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2 브라우닝 영지 =========================================================================
“어째서? 결투 정도는 괜찮잖아?”
소녀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이미 경에게 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로드리고는 기가 막혔다.
저 미친 계집애! 왜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시비는 걸고 지랄이야?!
내가 저 노인네하고 싸우기는 왜 싸워?
전혀 생각도 없는 자신에게는 묻지도 않고 저 노인보고 나를 때려주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무리 황혼의 기사가 가르쳐 줬다고 해도 이길지 질지 알 수도 없는 싸움을 해서 스타일을 구기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사정이야 다르지만 다행스럽게도 제이미 경 역시 로드리고를 때려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굳이 대꾸하지 않은 제이미 경은 눈짓으로 어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로드리고가 속으로 안도하며 낸시를 부축해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아무래도 자기 생각대로 돌아갈 것 같지 않자 결국 소녀는 제이미 경의 손을 붙잡고 뒤로 버티며 그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저런 행동을 뭐라 하는지 모르지만 로드리고가 보았을 때는 그저 ‘땡깡’이었다.
저 계집애가 헤나로였다면 열심히 꿀밤이라도 때려서 버릇을 고쳐줬겠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복장이 터지기는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소녀는 그래도 제이미 경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자 결국 이렇게 말했다.
“만약 제이미 경이 이기면 다시는 내 맘대로 혼자서 성을 빠져나오지 않을게. 약속해. 정말이야. 약속한 다니까!”
제이미 경은 그 소리를 듣자 살짝 눈썹을 꿈틀거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유심히 소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지금 소녀가 한 제안이 꽤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맹세할 수 있습니까?”
제이미 경이 조금 뜸을 들이더니 묻는다.
소녀는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응! 맹세! 됐지?”
로드리고는 그 모습과 말투를 보며 절대로 신뢰가 가지 않는 맹세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보고만 것이다.
소녀는 한쪽 손은 들어서 맹세를 했을지 모르지만 다른 손은 등 뒤로 돌려 검지와 중지를 꼬았다.
제이미 경이야 소녀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보지 못했겠지만 로드리고는 소녀의 뒤편에 서있지 않은가?
결국 제이미 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드리고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좀 어울려 줘야겠네. 물론, 다치게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진심인가? 저 노인네?
저 계집애의 거짓부렁이 확실한 말에 속아서 지금 어린애일 뿐인 나와 한판 하겠다는 거야?
기가 차서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로드리고가 막 소녀가 등 뒤로 돌려 손을 꼰 것을 봤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낸시가 먼저 끼어들고 만다.
기가 차서 멈칫했던 그의 모습을 보고 낸시가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마 그가 겁이 나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한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낸시가 알기론 로드리고는 전혀 싸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뭐, 또래와 투닥거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런 기사와 붙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아무리 나이 많은 노인이라고 해도 기사는 기사고, 게다가 덩치도 크다.
허리도 굽지 않았다.
눈에는 형형한 힘이 넘쳐흐른다.
머리가 희고, 얼굴에 좀 주름이 있을 뿐이지 근육이나 덩치는 청년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로드리고가 겁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짓궂은 장난을 쳐온 건 정말로 얄밉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곤란해 하고 있는데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저희 도련님은 절대로 천재 검사가 아니에요.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어요. 조금 전 아가씨께서 농담하셔서 거기에 맞춰드렸을 뿐이니까요. 도련님이 차고 있는 검도 주인님 것을 몰래 가지고 나오셨을 뿐이에요. 가끔 마을에서 나뭇가지를 들고 휘두르신 적은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닌걸요.”
로드리고는 갑자기 낸시가 뭔가를 말해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는 찬찬히 이 계집애가 무슨 이야기 하는지 들었다.
그런데 듣다보니 속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로드리고는 애초에 노인과 붙을 생각이 없었다.
소녀가 거짓말 한 것을 알리면 제이미 경도 굳이 고집을 피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낸시가 이렇게나 자신을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을 할 줄은 몰랐고, 그것이 그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뭉개버렸다.
대충 보니 귀족가의 망나니 계집애도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약간은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제이미 경은 딱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틀림없이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제이미 경에 관한 사항은 전적인 로드리고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로드리고는 자신의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말았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거든!”
뭔가 어린애가 고집부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투와 내용이다.
아마 여기서 낸시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면 로드리고는 굳이 제이미 경과 검을 마주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낸시는 기어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고, 그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가고 말았다.
“지금 고집 피우실 때가 아니세요. 그리고 창피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낸시는 마치 누나가 철없는 동생을 타이르는 것처럼 로드리고의 어깨를 탁탁 가볍게 치며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 맺혀 있는 달래는 듯한 미소가 로드리고의 마음에 더욱 언짢게 한다.
이 계집애가 정말!
웃는 얼굴로 사내의 가슴에 커다란 스크래치를 사정없이 남기는 낸시.
결국 로드리고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분노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여전히 로드리고의 어깨에 머물러 있는 손을 소리 나게 쳐서 떨어뜨리고는 말했다.
