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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77화 (7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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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안파는 거죠?”

낸시는 아직도 미심쩍은지 로드리고를 쳐다보며 몇 번이고 되묻는다.

“그렇다니까. 도시에 들어오려고 되는대로 말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어서 먹기나 하라고.”

테이블에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가리키며 로드리고가 말하자 낸시는 잠시 주저하다가 음식에 손을 댄다.

낸시는 아직도 눈동자가 붉었다.

“어때? 맛있지? 이것도 좀 먹어. 그리고 이것도. 오늘은 아주 배불리 먹자고. 그동안 노숙하고 이만저만 고생한 게 아니니까.”

“제가 먹을게요. 그..그만 두세요..”

로드리고가 자꾸 음식을 낸시쪽으로 밀어대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야, 뭘 사양하고 그래? 이것도 먹고, 또 이것도 먹어. 많이 먹어야 가슴도...크크큭...”

“가슴도 뭐요?”

낸시가 노려보자 로드리고는 그저 음흉한 미소를 한번 지어줄 뿐이다.

낸시는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린다.

“야, 아직 게딱지만한 가슴 가지고 뭘 창피해 하냐? 하..하하하...”

“장난치지 마세요.”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많이 먹어.”

“조금만...먹을 거예요.”

“왜? 살찔까봐?”

“그..그래요.”

“정말? 가슴 때문이 아니고?”

“아..아니에요!”

“흐음...그렇구나. 나는 또 가슴 때문인 줄 알았지.”

“저..절대 아니에요.

“믿을게. 나는 낸시를 믿지. 낸시는 내 여동생 같은 아이니까. 안 믿을 이유가 없잖아?”

“여동생이요?”

낸시가 눈가를 부르르 떨며 묻는다.

“왜? 아니야?”

“절대로 아니죠! 도련님이 제 동생이라면 모를까.”

“오호호호! 이야~! 이거 정말...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너와 나 사이를 정의 하자면 당연히 내가 오빠고 네가 동생이지!!!”

“아니거든요! 도련님은 철도 안 들었고, 지금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여행이나 하잖아요? 빨리 마을로 돌아가지도 않고...대체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주인어른이 엄청 걱정하고 계실 텐데...”

“철이 안 들어?! 내가 철이 안 들었다고?! 이야...이거 정말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말이구나! 왜 내가 철이 안 들었다는 건데? 증거 들 수 있냐? 엉?!”

“지금 그 모습만 봐도 증거는 충분한 거 아니에요?”

“오호라! 나는 전혀 모르겠거든? 이게 어딜 봐서 증거라는 거야?!”

“됐어요. 말해봤자 소용없을 텐데 입 아프게 말해서 뭐해요?”

“너 말 다했냐? 내가 정말...”

“정말 뭐요?”

“하아...아무튼 넌 내 동생이야. 내가 오빠고. 실제로는 아니어도 굳이 따지자면 그런 관계인거지. 새겨들어.”

“......”

“야! 대답 안 해?!”

“소..소리치지 마세요.”

로드리고가 언성을 높이자 주변에서 무슨 일인가 흘끗거리는 시선이 늘어난다.

가뜩이나 보호자도 없이 어린애 둘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음식을 가득 시켜 먹고 있는 모습이 호기심을 끄는 것 같은데, 둘 사이에 목소리가 커지자 더욱 관심을 끌게 되는 것 같았다.

낸시는 그걸 눈치 채고는 얼굴을 붉히며 로드리고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낸시를 이참에 좀 교육시켜놔야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왜?! 내가 내 목소리 가지고 말하는데 무슨 상관이야?! 나는 어차피 너한테 동생 같은 철없는 녀석일 뿐이니까 마음대로 해야지! 흥!”

로드리고는 그렇게 말하고는 일부러 소리나게 테이블을 쾅쾅 소리 나게 쳐댔다.

더욱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자 낸시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속삭이듯, 하지만 무척이나 빠르게 말했다.

“좋아요. 도련님이 오빠해요. 제가 여동생 할 테니까. 그러니까 조용히 좀 하세요.”

“흥! 싫어. 나는 그냥 동생 할 거야. 이렇게 엎드려 절 받으면 내가 좋다고 할 줄 알았냐?! 누구를 바보로 아나?!”

“그럼 어떻게 해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그만 둘 건데요?”

“사과해.”

“뭘 해요?”

“사과 모르냐? 잘못한 사람이 하는 그거 있잖아?”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그래? 그럼 계속 소리치지 뭐.”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만...그만 하세요. 사과 할 테니까 그만 하라고요.”

“흐음...그럼 따라해 봐. ‘도련님, 정말 죄송합니다.’”

“싫어요. 그냥 제가 알아서 사과할 거거든요.”

