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브라우닝 영지 =========================================================================
낸시는 제이미 경의 호흡이 쉽사리 안정되지 않자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부축해 드릴까요?”
그걸 보며 로드리고는 자기 이마를 탁하고 치며 소리쳤다.
“아이고~~~~! 멍청한 계집애!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다리도 온전하지 않은 애가 누구를 부축해?! 너나 잘 해! 너나 신경 쓰라고!!!”
낸시는 로드리고의 고함에 기분이 상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본다.
딱히 말은 없었지만 그녀의 심정을 전하는 것은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그녀를 이해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뭐? 왜 그렇게 봐?! 응?! 자기도 나한테 안기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그러는 거 완전 오지랖이야! 알아?! 그거 민폐라고! 네가 걸을 때, 엄청 위태위태해서 넘어질 것 같거든? 너는 너 걷는 모습 못 보니까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다 나니까 너한테 이렇게 말해주고 그러는 거야. 나도 그냥 입 싹 닫고 모른 척 하고 싶지만 그러면 남들한테 비웃음밖에 더 당하겠냐? 또 내가 그런 건 못 보지! 네가 부축해주면 제이미 경 몸무게 버틸 수나 있겠어? 그냥 땅바닥에 확하고 넘어져서 버둥거리게 되는 거야. 아이고~! 창피해! 생각만 해도 완전 창피해! 그렇지 않냐? 너도 상상이 가지? 그렇지?”
낸시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로드리고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잇는다.
“제이미 경, 걸을 수 있죠? 혼자서도 걸을 수 있잖아요?! 예?!”
흥분한 로드리고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제이미 경이 말했다.
“그럼. 걸을 수 있지. 걸을 수 있다네. 레이디, 호의는 고맙지만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괜찮아요. 하하하. 그래도 이렇게 귀여운 레이디가 걱정해주니 기분이 무척 좋군요. 이 손수건은 제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그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그건 안 되죠! 제이미 경, 얘는 손수건 그거 하나밖에 없거든요? 어서 돌려주세요. 뭐, 어떻게 보아도 레이디는 아니지만 그래도 계집애라 이래저래 쓸 일이 있으니까 그거라도 있어야 한다구요. 맞아? 아니야? 어?!”
로드리고가 윽박지르듯 묻자 낸시는 무척이나 난처해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그래요. 제이미 경...손수건은 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거...중요한 거니까...하찮은 것이지만 그래도...저희 아가씨랑 같이 수놓은 거라서...제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이미 경은 자신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펴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훌륭한 솜씨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들이 열심히 만들어 냈을 법한 조잡한 꽃무늬가 수놓아 있다.
제이미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거 내가 실수 했군. 미안하오. 레이디.”
제이미 경이 손수건을 두 번 접어서 낸시에게 내밀자 그녀는 꾸벅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그걸 받아들었다.
그러자 로드리고는 그걸 얼른 낸시의 손에서 빼앗아 들며 소리쳤다.
“이거 완전 젖었네. 킁킁! 이거 냄새도 나고...너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그러니까 내가 이거 빨아서 돌려줄게.”
“됐어요. 제가 빨면 되요. 다리가 불편한 거지 손은 멀쩡해요.”
낸시는 다시 손수건을 돌려받으려고 했지만 로드리고는 자기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으며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집 좀 피우지 마! 네가 빨아서 뭐하게?! 또 낑낑 대면서 빨려고? 좀 더 나을 때까지 좀 얌전히 좀 있어라. 너 때문에 이 도련님이 정말 피곤하다. 피곤해...”
“......”
주위에 보는 눈도 있어 낸시는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은 왠지 우울해 보였다.
그때, 아가씨라 불리는 소녀가 끼어든다.
“제이미 경,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이 애, 천재 검사가 맞는 거지? 이 애가 제이미 경 이겼다고 봐도 되는 거야? 응?”
제이미 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척이나 곤혹스런 표정이 이어진다.
하지만 소녀는 기다리기 지루한지 재차 묻는다.
“응?! 어떻게 되는 거야? 응?”
결국 제이미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졌습니다.”
“그럼?”
소녀가 다음 이어질 말을 기대어린 표정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제이미 경은 소녀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저는 아가씨를 가르쳐 드릴 수 없습니다.”
