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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78화 (78/200)

00078  브라우닝 영지  =========================================================================

식사를 마치자 로드리고가 말했다.

“그럼, 구경 좀 가볼까? 같이 가자.”

낸시는 그 말에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로드리고는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야, 내가 그것도 생각 못하고 가자고 했을 까봐? 다 방법이 있어.”

“어떻게요? 마차타고?”

“아니. 마차는 붐비는 데서는 아무래도 힘들지. 잘못하면 오도 가도 못하고 사람들한테 욕도 엄청 먹게 되거든.”

“그럼요?”

“어부바.”

“뭐요?”

“어부바. 내가 업어준다고.”

로드리고가 산뜻한 미소를 날린다.

하지만 낸시는 마주 웃어줄 수 없었다.

뭔가 말해 보려고 입을 벌리지만 곧바로 나오지는 않고 한 템포 쉬었다가 간신히 말을 내뱉는다.

“...저는 그냥 여기 있을래요.”

그러나 로드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고집을 부린다.

“뺄 것 없어.”

“아니요. 정말 괜찮으니까...”

다 안다는 듯 로드리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힘들까봐 그러지?”

마치 어둠속에서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낸시는 곧바로 그 빛에 달려든다.

“그..그래요! 힘드실 테니까 전 여기에 있을게요.”

“하하! 그럴 것 없어. 나 하나도 안 힘드니까. 괜찮아. 괜찮아.”

결코 자기 입으로 내뱉고 싶지 않은 말까지 들먹여 보는 낸시.

“하지만 저 무겁다고 분명히...”

그러나 로드리고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는다.

물론, 낸시의 속을 긁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지만 내가 충분히 힘이 세니까 괜찮아.”

“......”

“왜? 그 눈빛은 뭔데?”

로드리고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낸시에게 눈을 깜박이며 묻는다.

“됐어요. 아무튼 안가요. 업혀서는 절대로 안가니까 혼자 다녀오세요.”

“낸시...우리 낸시는 왜 이리 고집이 셀까? 낸시야, 남자가 말할 때는 그냥 적당히 져주는 척 하는 게 인기의 비결이야. 물론, 가슴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고 할까? 세상에 가슴 큰 여자는 꽤 많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라도 더 여자의 무기를 갖추려고 노력해야지. 다 뼈가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니까 새겨들으렴.”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어차피 가슴도 별로 없고. 있어도 도련님이 또...아니, 됐어요. 정말 됐으니까 그만 해요.”

로드리고는 탁자 위에 올려진 낸시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은 걱정하지 마. 열심히 먹다보면 꽤 그럴듯한 것을 가지게 될 테니까. 그건 내가 보장할게. 뭣하면 누군가 친한 남자가 열심히 만져주면 무럭무럭 자라기도 하는데 나는 언제든 도와줄 용의가 있으니까 사양하지 말고.”

낸시는 싫은 표정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로드리고를 쳐다보며 자기 손을 얼른 잡아 뺀다.

“도련님이 하는 보장 같은 것 필요 없어요. 제 가슴에 대한 관심은 이제 그만 접어주세요.”

“낸시, 크게 착각하고 있구나. 나는 절대로 네 가슴에 그리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 만한 여자아이와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한참 자라나는 가슴 말고는 딱히 대화거리가 없잖아?”

“제 머리카락도 매일 자라고 있는데요? 마을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을 것 같고요. 헤나로 아가씨나 마을에 아는 다른 사람 이야기도 대화거리가 되지 않아요?”

“그런 건 전부 하찮은 것뿐이야. 조금도 관심 없고. 시시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아. 아무튼 일어나. 내가 업어 줄 테니까.”

“업히기 싫어요!”

낸시는 더 이상 이리저리 말을 돌려봤자 소용없을 것 같자 심경을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로드리고가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만한 나이지.”

“휴우...그럼 전 방에서..꺄앗!”

뭐라 말하기도 전에 로드리고가 낸시를 번쩍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었다.

“내려줘요!”

낸시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외쳤다.

“왜? 업히기 싫으면 당연히 공주님 안기잖아?”

“왜 그렇게 되는 건데요? 모두 쳐다보잖아요?”

실제로 낸시 말처럼 주변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소년이 소녀를 번쩍 안아들자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어차피 나갈 건데 뭐.”

로드리고는 낸시가 허둥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 어딘가로 향했다.

