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브라우닝 영지 =========================================================================
저 계집애...나한테는 한 번도 저런 표정 보여주지 않더니 대체 뭐야?!
로드리고는 뭔가 억울하고 답답했다.
결국 제이미 경이 없는 틈에 어떻게든 그의 흉을 볼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 진짜...이거...야! 무슨 냄새 안나냐? 아까부터 엄청 고약하더만....지금은 조금 괜찮은데...너도 아까 맡았지? 응?”
로드리고가 코를 킁킁거리며 낸시에게 물었다.
낸시는 살짝 미심쩍은 표정을 짓더니 자기 팔을 들어 슬쩍 냄새를 맡았다.
자기 옷에서 나는 냄새인지 살피는 것 같았다.
이내 안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냄새 안나요.”
“아이 진짜 말 안 통하네. 야! 누가 너한테서 냄새 난데?”
“그럼 뭔데요?”
낸시도 자꾸만 듣는 핀잔이 좋을리 없는지 미간이 좁혀진 채다.
“너 왜 인상은 쓰고 그래? 도련님이랑 말할 때는 항상 방긋방긋 웃어야 하는 거야.”
“저는 원래 잘 안 웃어요.”
“그래도 웃어야 한다니까.”
“싫어요. 저는 제가 웃고 싶을 때 웃을 거예요.”
“이게 진짜!”
로드리고는 억지로 웃게 하려는지 낸시의 옆구리를 푹하고 기습적으로 찔렀지만 낸시는 눈가를 조금 움찔 했을 뿐 웃지 않았다.
얼른 로드리고의 손을 ‘탁’ 소리 나게 치고는 째려본다.
“자꾸 뭐예요?!”
“왜 안 웃는데?!”
“그야 제 마음이지요!”
“너 조금 전 그 노인네한테는 웃어줬잖아?!”
“노인네가 아니라 제이미 경이에요!”
“너 지금 그 노인네 편드는 거야?!”
“편드는 게 아니라 도련님이 예의 없이 구니까 그렇잖아요?”
“하!? 예의?! 너 지금 내 앞에서 예의?! 네가 예의에 대해 뭘 아는데? 응? 기껏해야 촌무지렁이 보면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는 것 말고 더 있어?!”
“그래도 도련님 보다는 나아요!”
“뭐가 나은데?”
“도련님은 그마저도 안하잖아요?!”
“나는 도련님이니까 그렇지! 도련님은 그냥 인사 받기만 하는 거야. 사람들이 내게 인사하면 내가 고개 끄덕여 주는 거 너도 봤잖아? 다 사람들은 그 위치에 맞게 지켜야 하는 예의도 달라지는 거야.”
“그럼 제이미 경은 기사님이거든요?! 도련님보다 훨씬 높은 분 아니에요?”
“우...우와아아아!!! 내가 정말!!! 아이고 속 터져! 지금도 봐! 편드는 거!”
“편드는 거 아니라니까요!”
“지금 그게 편드는 거야! 야, 너랑 나랑 몇 년을 같이 지냈는데 지금 이럴 수 있어? 이야~! 그 노인네가 네 취향이냐?! 응?! 정말 섭섭하다, 야!”
“대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낸시가 어이없고 당황스러워 얼굴을 조금 붉힌다.
하지만 그 모습이 더욱 로드리고의 화를 부채질하고 말았다.
“하! 딱 걸렸어! 너...너...정말...!”
“정말 뭐요? 어린애처럼 그러지 말아요. 제발...제이미 경이 들으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들으면 좀 어때?! 어린애? 그래! 어린애가 뭐 어때서? 너 노인네 보다는 어린애가 훨씬 나은 거야. 늙어봐. 매일 허리 아파, 무릎 아파...아유...진짜 그 소리 듣다보면 지겨워서 미친다고! 알아? 바람 조금만 불어도 춥다고 징징 거리고. 게다가 냄새! 그거 정말 장난 아니다? 내가 아까 하려던 말도 바로 그거였어! 제이미 경 말이야, 네가 그렇게 편드는 제이미 경! 노인네 냄새 엄청 나더만. 너도 맡았지? 그렇지? 아까 품에 폭 안겨가지고 그 쪄는 냄새 맡았을 거 아니야?! 응? 어때? 역겹지? 그렇지? 그래도 노인네가 좋아? 응? 어디 말해 봐?!”
“창피하게 자꾸 왜 그래요? 목소리 좀 낮춰요. 제발!”
낸시는 제이미 경이 들어간 건물에 시선을 주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혹 제이미 경이 로드리고가 버릇없게 하는 말을 듣기라도 하면 무척이나 곤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해 보라고! 제이미 경은 냄새 난다고 말해! 어서!”
“제이미 경은 냄새 안 나요!”
