드리고는 까딱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를 몰아 도시로 들어갔다.
훌쩍이는 낸시의 울음소리를 계속해서 듣자니 빨리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일단 하려니 귀찮아서 회귀 전 가본 적이 있는 여관으로 마차를 몬다.
뭐, 거기서 방 잡고 나서 말해주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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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세뇨르 선생의 눈썹이 꿈틀 거린다.
“레이디는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아! 알아. 알아. 다 알지. 내가 얼마나 선생 밑에서 예법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거야? 벌써 1년도 넘었다고.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지.”
“알기만 해선 안 됩니다!!! 그걸 무의식 속에서도 우아하게 할 수 있을 때가 예법의 완성이란 말입니다!!!”
“아! 진짜! 그만 좀 해. 다 할 줄 안다니까. 지금은 우리 둘 밖에 없으니까 좀 풀어져도 되잖아?! 왜? 또 우리 아버지한테 일러바치려고?”
“저는 일러바치는 것이 아니고, 고용된 입장에서 알아야 하는 사실을 자작님께 보고 드리는 겁니다. 얼마나 아가씨께서 제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시는지 말이죠!”
“흥! 그러니까 일러바친다는 거잖아?”
“그런 말투도 좋지 않습니다!”
“아, 괜찮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으~!”
세뇨르 선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이를 간다.
“암튼 시간 다 됐으니까 나는 그만 갈래.”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하지만 두 시간 했잖아?”
“수업은 시간과 상관없이 제가 되었다고 했을 때, 끝나는 겁니다.”
“아, 몰라. 몰라. 난 그만 연병장 가봐야지! 기사들 연습하는 것도 보고.”
“레이디는 그런 곳에 가는 것은 지양해야...”
“몰라!!! 그럼 난 간다!”
“아가씨!!!”
세뇨르 선생이 소리쳐 부르지만 이미 비욘느는 저 멀리 복도를 달리고 있다.
대체 뭐가 저리 성화야?
또 아버지한테 뭐라 일러바치겠지.
그렇지만 나는 분명히 수업 잘 들었다고.
도망치지도 않고.
좀 태도가 불량하기는 했지만 그건 다 아는 거니까.
그때 이후로 수녀원 보낸다는 말씀도 없으시고,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헤헤.
벌써부터 저 너머에서 우렁찬 함성소리가 들린다.
그에 맞춰 소녀의 입가에는 기대어린 미소가 감돌았다.
모퉁이를 돌자 연병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이미 경은 어디에 있지?
검술은 가르쳐 주지 않지만 그래도 아버지보다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지만 별로 나쁜 냄새도 나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실력도 아직 좋은 편이니까 좋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한창 내려치기 동작을 연습하는 기사를 툭툭 치며 묻는다.
“제이미 경은 어디있어?”
“아! 아가씨, 제이미 단장님은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가셨습니다. 오늘은 연병장에는 오시지 않을 겁니다.”
“시내? 흐음...시내란 말이지?”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비욘느가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