“뭐?! 어째서?! 약속했잖아?! 응?! 왜!?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소녀는 제이미 경의 커다란 몸을 흔들며 그를 닦달했다.
“저는 기사입니다. 영주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속했잖아?! 그건?! 기사는 약속 어겨도 되는 거야?!”
제이미 경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슬픈 표정으로 눈을 내리 깔은 채 서있을 뿐이었다.
옆에서 신파극을 찍든, 땡깡을 피든 로드리고는 별반 상관없었지만 기다리는 것은 무척이나 지루한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기지 않았는가?
딱히 노인을 두들겨 팬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 노인네가 성난 멧돼지처럼 씩씩 콧바람을 뿜어대며 휘둘러대는 막대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막아냈다.
그런데도 이렇게 저들 사정에 맞춰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로드리고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 더 지켜보다가 슬쩍 끼어들었다.
“저기...제이미 경? 여기 안에 들어가서 소개 시켜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괜찮은데 얘가 계속 서있다 보니 좀 힘든 것 같아서 말이죠. 보다시피 다리가 불편한 애니까...”
그 말에 낸시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직 더 서있을 만 하니까...”
하지만 로드리고는 그렇게 흘러가게 놔둘 생각이 없는지 얼른 뒷말을 이어 낸시의 말을 끊어버린다.
“무슨 소리야, 너? 아까부터 다리 아프다고 자꾸 쫑알거렸잖아? 대체 저분들 대화는 언제 끝나는 거냐고 물었으면서...”
낸시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제가 언제요?! 안 그랬어요. 정말 그런 적 없는데...도련님은 또!”
낸시가 나중에는 울상을 짓기까지 했지만 아무튼 로드리고는 자신의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제이미 경도 마침 곤란한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룰 수 있는 상황이 그리 싫지 않은지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군. 내 잠시 잊고 있었네. 자, 들어가지. 이곳 주인이라면 훌륭한 것을 만들어 줄 걸세. 목재 만지는 것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니까 말이야.”
소녀는 계속해서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제이미 경은 그 말을 듣기 전에 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로드리고와 낸시도 뒤따라 들어갔다.
소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아무튼 이야기는 나중에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허름한 건물의 주인은 대충 사정을 듣고는 가느다란 줄을 가지고 와서 낸시의 다리와 어깨까지의 길이, 팔 길이 등을 쟀다.
그리고는 그 수치를 지저분한 양피지에 기입하고는 사흘 뒤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돈은 선불이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는데, 로드리고는 주머니를 뒤지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제이미 경을 올려다봤다.
싸우기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제이미 경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얼마간의 은화를 주인의 손에 쥐어주었고, 주인은 대충 가늠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생각났는지 로드리고가 한마디 했다.
“저기, 혹시 부서질 지도 모르니까 하나 더 만들어 주세요. 아니면 한창 클 때니까 조금 더 큼지막한 거 만들어 주시던지.”
주인은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다시 지저분한 양피지에 기존의 칫수 보다 좀 더 높은 수를 기입하고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로드리고는 다시 한 번 제이미 경을 쳐다보았다.
로드리고의 두꺼운 얼굴에 질렸는지 제이미 경이 묵직한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주머니를 뒤져 셈을 치뤘다.
낸시가 로드리고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으며 그의 귓가에 뭔가 말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이렇게 말하며 그녀의 불만을 가볍게 묵살해 버렸다.
“아, 왜~? 그만 좀 흔들어, 계집애야! 정신 사납게 자꾸 왜 그래? 물주가 있을 때 아껴야지. 아니면 뭐야? 나보고 돈 내라 그거야? 응?! 그럼 좋아! 내가 돈 내고, 그만큼 네 가슴 만질까? 응? 나는 그것도 괜찮은데? 그걸 원하는 거야? 응? 앙큼하네? 우리 낸시는 얌전한 고양이 같은데? 내 말이 맞나? 응? 그렇게 내 손길이 그리워? 부뚜막에 한 번 올라볼까? 큭큭큭.”
“......”
낸시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시선을 떨군다.
제이미 경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기가 저런 애한테 졌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상심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패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다.
다만 그는 ‘큼큼!’하고 헛기침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네 명은 주문을 마치고 허름한 공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