“뭐? 너 코 막힌 거 아니야? 응? ‘흥!’해봐. 어서! 코 막혔으면 못 맡았을 수도 있겠네.”
“코 안 막혔어요. 멀쩡하다구요! 제발 그런 이야기 그만 좀 해요.”
“아니야. 숨겨도 소용없어. 너 아까부터 코맹맹이 소리 나는 거 같았거든. 내가 귀가 엄청 좋아서 다 알아! 누구를 속이려고?! 고개 뒤로 젖혀봐. 코딱지 장난 아니게 들어 찬 거 아니야? 뭣하면 내가 파주고. 어때? 너 코막혀 있이면 엄청 답답한데 잘도 참는다?”
로드리고가 억지로 낸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자기 손가락을 콧구멍에 집어넣으려고 하자 낸시는 저항하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 해요! 제발 좀~!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그때,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 둘의 귓가에 여자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로드리고는 기어코 자기 검지손가락을 낸시의 콧구멍에 집어넣은 채 시선을 돌렸다.
낸시는 이번에야말로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로드리고에게 항변했지만 울림이 너무 심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로드리고의 시선에 들어 온 것은 꽤 귀여운 소녀였다.
자기보다는 몇 살 어려 보였지만 표정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게다가 왜인지 낯이 익었다.
“넌 누구야?”
로드리고는 여전히 콧구멍에서 손가락을 뽑지 않은 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낸시는 겨우 로드리고의 손을 붙잡고 밀어내서 콧구멍의 자유를 찾았다.
하지만 코 주변이 새빨갛게 변해 욱신거린다.
소녀는 입가에 미소를 두른 채 양손을 교차해서 크게 허공중에 휘두르더니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미소녀 천재 검사!”
“......”
“......”
로드리고도 낸시도 말을 잊고 멍하니 그런 소녀를 쳐다보자 소녀는 이내 얼굴이 빨개지더니 소리쳤다.
“뭐...뭐라도 말하란 말이야! 민망하게 만들지 말고!”
로드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아! 알았어! 그럼 나는 미소년 천재 검사. 그리고 여긴 그냥 대충 생긴 하녀.”
“제 소개는 왜 그 모양이에요?!”
낸시는 아직도 코가 아픈지 양손으로 코를 가린 채 항의했다.
“그 정도면 후하지. 뭘.”
“후한 건 도련님 소개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쟤가 먼저 미소녀라고 그랬잖아? 그럼 맞춰줘야지. 이게 아까 네가 말한 예의 아니야?”
“쓸데없는 데서 예의 차리지 마세요!”
“저런...낸시야, 예의는 항상 차려야 하는 거야.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그럼 제이미 경에게도 차리세요!”
“이 계집애가! 또 편들어?!”
“됐어요!”
로드리고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왜인지 이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자기를 미소녀 천재 검사라고 소개한 소녀가 말했다.
“제이미 경은 이 안에 있어?”
“응.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아직 나오지 않고 있어.”
“그래서 제이미 경 흉보고 있었고?”
“흉이라니!? 나이든 노인은 다 냄새나. 그건 사실이지 흉이 아니야. 넌 제이미 경을 잘 아는 것 같은데, 너도 맡지 않았어?”
로드리고의 질문에 소녀는 잠시 시선을 자기 머리로 향한채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아. 하지만 보통은 그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잖아?”
“응. 그건 그렇지. 그래서 본인 없는 데서 했어.”
로드리고는 나름 생각해 줬다는 듯 인심 쓴 어투로 말했다.
“그것 참...예의 바르네? 이 표현이 맞나?”
소녀는 자신의 말에 의문을 품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나는 예의 바른 편이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로드리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낸시는 옆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튼 소녀는 더 이상 ‘예의’에 대해서는 생각하기 싫은지 주제를 바꿨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야? 왜 제이미 경을 기다리고 있어?”
“소개는 아까 하지 않았나?”
로드리고는 조금은 의뭉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꾸한다.
“에이! 그런 거 말고! 조금 전 소개는 그냥 잊어.”
“하긴. 너는 미소녀 천재 검사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지.”
로드리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소녀는 뭔가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로드리고는 여전히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이 없잖아?”
그 말에 이내 기분이 다시 좋아졌는지 소녀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입가에 호선을 그린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뭐...검이 없으면...조금 부족한 소개였을 수도 있겠다...흠..흠흠!”
그 모습을 보며 로드리고는 왜인지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아직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낸시에게서 느끼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기분이다.
마침 그때, 제이미 경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대체 여긴 어떻게?!”
아가씨?
이곳에서 제이미 경이 아가씨라고 부를 법한 사람이 비욘느 말고 또 있나?
로드리고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녀를 바라봤다.
조금 그녀와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우아한 모습은 조금도 없다.
뭐, 내가 모르는 동생이나 친척 같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