“웃기지 마! 진짜라고! 저런 냄새나는 노인네를 내가 겁낼까봐?! 그래! 나뭇가지로 열심히 연습했다! 왜?! 그러면 안 되냐?! 응?! 저 정도는 그만큼 연습했으면 충분하거든?!”
“도련님!”
낸시는 로드리고의 발언에 깜작 놀라 소리쳤다.
로드리고도 심한 말을 뱉어내고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후회했다.
제이미 경을 바라보자 그는 살짝 경련이 이는 볼을 애써 진정시키며 힘겹게 웃었다.
“허..허허...그리 냄새나지는 않는다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지만 전혀 눈이 웃지 않고 있다.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
다행히도 딱히 귀족의 권위를 내세워 그를 어찌해 보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 제이미 경과 결투 비스무레한 어떤 거라도 하게 된다면 좀 호된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소녀는 ‘마침 이때다’ 하고 끼어든다.
“제이미 경, 한번 확인해 봐? 응? 천재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제이미 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똑바로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말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네 같은 어린애와 검을 마주할 수는 없네. 그건 기사로서 자신의 명예에 먹칠하는 행위지. 그러나 이대로 자네를 보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 이번에 내가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건 자네를 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 식으로 귀족들을 대하게 되면 멀지 않은 때에 사단이 나고도 남을 거야. 이참에 약간의 교육이 필요하겠군. 자네는 아무래도 막대기나 나뭇가지가 익숙한 것 같으니 그걸로 하지.”
저 노인네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결국은 흠씬 나를 때려주겠다는 말이구나.
그래가면서도 끝까지 선량한 척 하고 있어.
흥! 그러면 누가 겁낼 줄 알고!
그래! 이 참에 내 실력을 한번 제대로 테스트해보자.
황혼의 기사는 어디 가서 어중이떠중이에게 맞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기사는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잖아?
아...젠장...이거 이러다 낸시 앞에서 엄청 터지는 건 아닐까?
아니지. 그래도 보는 사람이 있는데 개 패듯이 패기야 하겠어?
잠깐...잠깐!
왜 지는 것부터 상정하고 생각하는 거야?!
이래 봐도 전쟁터에도 나가봤고 경험도 있는데...
뭐, 저 노인이 이 근방에서는 꽤 유명하다 하지만 그래도 더 대단한 사람도 여럿 봤었지.
직접 붙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노인을 상대로 너무 쫄아서 좋을 것도 없어.
일단 기세에서 지고 들어가면 이길 것도 지고 말아.
로드리고는 눈에 가득 힘을 주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얻어맞고 울지나 마세요. 저는 적당히 하지 않을 테니까!”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그래. 적당히 하지 말게나. 하지만 나는 적당히 해주겠네. 어디까지나 교육이 목적일 뿐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교육이 끝나면 저 레이디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도 잊지 않겠네. 게다가 그 비용도 내가 치러주지.”
“흥. 너무 우습게만 보지 마세요. 그러다 큰 코 다칩니다. 정말 제가 천재 검사일지도 모르니까요.”
“하하! 사실 알고 있겠지만 자네가 천재이든 아니지 그건 상관없네. 어차피 자네는 지게 되어 있어. 천재 검사들도 차츰 자라며 강해지는 것이지. 어려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강한 것은 아니라네.”
하긴...그럴 것 같기는 하다.
아무리 천재라도 12살에 기사를 이길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물러날 수도 없다.
어떻게든 해결을 보아야 한다.
제이미 경은 허름한 건물로 다시 들어가더니 몽둥이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는 한 개를 나를 향해 던졌다.
나는 곧바로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았다.
몇 번 가볍게 휘둘러보니 꽤 가볍고 단단한 것 같았다.
이 싸움을 붙인 소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로드리고에게 말했다.
“잘해! 천재 검사님! 내가 검술을 배우고 못 배우는 건 너한테 달렸어.”
헤실헤실 웃는 얼굴에 죽방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저 노인과 진검으로 붙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참았다.
계집애는 제이미 경에게도 말했다.
“제이미 경, 저 아이가 이기면 내게 검 가르쳐 주는 거 잊으면 안 돼! 약속이니까!”
“잊지 않습니다. 그보다 아가씨께서도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그럼. 당연히 지키지. 쿡..쿡쿡쿡...”
마지막에 불길하고 조금도 신뢰를 주지 못하는 웃음을 흘리는 소녀를 바라보며 제이미 경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그도 몽둥이를 손에 쥐고는 가볍게 허공에 휘둘렀다.
그런데도 ‘휘이잉~’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모습에 로드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막 그가 앞으로 나서려는 데, 낸시가 그의 옷깃을 잡고는 말했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비세요. 인자하신 분인 것 같으니까 한번은 봐주실 지도 몰라요.”
그 말과 함께 로드리고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불안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음속에 오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는 그냥 보고나 있어!!! 이 계집애야!!! 자꾸 속 긁지 좀 말고!!! 오늘 네가 전혀 모르는 나를 보여줄 테니까!!!! 나중에 이기면 입술에 키스해 버릴 테니까, 각오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