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손수건 =========================================================================
막상 빈민가로 오긴 했지만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터덜터덜 걸음만 옮기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달려왔다.
실루엣으로 보아 어린애 같았다.
로드리고가 부딪힐 것 같아 살짝 비켜서자 조그마한 아이가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 뒤로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뒤따른다.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꽤나 신이난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몇 걸음 옮겨본다.
그때 근처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릭, 오늘 어때?”
“엘가구나? 오늘은 별로 벌지 못해서...네가 오늘은 그냥 해준다면 나야 환영이지만.”
“흥! 됐네요! 어서 집이나 기어 들어가.”
“조만간 많이 벌면 한번 찾아갈게.”
“꼭이야.”
“하하! 돈만 많으면 매일이라도 갈 거야.”
“그러니까 매일 돈이 없다는 말이네.”
“조만간 생기겠지.”
“그래. 내일은 좀 더 열심히 벌어봐. 이러다 굶어 죽겠어.”
“하하하!”
로드리고는 어두컴컴한 거리 속에서 들려온 소리를 이정표 삼아 걸었다.
이내 한 사내가 지나쳐 간다.
방금 여자와 이야기를 나눴던 남자 같았다.
남자는 딱히 로드리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갈 뿐이다.
로드리고는 곧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두워서 그렇게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달빛 아래 간간히 드러난 모습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자도 로드리고를 발견하더니 말을 건넨다.
“뭐야, 처음 보는 아이네? 새로 왔니?”
나름 상냥한 목소리였다.
로드리고는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주저했지만 여길 처음 온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처음이죠.”
“어디서 지내는데?”
“그냥 여기 저기...아무렇게나요.”
집을 나온 이후 노숙도 했고, 계속해서 이동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여자가 묻는 질문의 요지에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대답이었지만 로드리고는 앞으로 계속 볼 사람도 아니라 되는대로 대답했다.
“그래선 안 되지. 밤에는 추운걸.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야. 쉽사리 낫지 않으니까. 금방 큰 병이 되어 버려. 우리 아버지도 처음엔 감기였어. 나중엔 폐렴이었고.”
“지금은요?”
“편해지셨지.”
“아...미안해요.”
“후훗. 미안할 게 뭐야? 이미 한참 지난 일인걸.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서 그리 대수로울 것도 없어.”
“그래도...”
“오늘 지낼 곳이 마땅치 않은 거지?”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갈 곳은 있다.
다만 빈손으로 갔다가는 골치 아픈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을 뿐이다.
젠장 맞을 손수건...
“저녁은 먹었고?”
생각해보니 아직 이다.
그러고 보니 낸시도 아직 일 텐데...
그래도 시켜서 먹겠지?
아니...그 계집애 돈도 없잖아?
짐 뒤져보면 있긴 하지만 또 멍청하게 그냥 있을 것이 뻔한데...
로드리고의 대답이 늦자 그가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했는지 여자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도 아직이니까 같이 가자. 집이 근처에 있으니까 괜찮아. 오래 걸리지 않아.”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뭐, 아주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나이에 벌써부터 창녀를 찾아다닐 수는 없다.
그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돈 없어요.”
“돈은 됐어. 배고플 테니까 저녁을 대접하고 싶을 뿐이야.”
“아니, 그러니까 그걸 할 생각도 없거든요....”
여자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아무리 돈이 궁해도 꼬마 아이를 손님으로 받진 않는다고!”
“죄..죄송합니다.”
로드리고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는 사과했다.
하지만 처음 본 자기에게 왜 친절을 베푸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여자는 그래도 쉽사리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다시 로드리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자. 배고프다.”
로드리고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의 손은 따스했다.
근처에 서니 여자의 향긋한 내음이 품어져 나는 것 같았다.
정말로 여자의 집은 멀지 않았다.
집은 허름했다.
하지만 주변의 집들과 비교해 딱히 더 허름한 것은 아니었다.
