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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87화 (87/200)

00087  손수건  =========================================================================

로드리고는 낸시를 데리고 상점가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낸시는 아무리 농담을 걸어도 도무지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만은 자존심상 싫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것도 아닌 걸로 고집을 피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낸시를 여관방으로 데려다주고, 자기 혼자만 외출하기로 했다.

방을 나서기 전 로드리고는 낸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없어요.”

“그러지 말고. 정말 없어?”

“배 안 고파요.”

“뭐, 배고파야 먹는 건 아니잖아?”

“......”

“아! 정말.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얌전히 있어. 모르는 사람이 문 두드리면 괜히 열어주지 말고.”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로드리고는 퉁명스런 낸시의 반응에 아무래도 기분이 상했지만 더 이상 왈가왈부 하는 것도 싫어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나와 버렸다.

상점가로 향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쁜 계집애...뭐가 불만이야?

아버지가 멀리 보내버리려고 해서 같이 가출해줬고, 다리도 고쳐주려고 여행 중이고, 움직일 때 불편할 것 같으면 안아도 주는데 말이야.

이만큼 해줄 거 다 해주고 이런 취급 받다니...하여간 염치가 없다니까!

내가 바라는 게 그렇게 큰 건 아니잖아?

그냥 ‘도련님, 어린 나이에 기사도 이기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같은 감탄 한마디면 충분하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 건 하나도 없고, 매일 삐져서 퉁명스럽게 대하기만 하다니...

내가 정말 호구다. 호구야!

아! 정말!!!

로드리고는 답답한지 자기 가슴을 쾅쾅 두드려댔다.

그래도 고 계집애 다리만 생각하면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내가 참자.

그래...내가 참아.

뭐, 선물은 좋아할 테니까 괜찮은 것 하나 사다주면 되겠지.

여자야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예전에 삽 하나 사다준 것만 해도 그렇게 고이 모셔두고 좋아했었으니까 어떤 거라도 괜찮을 거야.

로드리고는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선물만 있으면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달려서 상점가까지 갔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물건들을 살폈다.

아무거나 골라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좀 더 보통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 선물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욕심을 내기 시작하자 좀처럼 괜찮아 보이는 것을 고를 수가 없었다.

여자에게 뭔가를 선물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난처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시간만 보내고 있던 때에 우연히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때,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 꺼내보니 낸시가 지니고 다녔던 허름하고 조잡한 손수건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다지 예쁜 모양새는 아니다.

천의 질도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냄새를 맡아 보자 시큼한 땀 냄새가 밴 것 같았다.

제이미 경의 체취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걸 낸시에게 줄 수는 없다.

그래! 손수건을 선물로 주자.

그게 좋겠어.

이런 건 버리고 말이야.

손수건이 뭔가 오염된 기분이라고.

그는 그때부터 찬찬히 손수건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손수건과 잡다한 장신구를 파는 상점이 있었다.

근처에 가자 주로 여자들 물품을 파는 장소라 그런지 향긋한 냄새가 났다.

주 고객들도 여자들이라 들어서기 창피했지만 그래도 낸시 기분을 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꾹 참고 들어갔다.

여자들은 물건을 고르다 로드리고를 발견하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소리에 로드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상점을 나서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을 살피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그가 고민하는 것 같자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여자가 로드리고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떤 걸 찾으시나요? 꼬마 손님?”

로드리고는 꼬마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그냥 참았다.

그리고는 좀 더듬거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냥...아는 애한테 선물하려고요. 적당한 걸로 뭐가 좋을지 잘..모르겠어서...”

“흐음...그냥 아는 애한테 손수건을 선물한다고요?”

조금은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두르고 여자가 재차 묻는다.

“...예...그냥 아는 앱니다.”

“그래도 선물이니까 아무거나는 안되겠지요?”

“그..그렇죠. 웬만하면 선물이니까 받고 나서 좋아해줬으면 합니다.”

“흐음...그럼 이건 어떤가요? 자수가 정말 예쁘지요? 장미꽃이 수놓아져 있고, 천의 재질도...자! 만져보세요. 괜찮답니다. 만져도 되요.”