“야! 사과는 진심이 묻어나야 하는 거야. 알고 있어?”

“그래서 제가 한다는 거예요. 도련님이 아무렇게나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요.”

“좋아. 까짓 거 넓은 아량으로 이번엔 좀 참아주지. 그래, 그러면 네가 알아서 진심을 담아 사과해봐. 내 발도 조금 내밀어 줄까? 네가 입 맞출 수 있게 말이야.”

“그런 짓 안할 거거든요.”

“진심 담는 거 맞아?”

“지금 저 놀리는 거죠?”

“눈치 챘어?”

“정말 싫어!”

“그게 사과야? 너 예절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도련님한테는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요.”

“나는 다 너를 생각해서 말해주는 것 뿐인데...이거 정말 섭섭하다. 너 친구 별로 없지?”

“도련님이야말로 친구 없잖아요?!”

“내가? 내가 친구 없다고? 그건 아니지. 마을 사람들은 전부 나한테 친절하다고. 굽실굽실하면서. 너도 봐서 알잖아?”

“그건 도련님이니까 그런 거고요!”

“맞아. 내가 바로 도련님이지. 그 자체로 나는 친구가 많거든. 그런데 너는?”

“저도 친구 많아요. 도련님과는 다른 의미로요.”

“그러니까 누구?”

“토미 오빠도 제 친구고...”

쾅!!!

순간 로드리고가 테이블을 내려친다.

“그 자식 이름은 말하지 마.”

눈에 힘을 주고 로드리고가 노려보자 뭔가 한마디 하려던 낸시도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킨다.

대체 뭐야?

자기가 말해 보라고 해서 말했던 것뿐인데...

낸시의 마음이야 어떻던 로드리고는 미간을 좁히며 거칠게 포크를 들어 고기 한점을 입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힘주어 씹어댔다.

그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암튼 너는 아직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기분을 무지 나쁘게 만들었어. 알고 있어?”

“아니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는 건 알겠지만 제가 도련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든요. 어째서 토미 오빠 이야기 하니까...”

“바로 그게 문제라고! 그 자식 재수 없으니까 내 앞에서 놈 이름 꺼내지 마. 알았냐?”

“좋아요. 토미 오빠 빼도 다른 친구 많아요. 헤나로 아가씨도 제 친구고, 얼마 전에 아비슈도 친구 됐고, 베니 아주머니하고 노라 아주머니도 제 친구고...”

“야! 야! 됐어. 됐다고. 그래. 너 친구 많다. 됐냐?”

“자기가 물어 놔 놓고는...정말...”

낸시가 중간에 자꾸만 말이 끊기자 기분이 상한 듯 시선을 내리깔며 혼자서 불만어린 목소리를 흘린다.

그 소리에 살짝 로드리고의 눈가가 떨렸지만 딱히 그걸로 다시 시비를 걸진 않는다.

하지만 미안하단 소리는 꼭 듣고 싶은지 다시 사과를 운운한다.

“그럼 사과 해봐.”

낸시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미안해요.”

“그게 끝?”

“예. 끝이요.”

“......”

“......”

“낸시야, 내가 생각해 봤는데, 사과는 상대방이 수긍해야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사과하는 것이 처음 조건이었잖아요? 의미가 있든 없든 그런 거 상관없이요.”

“그건 아니지. 항상 의미는 중요한 거야.”

“도련님, 얼마 전에 내기 했던 것 기억하죠?”

“아! 네가 내 부탁 들어줘야 하는 거 50가지 남은 그거 말하는 거지?”

“제가 말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요. 아무튼 그때도 절 안고 달렸잖아요? 마구 흔들고. 그런 건 처음 내기할 때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기억하시죠?”

“난 네가 부탁 들어주지 않은 것만 기억하는데?”

“아무튼 전 사과했어요.”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다시 소리치고, 테이블을 미친 듯이 두드려대야겠다.”

“정말 왜 그래요?!”

“너야 말로 왜 그래?”

“그럼 정말로 도련님 발에 입 맞추면 되겠어요?”

“아니, 솔직히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발에 입 맞춰서 뭐해?”

“그럼 뭐 해달라고요?”

그 말에 로드리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많이 먹어.”

“왜요? 가슴 커지게?”

역시 낸시도 며칠간 로드리고와 붙어있다 보니 대충 그의 속마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잘 아네.”

“하아...좋아요. 많이 먹을게요. 그러니까 더 이상 소리치고, 시선 끄는 짓은 하지 마요. 그리고 여기서 볼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요.”

“낸시야 그건 불공평하지. 너는 그냥 많이 먹어주는 것 하나만 해주기로 했으면서 이렇게나 내게 요구하는 게 많으면 내가 과로사 할지도 몰라.”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건 모르지.”

낸시는 그런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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