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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86화 (86/200)

00086  브라우닝 영지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로드리고는 더 이상 이들과 볼일이 없다는 듯 간단히 작별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건 로드리고의 생각일 뿐이었다.

제이미 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보게.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아쉬움이 크군.”

아쉽기는 뭐가 아쉬워?

검만 안 들었다 뿐이지 사생결단 내려고 둘이 싸웠었는데?

로드리고는 멀뚱히 제이미 경을 쳐다보았다.

뭔가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던 모양이지만 아무 말이 없자 결국 제이미 경이 헛기침을 한차례 하고는 말했다.

“흠! 자네에 대해 좀 더 알려주었으면 좋겠네. 딱히 신분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로드리고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잠시 생각했다.

딱히 숨길만큼 대단한 신분은 아니다.

하지만 괜히 사실대로 말했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낸시를 다시 어딘가로 보내버릴 것이 분명하다.

물론, 제이미 경이 말하는 의미가 단순히 로드리고가 어느 마을 출신인지를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를 수행시켜준 이가 누군지를 묻는 거란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황혼의 기사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해줄 수도 없다.

루트를 손에 쥐고 잠들면 검의 신전에 가서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은 믿기도 힘들뿐더러 증명할 수도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로드리고는 될 수 있으면 사실을 말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이 필요할 때 주저하는 타입도 아니다.

“별로 내세울만한 그런 신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검을 가르쳐 준 분은 저도 누군지 몰라요. 그저 ‘황혼의 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제이미 경은 미간을 좁힌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명호는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렇게만 말하던가? 자네의 실력을 보건데 필히 대단한 분일 텐데 말이야. 아마도 그분이야말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신 것 같군. 어쩌면 자네가 만난 분은 대륙 10강 중 한분일지도 모르겠네.”

“그렇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로드리고도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제이미 경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능과 기회라...운이 좋았군. 정말 운이 좋았어. 뭐, 그래봤자 자네 같은 재능이라면 언젠가는 두각을 나타냈겠지. 지금도 지도를 받고 있나?”

“아니요.”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났다.

로드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낸시를 안아서 걸어가 버렸다.

아가씨라 불렸던 소녀가 뭔가 아쉬운 듯 불러 세우려 했지만 제이미 경은 소녀의 어깨를 잡고서 고개를 저었다.

“왜? 조금 더 이야기 하고 싶단 말이야.”

“이미 늦었습니다. 그만 성으로 돌아가야지요.”

“하지만!”

제이미 경은 소녀를 번쩍 안아들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려줘! 아직 더 놀다 가고 싶단 말이야.”

“안됩니다.”

“그럼 검술 가르쳐 줄 거야?”

“그것도 안 됩니다.”

“거짓말쟁이!”

“그래도 안 됩니다.”

“그럼 성에 가서 제이미 경이 꼬맹이한테 졌다고 소문낼 거야.”

제이미 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리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못할 것 같아?”

제이미 경이 무시해버리자 소녀는 협박하듯 말했다.

그러나 제이미 경은 한숨을 내쉬며 그것이 소용없는 짓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누가 믿겠습니까? 소년이 저를 이겼다고요? 그래봤자 아가씨는 거짓말 하는 레이디가 될 뿐입니다.”

“하지만 거짓말 아니잖아?”

“아무도 믿지 않으면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이 될 뿐입니다. 세상은 그런 법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거짓말도 진실이 됩니다. 머지않아 아가씨도 알게 될 일이지요. 그래서 말을 하든 일을 벌리든 시기를 알아야 큰일도 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습니다. 이참에 알아두시면 좋으시겠지요.”

“그런 이야기는 됐어. 검이나 가르쳐 줘. 아버지한테 혼날게 걱정이라면 몰래 가르쳐 주면 되잖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나는 제이미 경이랑 다르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내 입은 무척 무거워.”

“하하! 조금 전 저를 협박하셨던 분이 그런 말을 하니 쉽사리 믿기가 힘들군요. 게다가 그래봤자 제가 영주님께 불충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모르면 되잖아? 그럼 불충 아니지. 모르면 거짓말도 아닌 것처럼.”

“그런 의미로 가르쳐 드린 건 아닙니다만...”

“하지만 이런 의미로 쓰일 수도 있는 거잖아?”

“이것 참...오늘은 제 나이를 실감하게 되는군요. 도무지 나이 어린 분들을 이길 수가 없으니...”

“그럼 가르쳐 주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영 기운이 없군요.”

“졌으니까?”

“......”

제이미 경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에이~! 뭘 그 정도로 의기소침해 있는 거야? 걱정 마. 제이미 경이 내게 가르쳐 주면 내가 그 아이를 이겨줄게. 나는 틀림없이 천재 검사가 될 테니까.”