집 안은 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여자는 로드리고를 테이블에 앉히고는 딱딱한 빵 한 조각을 내왔다.
그리고 불을 피우더니 뭔가를 데우기 시작했다.
냄새로 보아 스프같았다.
불빛에 비춰져 여자의 모습을 보다 세세히 볼 수 있었다.
아직 스무 살은 되지 않아 보였다.
얼굴은 나름 귀여운 편이었다.
가난한 집 여자들이 흔히 입는 옷차림에 긴 갈색머리가 단정하게 정돈되어 허리까지 내려온다.
입가는 양 끝이 살짝 올라가 자주 웃는 것을 짐작케 했다.
눈은 생기가 있는 푸른빛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여자는 그릇에 스프를 떠서 로드리고에게 주었다.
로드리고는 빵을 손으로 찢어 스프에 찍어서 입에 넣었다.
그다지 맛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먹을 만은 했다.
“이름이 뭐니?”
“로드리고요. 누나는요?”
“나는 엘가.”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여자는 맞은편에 앉아서 자기도 같은 빵과 스프를 먹으며 물었다.
“뭣 좀 찾으러 왔어요.”
“사람?”
“아니요. 그냥 물건이에요.”
“흐음...하지만 여기는 그다지 값진 물건은 없을 텐데?”
“하찮은 겁니다.”
“하찮은 걸 찾으러 왔다고? 뭣하러?”
“아...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일이 좀 꼬여서 그렇게 됐어요. 혼자 사세요?”
“응.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는 계속 혼자야.”
“얼마나 됐는데요?”
“3년 정도.”
“결혼은 안하고요?”
“훗! 난 창녀야. 알고 있잖아?”
자조적이고 슬픈 미소가 입가에 감돈다.
“하지만 예쁘잖아요?”
로드리고는 딱히 뭔가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이런 방면에서는 그리 재능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내뱉은 말이 이런 상황에 적당한 말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여자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잠시 웃고는 말했다.
“기분 좋은 말을 할 줄 아네?”
“딱히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사실이니까.”
로드리고가 콧잔등을 긁적이며 말하자 여자는 다시 한 번 ‘훗’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보다 넌 뭘 찾는 거니? 옷차림을 보니까 원래 이런 곳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손수건이요. 엄청 낡고 조잡한 거요.”
“잃어버렸어?”
“상점가에서 새것을 사서 예전에 갖고 있던 걸 버려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거 아니면 안 된다고 난리치는 애가 있어서...다시 그 상점에 갔더니 빈민가에서 가져갔다고 해서요.”
“그래서 이 밤에 여길 찾아왔다고?”
여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다.
“이래 봐도 제가 좀 강한 편이거든요.”
로드리고는 팔을 들어 알통을 만들어 보였지만 그다지 신통한 모습은 아니었다.
“여긴 다른 지역에 있는 빈민가에 비하면 사정이 많이 낫지만 그래도 익숙지 않은 사람이 밤에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될 정도는 아니야.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그래도 저 강하니까.”
“그래봤자 어린애잖아? 얼굴이 익숙한 아이들은 딱히 건드리지 않지만 돈 좀 있어 보이는 낯선 아이가 거리를 돌아다니면 다르다고.”
“뭐..어쩔 수 없죠.”
로드리고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야. 진짜 위험하다고. 오늘은 여기 있어. 내가 하룻밤 정도는 재워줄 테니까.”
“하지만 저는 손수건을 찾아야 해요.”
“이 밤중에? 대체 무슨 수로 찾는 다는 거야?”
“글쎄요...”
“후우...내일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오늘은 그냥 자. 그래도 찾는 다는 보장은 못하지만.”
“하지만...저기...손님이라도 오면...”
로드리고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하자 여자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은 쉰다고 하지 뭐.”
엘가의 부드러운 손길에 로드리고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왜 저한테 잘해줘요?”
로드리고가 잘 이해 안 간다는 듯 묻자 엘가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도울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