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브라우닝 영지 =========================================================================
“이렇게 귀여운 레이디를 무엇 때문에 그리 놀리고 있었나?”
제이미 경은 낸시를 향해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귀엽다는 말에 반응했는지 낸시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보며 로드리고는 기분이 상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손녀 뻘의 소녀를 귀여워하는 모양새일 뿐이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그렇게만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 나이를 경험해봐서 그런지 그렇게 순수한 모습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할까?
결국 로드리고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목소리에 드러내며 말했다.
“쟤는 별로 귀엽지도 않고, 레이디도 아니거든요. 잘 보라고요. 괜히 그렇게 부르면 버릇 나빠지니까 조심해야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놀리는 거야 뭐...이유가 있나요? 그냥 놀리는 거죠.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그것 말고는 없어요.”
낸시는 그 말을 듣고 살짝 미간을 좁히며 로드리고를 노려봤지만 딱히 뭔가 말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낯선 노인 때문에 말을 가리려는 것 같았다.
“이런..이런..솔직하지 못하군.”
노인이 다 안다는 투로 말하자 로드리고는 더욱 배알이 꼴렸다.
“제가 솔직하지 못하다구요? 아니요. 낸시가 별 볼일 없는 시골 계집애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에요. 여기도 처음 와봐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니까요. 정말 창피해서...”
“도련님!”
낸시는 계속해서 로드리고가 심기를 건드리자 결국 한마디 하고 만다.
하지만 역시나 노인 앞이라 이내 입을 다문다.
“하하하! 이것 참. 이보게 맹랑한 친구. 자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소중하게 안고 있지 않나?”
로드리고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낸시를 품에 조심스럽게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움찔 하고는 그대로 낸시를 안은 팔을 거두고 만다.
그와 동시에 낸시는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노인은 이미 예상했는지 낸시가 바닥에 부딪히기 전, 찰나의 시간에 용케 받아낸다.
낸시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노인은 살짝 고개를 까닥거리며 웃어보이고는 말했다.
“조심해야지. 허허허! 꼬마 레이디, 설수 있겠소?”
낸시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아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바라보는 로드리고는 사뭇 낸시가 부끄러움을 탄다고 생각했고, 그의 얼굴은 분노 때문인지 질투 때문인지 알 길은 없지만 무척이나 붉게 변했다.
노인은 낸시를 바닥에 세워준 후 로드리고에게 말했다.
“어린 친구가 왜 그렇게 짓궂은 겐가? 뭐 나야 재미있으니 좋지만 이래서야 레이디가 사랑에 빠지기는 요원하지 않겠나? 레이디의 사랑을 얻는 방법이야 무궁무진하게 전해져오지만 다 쓰잘데기 없는 짓이야. 정작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같이 보내며 잘해주는 방법이 최고거든. 그러다보면 오빠, 오빠 하다가 아빠 되는 거지.”
노인 입장에서는 인생의 경륜을 바탕으로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아득히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 소년에게 충고한 셈이지만 로드리고는 그것이 비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자연스레 로드리고의 입에서는 좋은 대답이 나올 수 없었다.
“몸종 같은 애랑 누가...게다가 제가 굳이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얘는 저 엄청 좋아하거든요.”
로드리고가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 말은 곧바로 낸시의 반박을 불러왔다.
“저는 도련님 안 좋아하거든요!”
낸시가 기가 찬다는 듯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대꾸한다.
제이미 경은 그런 모습이 뭐가 그래 재미있는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노인의 반응이야 어떻든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나 엄청 좋아해! 네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다 알거든!”
“제가 아니라는데 어떻게 제 마음을 도련님이 더 잘 안다는 거예요?! 제 마음은 제가 가장 잘 알지요!”
아우 빡쳐!
낸시 계집애가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본다.
로드리고는 마음속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짜증을 애써 참아가며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것도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폭발하고 만다.
“원래 자기 마음이 가장 알기 힘든 법이야. 너는 아무튼 내가 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알아?!!!! 이 계집애야!!! 하여간 말대꾸는...”
버럭 소리치는 로드리고를 보며 제이미 경이 얼른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이런...내가 괜히 끼어들었나 보군. 싸우지들 말게나. 하하하! 하지만 레이디의 심정도 좀 이해해 줘야지. 그렇게 밀어붙이기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단 말일세. 뭐, 남자의 그런 밀어붙이는 경향도 때때로는 매력적이게 보이곤 하지만...”
“밀어붙이는 거 아니라 그냥 사실이라니까요. 쟤가 괜히 부끄러우니까 숨기려고 하는데 아무튼 잘 알아두세요. 쟤 취향은 바로 저거든요. 그리고 기사님 같은 타입은 좀 힘들죠.”
제이미 경은 방금 로드리고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잠시 생각하다가 어이없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더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내 나이가 몇인데? 하하하!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은걸? 내가 자네에게는 꽤 위협적인 라이벌로 비춰졌나 보이? 응?”
제이미 경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감돈다.
“아니거든요! 그냥 아무렇게나 말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젠장...”
로드리고는 거칠게 자기 머리를 비벼가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예의에 벗어나는 말투지만 제이미 경은 원래 성격이 소탈한 탓인지 로드리고를 책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나저나 공방에는 무슨 일인가?”
로드리고는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왜인지 좀 얄미운 데가 있는 늙은이지만 그래도 이곳을 잘 아는 사람이 도와준다면 꽤나 수월해 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사실대로 말했다.
“얘...목발 좀 만들어 볼까 해서 왔어요. 다리...불편하니까. 항상 제가 안고 다닐 수도 없고.”
“하하!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끔찍이도 생각해주는군. 암! 사내라면 그래야지. 하하하! 그런 일이라면 나한테 맡기게나. 내가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제이미 경은 로드리고와 낸시를 안내해 좀 더 안쪽에 있는 공방으로 이끌었다.
제이미 경이 낸시를 안아들려고 했지만 그 전에 로드리고가 얼른 낸시를 안고 잠시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낸시는 확연히 싫은 표정을 지으며 까탈을 떨었지만 그래봤자 로드리고는 낸시를 내려주지 않았다.
제이미 경이 있어서 그런지 공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도 아무도 로드리고와 낸시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는 좀 허름해 보이는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연히 로드리고도 그의 곁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낸시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제 내려주세요.”
로드리고는 잠시 뜸을 들이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딱히 생각나는 변명이 없는지 결국 낸시를 내려주었다.
그제야 낸시는 한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로드리고가 말했다.
“감사 인사는?”
“예?”
낸시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고맙다고 안 해?”
“...고..고마워요...”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낸시가 어물쩍 귀찮다는 투로 말하자 로드리고는 살짝 배알이 뒤틀렸다.
막 뭐라고 하려는 그때, 마침 제이미 경이 말했다.
“잠시 여기 있어 보게. 내 들어가서 있는지 살펴볼 테니 말이야. 어디 다른 곳에 일을 도와주러 잠시 외출했을 수도 있거든.”
로드리고가 막 알았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낸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제이미 경.”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낸시가 예의바르게 말하자 제이미 경은 낸시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낸시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로드리고의 입가에는 뿌드득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