“하하! 이미 제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습니다. 굳이 아가씨께서 나서시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군요.”

“하지만 그런 아이처럼 천재는 없잖아?”

“제 생각에는 그런 아이는 어디를 가도 없을 것 같은데요?”

“여기 있잖아?”

“하아...아가씨 대체 왜 그렇게 검을 배우시려는 겁니까? 이건 아가씨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수월하지도 간단하다지도 않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위험한 일이죠. 저는 아가씨께서 굳이 이런 영역에 발을 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레이디께서 검을 배운다는 건 사교계에서도 그리 좋게 비춰지지 않을 겁니다. 제가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남자는 남자의, 그리고 여자는 여자의 무기가 있다는 것이죠. 아가씨는 아가씨의 무기를 갈고 닦으시면 되는 겁니다. 굳이 여러모로 불리한 남자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검이 좋아. 동화속의 공주님처럼 가만히 누군가가 구해주러 오기를 기다리는 짓은 못해. 나는 누군가를 구해주러 가고 싶은걸?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그렇죠. 절대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 않겠습니까? 영웅이 왜 영웅이겠습니까? 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아무나가 아니야. 비욘느 브라우닝! 고귀한 핏줄이야. 그리고 나를 충분히 가르쳐 줄 사람도 여기 있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실력은 괜찮은 편이야. 그렇지?”

“아니요. 아무것도요. 제 실력은 보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했잖아? 그럼 됐지. 제이미 경은 강해. 나는 알아.”

“하아...그래도 가르쳐 드린다는 약속은 못 드립니다.”

“약속은 벌써 했어. 다만 제이미 경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뿐이지.”

“뭐, 그렇지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죠. 아가씨도, 그리고 저도 만족할 만한 그런 방법을 말입니다. 저도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으니까요. 물론, 검을 가르쳐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제이미 경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가 막 성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이미 성은 난리가 나있었고, 시녀 둘이 비욘느를 향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비욘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다시 나가면 안 되지?”

“예. 그건 안 됩니다. 고귀한 핏줄이신 비욘느 브라우닝 아가씨, 이제 혼나실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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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는 힘차게 척척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품에 조용히 안겨있는 낸시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야! 내가 이긴 거 봤지? 뭔가 말해 봐. 어땠어? 응? 멋있었어?”

“...그냥 그랬어요.”

“하아?! 무슨 말이 그래? 솔직하게 말해보라니까?”

“솔직하게 말한 건데요?”

“그게 그냥 그랬다?”

“예.”

“내가 기사를 이겼는데?”

“할아버지셨잖아요?”

“...그래도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거든? 너는 잘 모를지 모르지만 제이미 경은 그래도 이 일대에서는...”

“봐주셨겠죠. 그러느라 그렇게 땀도 많이 흘리시고...”

“아니! 그건 아니지! 네 눈은 장식이냐? 조금도 봐주면서 싸운 거 아니거든?”

“글쎄요.”

“우와아아아~! 내가 진짜!!! 야, 하나만 물어보자. 너 그 노인네한테 관심 있냐?”

“관심이요?”

“그래...관심...”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데요?”

낸시가 맑은 눈에 의문을 가득 담고 올려다보자 로드리고는 차마 하려던 말을 잇지 못했다.

“됐어. 아무 것도 아니야. 젠장...”

“그리고...거짓말은 나빠요.”

낸시가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무슨 거짓말?”

“제가 언제 그분들 대화가 끝나는 거냐고 물었다는 거예요?”

“그거야 그냥 기다리기 그러니까 적당히 말한 거지. 너 그런 거로 자꾸 꽁해하고 그러면 안 돼. 나는 도련님이니까 체면이 있지만 너는 그냥 하녀잖아?”

“...저도 체면 정도는 있어요. 하녀지만...”

“하하하! 그 말 재밌네?”

“재밌으라고 한 말 아니거든요.”

“그래도 재밌으니까.”

“......”

“낸시, 그렇게 삐지지 마. 내가 선물이라도 하나 사줄 테니까.”

“선물 필요 없어요. 마을로나 어서 돌아가요.”

“하지만 며칠은 머물러야지. 네 목발도 기다려야 하고.”

“도련님은 그때도!...하아...됐어요...”

“야, 원래 그 제이미 경이 그러기로 약속 했던 거잖아?”

“두 개는 아니었어요.”

“아니지. 딱히 몇 개라고 정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린애처럼 굴지 마. 어른은 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 반대겠지요!”

“까칠하긴! 그래도 선물 사주면 좀 풀리려나?”

“안 풀려요! 필요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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