로드리고는 추천받은 손수건을 만져보았다.

정말로 부드러웠다.

그리고 자수도 예쁘다.

꽤 솜씨 좋은 아낙이나 처녀가 며칠에 걸쳐 완성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마도 이거라면 낸시도 받고 나서 분명 기분이 좋아지리라.

그러나 문제는 역시나 가격이다.

“얼마죠?”

“30실버요.”

“...다른 건 없나요?”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손수건 한 장에 30실버를 지출할 수는 없었다.

로드리고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른 손수건을 보여준다.

“이건 어떠세요?”

파릇파릇 피어나는 새싹이 몇 개 수놓아져 있다.

조금 전 손수건처럼 감탄이 나올만한 솜씨는 아니다.

실 처리도 조금 엉성한 감이 있다.

그리고 천도 부드러움이 훨씬 덜하다.

그렇지만 꽤 귀엽다.

어찌되었든 지금 로드리고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손수건에 비하면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훌륭하다.

로드리고는 다시 물었다.

“이건 얼마죠?”

“3실버요. 저렴한 편이죠.”

“그럼 이걸로.”

로드리고는 주머니에서 3실버를 꺼내서 건넸다.

그때 마침, 낸시의 손수건이 같이 딸려나오자 로드리고는 그걸 여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도 좀 버려주세요.”

여자는 조잡하고 어딘지 시큼한 냄새가 나는 손수건을 보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어색한 미소로 표정을 바꾸며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검지와 엄지로 끄트머리를 조금 잡은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만지기 싫은 것 같았다.

여자가 곱게 접어준 손수건을 들고 로드리고는 상점을 나섰다.

눈높이로 들어 올려서 손수건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감돌았다.

손수건을 건네주었을 때, 듣게 될 낸시의 고맙다는 말이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자연히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조금 걸은 것 같은데 벌써 여관이었다.

그는 방문 앞에서 똑똑! 하고 한차례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좀 들리더니 문을 열어준다.

로드리고는 안으로 들어서며 낸시에게 말했다.

“이 계집애야! 아무한테나 문 열어주지 말라고 그랬잖아?! 바보야?!”

“도련님이었잖아요?”

“나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하지만 도련님이었는데요?”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고?!”

“그럼 다시 닫았겠죠.”

“우와아아아아!!! 내가 미친다! 미쳐!”

로드리고가 자기 가슴을 쿵쾅쿵쾅 두드려댔지만 낸시는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야! 잘 들어! 여기는 우리 마을이랑 완전히 달라!”

“그렇죠. 건물도 높고, 사람도 많아요. 저도 알아요.”

“알긴 뭘 알아?! 하나도 모르는데!!! 여긴 위험하다고! 우리 마을사람들같이 생각하면 안 돼!”

“......”

“알아들었어? 왜 말이 없어?!”

“...알아들었어요.”

“뭘 알았는데?!”

“다르다는 거요.”

“뭐가 다른데?!”

“...그만 좀 하세요. 자꾸 소리 지르지 말고...”

“야! 나는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또 그런 일 생기면...정말...”

“......”

“......”

순간 둘은 말을 잃었다.

로드리고는 창백하게 변한 낸시의 표정을 보고는 괜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젠장! 정말 미치겠군.

딱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난처했다.

로드리고는 무거운 침묵이 싫었다.

어서 이러한 침묵을 깨뜨리고 싶었다.

그리고 낸시의 표정도 조금 더 부드러워졌으면 싶었다.

그래서 얼른 자신이 사온 손수건을 꺼내서 낸시 눈앞에 꺼내보였다.

“야, 이거...”

낸시는 로드리고가 내미는 손수건을 쳐다보더니 물었다.

“이게 뭐요?”

“그냥 하나 샀어. 너무 고마워하지는 말고.”

낸시는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걸 펴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제 손수건은요?”

“뭐?!”

“제 손수건이요. 도련님이 빨아서 다시 돌려준다고 했던 거요.”

“아! 그거! 그건 버렸어. 새것이 생겼으니까 필요 없잖아?”

“뭐라구요?!!!”

낸시는 이례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로드리고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 계집애 대체 왜이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좋아하는 반응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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