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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84화 (8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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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조금 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제이미 경의 눈으로 쫓아가기도 힘든 속도로 휘둘러지는 막대기를 로드리고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막아냈다.

로드리고는 생각했다.

이 노인네 정말 허리 다친 거 맞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하나만 대충 맞아도 깔끔하게 뼈가 동강나 버릴 것 같은 힘이 막대기에는 실려 있었다.

그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무시무시하다.

마치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처럼 휘둘러 대는 노인을 보며 슬슬 로드리고의 마음에도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봤자 소갈딱지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인내심이지만 로드리고 딴에는 많이 참은 셈이었다.

흘끗 시선을 돌려 낸시를 살피자 그녀는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몹시도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로드리고는 슬쩍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미 인내심은 바닥났지만 장난기마저 바닥난 것은 아니었던 고로 로드리고는 일부러 위태위태한 모습을 연출해 보았다.

노인네가 너무 기운을 써대며 힘주어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은 분명 기분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낸시의 울먹이는 표정이 더 재미있달까?

제이미 경의 공격을 막으며 연신 뒤로 물러난다.

누가 보더라도 위기에 처한 모양새다.

슬쩍 시선을 주자 낸시는 입술을 깨물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하여간 계집애, 역시나 속마음은 나라면 껌뻑 죽는 거지.

이런 노인네 따위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었어. 크크큭.

여전히 매서운 공격이기는 하지만 로드리고는 솔직히 전부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움직임도 어느새 익숙해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수해서 얻어맞으면 분명 아파서 팔딱팔딱 뛰겠지만...

그에 비해 제이미 경은 무척이나 답답했다.

또한 슬슬 자괴감이 일기 시작했다.

자신의 실력이 내노라하는 기사들과 자웅을 겨룰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는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겨뤄본 적도 있다.

조금 쳐지는 감은 있었지만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이제는 나이도 들어 그런 호승심도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곧 자신이 훈련시키는 젊은 기사들에게 지는 날이 올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저런 어린애에게는 아니었다.

자신이 죽는 날까지 아무리 기력이 쇠해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이미 호흡이 거칠다.

더 이상 호흡을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실력을 드러냈고,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하고 있다.

심지어 거의 방어도 생각하지 않고 밀어 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소년의 방어를 도무지 뚫을 수가 없었다.

그래...어쩌면 나는 그동안 천재 검사라는 말을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괴감을 느끼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자들이 실제로는 그리 대단한 자들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그건 꽤나 슬픈 일이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자신의 가치는 몇 단계나 아래로 강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슴이 쓰려온다.

나는 저 나이 때에 대체 뭘 하고 있었던가?

고만고만한 녀석들끼리 검술을 배우며 알량한 실력에 우쭐해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스승님께 칭찬받고 기고만장해서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너도 잘하는 편이야.’

물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걸 생각하자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 거렸다.

대체 누가 있어서 이런 녀석을 키워낼 수 있을까?

어머니 뱃속에서 검을 쥐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이럴 수 있을까?

제이미 경은 생각했다.

지금 쥐고 있는 것이 검이었더라면 마나를 불어 넣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린 녀석이라면 결국 마나를 다루는 실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것은 운용하는 것도, 그리고 그 절대치도 시간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그랬더라면 이정도가 내 전부가 아니라고 울부짖듯 조금 더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손에 쥐여져 있는 것은 볼품없는 막대기일 뿐이다.

마나를 불어 넣으면 순식간에 ‘팍!’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내가 저 소년을 봐주듯 말했을 때, 저 소년은 나를 얼마나 비웃었을까?

쥐구멍에라도 기어들고 싶다.

조금 자신의 자세가 망가졌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아니면 꽤 지쳤을지도 모른다.

이 나이에 전력으로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힘든 일이다.

젊었을 때와 비교해 지구력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제는 그만 두고 싶다.

내 무력감을 확인하는 이런 행위는 당장이라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쉽사리 멈출 수 없었다.

분명 형편없는 자신의 실력이 창피했지만 그럼에도 이미 저편에 묻어두었던 아니..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호승심이 다시 그를 사로잡는다.

