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브라우닝 영지 =========================================================================
로드리고는 제이미 경을 마주한 채 막대기를 들어 올렸다.
제이미 경은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팔과 어깨를 움직이고, 허리를 비틀며 근육을 풀어준다.
저 노인네 별걸 다 하는군.
역시 늙어서 저렇게 하지 않으면 뻣뻣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냐?
로드리고는 이렇게 속으로 이죽거리며 상대방의 가치를 최대한 낮춰본다.
대충 준비운동을 다 마쳤는지 제이미 경도 막대기를 들어 올리고 로드리고를 향한다.
막대기는 한손에 잡은 채다.
아무래도 검에 비하면 훨씬 가벼워서 그런지 양손으로 잡을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로드리고도 한손으로 제이미 경을 겨눴다.
“이보게 나를 따라할 필요는 없어. 자네는 양손으로 잡는 게 더 좋을 거라네. 그리고 차고 있는 검은 그대로 둘 건가? 움직이기 불편하지 않겠나?”
그제서야 로드리고는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을 쳐다보았다.
빼놓는 것을 깜빡했다.
끝까지 낸시 계집애가 나를 물로 봐서 속을 박박 긁어대니 이리 되어버린 것이다.
좀 더 폼 나게 풀어서 낸시에게 맡아두라고 했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 잠깐 기다리게 하고 칼을 푸는 것은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
이렇게 저 노인이랑 한판 하게 된 것도 전부 폼 좀 잡아보려고 했던 건데 그렇게 얼굴 깎아 먹는 짓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로드리고는 몹시도 마음이 쓰렸지만 애써 경련이 일 것 같은 얼굴에 힘을 주며 말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익숙하니까요.”
조금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지만 결투에 앞선 흥분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그러나 낸시는 비웃는 것 보다 훨씬 처참한 짓을 저질렀다.
“잠깐! 잠깐만요! 기사님! 잠깐만...”
그리고는 절뚝이며 혼자서 로드리고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로드리고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서 허리에서 푸세요.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됐어! 괜찮다니까!”
얼굴을 붉히고 로드리고가 꽥 소리를 쳐보지만 낸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서요!!!”
어딘지 호소력이 있고, 거부하기 힘든 어투에 로드리고는 쭈뼛거리며 검을 풀었다.
그러면서도 투덜거리는 걸 잊지 않는다.
“계집애, 괜히 지랄이야.”
하지만 그래도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도는 것이 낸시가 걱정해줘서 조금 기쁜 모양이다.
낸시는 검을 받아 들고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다치지 마요. 지금이라도....”
그 뒤에 이어질 말이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을 눈치 챈 로드리고는 얼른 말을 끊었다.
“야! 안 다쳐! 절대 안 다치니까 저기 가있어. 금방 끝나. 알았어?”
일부러 과장된 어투로 자신감을 힘껏 표출하고는 낸시가 절뚝이며 다시 멀어져가는 걸 바라본다.
그녀의 좁은 어깨와 위태위태한 걸음이 그의 기분을 씁쓸하게 만든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바닥에 침을 ‘퇴!’하고 뱉더니 발로 쓱싹쓱싹 문지르고는 이번에는 두 손으로 막대기를 잡았다.
제이미 경은 로드리고와 낸시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조금은 기대어린 눈빛으로 뒤편에 서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뭔가 응원의 말이라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저 빙긋 웃으며 눈빛에 기대를 한가득 안고는 지켜볼 뿐이다.
절로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시선을 로드리고에게 향한다.
로드리고가 제대로 자세를 잡은 것을 보고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이미 경이 말했다.
“허허! 자세만은 그럴듯하군.”
로드리고는 고개를 살짝 까딱하고는 그 말을 받는다.
“실력도 그럴듯합니다.”
“뭐, 부딪혀보면 알겠지. 조금 아프기는 할 테지만 뼈는 다치지 않게 하겠네.”
제이미 경은 나름 신경 써서 해주는 말이었지만 로드리고 입장에서는 그리 고맙게 들리는 내용은 아니었다.
어차피 쥐어 패겠다는 말이니까.
그리고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예의 차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로드리고도 삐딱하게 답한다.
“저는 그런 약속은 못하겠는데요?”
“이해하네.”
