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1 브라우닝 영지 =========================================================================
소녀는 제이미경을 발견하자 재빨리 그리고 뛰어가서 제이미경의 손을 붙잡았다.
소녀의 자그맣고 부드러운 손이 노인의 큼지막하고 거친 손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제이미경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소녀가 더 빨랐다.
“말없이 그냥 나가면 어떻게 해? 나도 데리고 나가야지. 성은 지루하단 말이야.”
“아가씨야말로 말없이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제이미경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꼭 손녀를 걱정하는 노인과 닮아 있다.
소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말없이 나왔다고 그랬나?”
제이미경은 깜짝 놀라 되묻는다.
영주님이 어쩐 일로 아가씨가 성을 나오는 걸 허락해 주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허락받고 나오신 겁니까?”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생긋 웃는 소녀.
“아니.”
“......”
제이미경은 말을 잃고 살짝 눈을 찌푸린다.
그 모습을 보며 로드리고는 생각했다.
쟤는 대체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로드리고는 낸시를 쳐다보며 슬쩍 어깨를 들썩였다.
여기에도 헤나로만큼 대책 없는 계집애가 있다는 의미였으나 그것이 낸시에게도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낸시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제이미 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가씨, 이러시면 제가 영주님께 혼이 납니다. 성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닐 테고요. 성이 발칵 뒤집혔을지도 몰라요!”
“처음도 아닌데 뭘?”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소녀는 발로 바닥에 먼지를 피우며 대충 그림을 그렸다.
특별히 뭔가를 그리려는 의도는 없는 듯, 그저 네모나 동그라미 따위를 그려댔다.
명백히 제이미경의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의미를 내포한 행동이었다.
낸시와 로드리고는 옆에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멀뚱거리고 있었다.
제이미경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처음도 아니면 더욱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올바른 레이디는 이럴 한번 했던 어리석은 짓을 다시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야 현명한 어머니가 될 수 있어요!”
“그치만 나는 올바른 레이디도, 현명한 어머니도 관심 없어.”
제이미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꽤나 지금의 상황을 골치 아파 했다.
그러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군요. 아직 볼일이 좀 남긴 했지만 아가씨부터 성에 모셔다 드려야겠습니다.”
제이미경은 로드리고와 낸시에게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었었지만 소녀에게는 좀 더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어. 좀 더 놀다가 들어갈 거야.”
소녀는 고집을 피운다.
하지만 노인도 더 이상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시려면 영주님 허락을 받고 나오셨어야죠.”
“그치만 허락해 줄 리가 없잖아?”
소녀는 조금 얼굴을 찡그리며 불평한다.
“그러면 나오시면 안 되었던 겁니다. 다 영주님은 아가씨를 위해서...”
“나를 위한다면 제이미 경에게 검을 배우게 해주셨어야지! 나는 검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저는 영주님 허락이 없으시면 아가씨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모시는 영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불충입니다. 저는 그런 불충을 저지를 생각이 없고요. 아가씨도 좀 더 보통 영애들처럼 자수 같은 것에 흥미를 가져 보시는 편이...”
“싫어! 싫다고! 그건 정말 싫어! 팽팽한 천에 바늘로 이리저리 모양이나 내고 그걸로 감탄하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나는 천재 검사야!”
“아가씨는 천재 검사가 아닙니다. 아직 검에 대해 뭔가를 배운 적도 없고요. 그리고 앞으로도 검을 배울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건 모르지! 천재한테 배우면 나도 금방 천재 검사가 될 수 있어!”
“그 천재가 어디 있는 데 말씀입니까?”
“제이미경이 천재잖아?”
제이미경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는 일고의 망설임도 없었다.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그냥 나이든 기사일 뿐이죠.”
“하지만 아직도 기사단에서 제일 강하잖아? 제이미 경을 이기는 기사는 보지 못했는걸?”
“저를 이기는 기사는 많습니다. 아가씨가 아직 어리셔서 모를 뿐이죠. 근방에서는 유명할지 몰라도 왕국 전체에서 보면 저는 잔챙이일 뿐입니다. 아가씨께서 경험하신 세계는 아직 작아요. 천재나 바보를 운운하기에는 이릅니다.”
“흥! 거짓말! 가르쳐 주기 싫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
“아니요. 정말입니다. 저한테 배우셔도 천재는 될 수 없어요. ...천재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그 결실을 맺기는 하겠지만 정말 천재는...그런 겁니다. 저는 젊은 시절 그런 자를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제이미 경의 말에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그 천재가 누군데?”
“그건 모르죠.”
제이미 경은 시치미를 떼고는 고개를 저었다.
“젊어서 만났다고 했잖아?”
소녀는 금방이라도 제이미경이 알려주면 만나러 가려는 기색이었다.
“오래전 일이라 잊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이 명백했고, 그래서 소녀는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출한다.
하지만 이내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 났는지 로드리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참, 여기도 하나 있어! 아까 그렇게 자기를 소개 했는걸?”