어디...이것도!

이것도 막을 수 있단 말이냐?!

다시 온 힘을 다해 밀어 붙이는 공격들...

그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막아내는 소년...

아직 막대기를 놓친 것도, 소년에게 무릎 꿇은 것도 아니지만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졌다.

이미 한참 전에 이 소년에게 지고 말았다.

그것은 재고의 여지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꽤 오랫동안 옥죄어 오던 하나의 두려움 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항상 마음 한켠에 이런 생각이 있었다.

지금 내가 검을 가르치는 이 기사 녀석도 언젠가 나를 뛰어 넘어 내 검을 놓치게 만드는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점점 늙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을 느낀다.

점점 다가오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은 두렵고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날이 오늘이었다니...

그것도 상대는 자신이 가르치던 젊은 기사들도 아니다.

조금 전까지 어떻게든 발버둥 치던 것을 그냥 인정해 버리자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아직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년의 움직임이 바뀌고 말았다.

소년이 재차 뒤로 물러나며 그의 검을 힘겨운 표정으로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제이미 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와 비교해서 특별히 달라진 공격을 펼치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럴까?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소년을 살폈다.

그러자 소년이 간간히 그의 공격을 막으며 낸시라는 절름발이 소녀를 쳐다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럴 여유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상심이 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소년에게 공격을 퍼부어봤자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그만 두자.

온 몸의 기력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점점 느릿해지던 움직임이 갑자기 뚝 끊기고 만다.

제이미 경은 자신의 막대기로 바닥을 짚고는 자신의 체중을 실었다.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로드리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제이미 경을 살폈다.

저 노인네 왜 저래?

완전히 지쳤나?

노인네가 기력이 다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이자 로드리고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막 로드리고가 뭔가 말해서 노인을 좀 위로해 주려는 때였다.

뒤편에서 구경하고 있던 소녀가 뛰어나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 정말 대단하다! 진짜 진짜 진짜로~! 천재 검사야!!!!”

소녀는 로드리고의 손을 붙잡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마치 동화 속의 왕자라도 보는 것처럼 기쁨에 넘쳐 웃었다.

로드리고는 꽤 얄밉고 눈치 없는 계집애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귀엽게 생긴 애가 자기 좋다고 칭찬하는 말에 살짝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제이미 경을 위로해 주려던 것도 금세 잊어버린다.

“뭐...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흠! 흠흠!”

“정말로! 정말로 대단해! 그건 어디서 배운 거야?”

“...글쎄...그냥 혼자서 좀 이리저리 연습해 보다보니 하게 됐죠. 별거 아닙니다. 그냥...노인 하나 이겼을 뿐이고...자랑할 것도 못되죠.”

“아니야! 제이미 경은 우리 영지에서 가장 강한걸. 대단한 거야! 너 정말 대단한 거라고!”

“흠! 흠흠! 그런 건가요? 저는 그냥 잘 모르겠어서...하..하하하! 뭐 혼자서 하다 보니 제 실력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가씨께서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한다면 아마 대단한 거겠죠.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그렇게 로드리고가 입에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한껏 뻐기고 있을 때, 낸시는 절뚝거리며 제이미 경에게 작은 손수건을 건네고 있었다.

제이미 경은 멍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내려다보다가 고맙다고 말하고는 손수건을 받아 이마를 닦았다.

그러나 한참 기분이 좋았던 로드리고는 그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저 계집애, 뭐하는 짓이야?!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친다.

“야! 낸시, 이리 와! 뭐하고 있어? 당연히 도련님인 나한테 와서 어디 다친데 없는지 물어보고 그래야지! 하여간 너는 뭘 해야 되는지 모르냐? 응?!”

“좀 기다려요. 도련님은 괜찮아 보이시는 걸요.”

하여간 말하면 좀 들을 것이지...저 계집애는 왜 저렇게 고집이 센 거야?

시키는 건 죽어도 안하고 다른 남자한테 헤프게나 하고...

아 진짜...빡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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