그 말과 함께 그가 움직였다.
천천히 로드리고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로드리고는 굳이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기든 지든 빨리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을 보아 어차피 로드리고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야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은가?
실컷 휘둘러보고 후회나 없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도 움직였다.
그는 자세를 낮추고 재빨리 앞으로 짓쳐나갔다.
이동과 동시에 두 손으로 막대기를 휘두른다.
어깨 너머에서부터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제이미 경의 왼쪽 다리를 향해 허공을 격한다.
그 순간 제이미 경의 눈에 이채가 흐른다.
제이경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어린아이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너무 빠르고 너무 매끄럽다.
게다가 자세도 안정되어 있다.
어쨌든 눈뜨고 그저 얻어맞을 수는 없어 그도 자신의 막대기의 궤도를 수정해 로드리고의 막대기를 쳐내려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제이미 경의 무릎을 향하던 소년의 궤도가 순식간에 바뀌어 그의 어깨를 향한다.
허공중에서 한번 휘두른 움직임을 수정해 저렇게 궤도를 바꾸는 것은 숙련된 기사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힘을 위주로 기술을 익힌 기사들이라면 숙련되었더라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걸 저런 코딱지만한 어린애가 했다고?!
말도 안 된다.
그렇지만 지금 눈앞에서 직접 보지 않았는가?
제이미 경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의 막대기를 다시 조금 위로 들어올렸다.
결국 더 이상의 궤도 수정은 없었다.
역시 우연이었던가?
제이미 경이 막대기를 맞부딪히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부딪히는 지점에 생각보다 무거운 힘이 실렸다.
그는 자신의 막대기가 조금 뒤로 밀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인상을 쓰며 다시 안정된 자세를 잡기 위해 한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로드리고는 애초에 밀어붙일 생각이 없었는지 막대기가 부딪힌 반발력을 그대로 이용해 회수하더니 한 바퀴 돌며 반대방향에 매끄럽게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제이미 경은 그 순간 깨달았다.
우연이 아니다.
이 소년은 절대로 우연히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 검사라도 저 나이 때에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상식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나는 소년의 실력에 제이미 경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미처 막대기를 회수하지 못하고 제이미 경은 다시 한걸음 물러나며 로드리고의 공격을 피했다.
다행이도 로드리고도 계속해서 공격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난다.
서로가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제이미 경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그야...로드리고죠.”
뜬금없는 제이미 경의 물음에 허접한 대답을 던져주자 재차 제이미 경이 묻는다.
“자네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야!!! 누구에게 사사 받았나? 대체 언제부터 검을 잡은 거지?”
저게 뭔 개소리야?
막대기 몇 번 부딪히고 허리라도 삐끗했나?
뭐, 늙은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흥분해서 물을 건 없잖아?
조금 전까지는 명백히 개무시하더니...
그래도 늙은이 마음은 같은 늙은이가 아는 법이지.
이런 꼬맹이하고 몇 번 투닥거리다 허리가 나가서 지는 것은 꽤나 비참할 것이다.
저렇게 눈알 빛내며 지켜보던 손녀만한 계집애도 있는데...
결국 로드리고는 노인이 조금 안쓰러워져 들고 있던 막대기로 땅을 짚고는 몸을 기대며 말했다.
“뭐...사정 봐줘서 고맙습니다.”
자기 딴에는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제이미 경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대체 저 소년은 누구란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혹시 대륙 10강 중 누군가의 제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과 같은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제이미 경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사정을 봐주지도 않았고, 이제는 봐줄 생각도 없네. 어디 제대로 한 번 해보지. 하지만 이번엔 조금 전과는 다를 것이네.”
그가 막대기를 두 손으로 잡고 제대로 자세를 잡는다.
로드리고는 도무지 제이미 경이라는 노인네가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친 늙은이! 허리 다쳤으면 그냥 찌그러져서 물러날 일이지 대체 뭐하는 거야?
꼴에 자존심은 강해서...
마침 허리 삐끗한 노인네를 흠씬 두드려 패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다.
낸시에게 레이디니 뭐니 하며 꼬리치는 것도 그렇고 저기서 헤실 거리는 계집애 거짓말에 속아서 방방 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노인네 마음은 노인네가 아는 법 아닌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로드리고는 난감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