로드리고는 졸지에 주목을 받으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저 계집애가 진짜!
자기가 이상하게 소개해서 무안해 질까봐 맞춰줬더니 내게 창피를 줘?
확 그냥! 귀엽게 생겨서 봐준다.
뭐, 보아하니 귀족 아가씨이기도 하고...
좀 비욘느랑 닮은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비욘느일리는 없다.
비욘느는 저런 막무가내 성격이 아니니까.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계집애야, 나는 정말 천재 검사거든?
황혼의 기사에게 한 달 동안 구르고 구르며 경지에 들었단 말이다.
물론, 그가 내 수준을 경지라고 칭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혼자서 여행할 정도는 된다고 했으니까 시답지 않은 실력은 아니지.
“틀린 말은 아니지.”
그 뻔뻔함과 자신감에 소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래도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는지 활짝 웃는다.
그 모습은 확실히 귀여웠다.
그래서 로드리고는 잠시 멍하니 그 소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려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제이미 경이 말했다.
그에게는 그저 어린애 재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리라.
“이보게 소년, 내가 안에 이야기 해 두었네. 마침 그가 있더군. 소개해 줄테니 들어가지. 원래대로라면 좀 더 시간이 있었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서 나도 좀 서둘러야 겠네. 성이 발칵 뒤집혔을 테니 말이야.”
제이미 경의 시선이 잠시 소녀를 향하자 로드리고도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에 온 목적은 낸시의 목발을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불만을 가질 필요는 없는 셈이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천재 검사니 뭐니 하는 건 이래저래 부끄러운 일이고.
게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로드리고는 천재는 아니다.
정말로 회귀를 통해 기연을 얻었을 뿐이다.
뭣보다 어린 귀족 아가씨의 장난에 계속 장단을 맞춰주기도 싫었다.
귀여운 것은 사실이지만 비욘느도 아니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낸시를 안아들려고 하자 낸시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어요! 얼마 안 되니까 그냥 걸을래요. 그냥...부축만 해줘요.”
그러면서 자기 손을 로드리고에게 내민다.
로드리고는 그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싱긋 웃으며 마주 잡았다.
“뭐,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이건 뭐야? 마치 귀족 아가씨처럼 손이나 내밀고...크크크...이런 거 해보고 싶었어?”
조금 이죽거리며 놀리자 낸시는 삐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럼 뭔데?”
“그냥 부축이나 좀 해요! 하여간 완전 어린애야.”
휙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낸시의 반응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큭큭 웃음을 멈추지 않는 로드리고였다.
하지만 아직 소녀는 이대로 이 상황을 종결지을 생각이 없었나보다.
“제이미 경, 얘도 천재 검사라고 했으니까 확인해 봐. 응? 제이미 경은 본적 있어서 알 거 아니야? 분명 재미있을 거야?”
“해보기 전이지만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 소년은 천재 검사가 아닐 겁니다.”
“어째서?”
“천재 검사는 무척 희귀하니까요. 그러니까 일단 아니라고 생각하면 거의 대부분 맞는 셈이죠. 100만 명 중 한명 꼴이라고 하면 100만 번 중 한번만 틀리는 겁니다.”
“피! 그런 게 어딨어?!”
“아무튼 일단 들어가시죠. 아이들 소개만 해주고 곧바로 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쟤들은 여기 왜 왔는데?”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 레이디가 목발을 만들려고 왔다는 군요.”
“다리 때문에?”
“......”
제이미 경은 더 이상 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소녀는 이내 제이미 경에서 떨어져 낸시 근처로 오더니 물었다.
“얘, 다리는 왜 그렇게 됐어? 태어날 때부터 안 좋았어? 아니면 다친 거야?”
낸시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다쳤어요.”
로드리고와 맞잡은 손에 조금 땀이 배어나온다.
그걸 느끼고 로드리고가 얼른 말했다.
“별로 다시 생각하고 싶은 기억 아니니까 그만 해둬요.”
그러자 소녀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고는 다시 말했다.
“나쁜 사람 때문에? 내가 곁에 있었으면 분명 휙! 휘익! 하고 혼내주었을 텐데...그래서 내가 검을 배워야 해! 그렇지, 천재 검사님?”
저 계집애가 오냐오냐 했더니 정말....
로드리고는 슬슬 부아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명백히 놀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가 곁에 있었으면 그 미친놈한테 낸시와 똑같이 다리만 병신 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건 거의 99% 확률로 정확한 예상이었다.
하지만 꼴에 귀족 아가씨이니 그런 말을 주저리주저리 할 수는 없었다.
제이미 경이라는 저 노인네도 나름 깍듯하게 대하는 걸 보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는 셈이다.
그래서 로드리고는 간단히 계집애의 질문에 살짝 썩소를 날려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소녀는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치고는 제이미 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이미 경, 천재 검사님하고 결투를 해줘! 그리고 정말 천재 검사님이 맞으면 내게 검을 가르쳐 줘.”
그러나 제이미 경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