마치 이미 이곳 지리 정도는 훤히 아는 듯 했다.

낸시는 창피해 어떻게든 내려달라고 외쳐댔지만 소용이 없자 급기야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버렸다.

한참을 걷던 로드리고는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걸 느끼고 얼굴을 가렸던 낸시가 손을 내린다.

그 순간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드리고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 왔어.”

“어딘데요?”

주변에서는 요란스런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금속이 울리는 소리, 나무의 둔탁한 소리, 웃음소리와 고함소리.

“공방. 여기서 네 목발이라도 만들자. 계속 내가 이렇게 안고 다니는 게 좋으면 안 만들어도 되지만. 어떻게 할래?”

“하지만 돈이 들지 않아요?”

“그 말은 공주님 안기가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야?”

“아니요!”

“그렇게까지 심하게 부정해 버리면 나도 상처받는다구.”

“아무튼 전 돈이 없으니까...”

“낸시야, 너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돈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

“도련님...”

“돈은 네 가슴으로 지불하면 되지. 아무 걱정 하지 마.”

“네?!”

“일단 목발부터 만들자. 어디다 말하면 되는 거지?”

“잠깐! 잠깐만요!”

다급한 낸시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고는 못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결국 참다못한 낸시가 로드리고의 머리카락을 붙잡고는 흔들어댔다.

“멈춰요! 멈춰!”

“아! 그만! 야, 그만 잡아 당겨! 이 계집애가 진짜...장난이야. 그냥 장난이라고.”

“장난 좀 치지 마세요! 정말 당황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네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약속하지는 못해.”

“으! 정말!”

“아무튼 목발은 필요하지? 그럼 잠자코 있어.”

“그래도 가슴은 싫어요. 누가 제 가슴 주물럭거리는 거 싫다고요!”

“나도?”

“도련님도요!”

“나 상처받았어.”

“그래도 안돼요!”

“그래도 만질 거니까. 상관없으려나?”

“제 말 좀 들어요!”

“다 듣고 있어. 들어주지 않을 뿐이지.”

“그럼 들어줘요!”

“뭐라고 했지?”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방금 전에는 당황하고 경황이 없어 생각나는 대로 말했지만 막상 다시 가슴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러운지 낸시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응? 어서 말해 봐.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잖아? 이렇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니까.”

음흉한 미소를 한껏 입가에 단 로드리고를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것을 느끼며 낸시는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이것 참. 레이디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곤란해 하고 있지 않나?”

돌아보니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하지만 반듯한 자세와 형형한 눈빛, 커다란 덩치가 노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방금 전 들었던 목소리도 노인의 쇳소리는 없었다.

게다가 옷도 가벼운 차림이기는 하지만 일반 평민들이 입기에는 꽤 고급이다.

“누구세요?”

로드리고는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걸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내 소개를 잊었군. 제이미 경이라 부르게나.”

“경?”

“기사니까 말이야. 왜? 이 나이 먹어서 아직도 기사를 하고 있으니 신기한가?”

제이미 경?

게다가 이런 노인이라면...

브라우닝 영지의 노익장 제이미 경밖에 없지 않은가?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브라우닝 자작가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끝까지 충성했다던 그 노기사?

가문을 건 대결에서 브라우닝 자작가의 대전사로 뽑혀 싸웠더랬지.

한 10년은 더 있어야 벌어지는 일이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실력은 둘째 치고, 가문에 남은 기사가 저 사람 하나밖에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었는데...

지금이야 아직 기력이 있는 것 같지만 그때에는 골골대다 칼 몇 번 휘둘러보고는 상대편의 검에 맞아 절명했다는 이야기가 꽤나 유명했다.

뭐, 나도 노인네였으니 알지만 힘이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기력이 딸려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지곤 했었지.

불쌍한 노인네...

그래도 충성의 대명사로 유명해져 내가 나이 들었을 때도 가끔씩 회자되곤 했었다.

그런 자를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운이 좋은 건가?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네. 뭐라 책망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가능하면 레이디는 상냥하게 대해야지. 너무 짓궂으면 미움을 받는 다네. 하하하.”

제이미 경은 로드리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는데 그 손길을 느끼며 로드리고는 기분이 꽤 묘했다.

싫은 기분은 아니지만 뭔가 쑥스럽다고 할까?

나도 나이가 있는 사람인데...이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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