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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91화 (91/200)

00091  손수건  =========================================================================

“어떻게 한 거야?”

엘가는 넋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요? 피하고 때렸죠. 보지 않았어요?”

“그런 게 아니라...”

로드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대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기절한 한스의 품을 뒤져 칼집도 찾아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돈은 없었다.

“저기...이 사람 돈이 없는데요?”

로드리고의 말에 엘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스는 돈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어.”

“하! 완전 쓰레기 녀석이네.”

로드리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그를 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흘렸다.

뭔가 기특한 일을 했다는 생각과 근본적으로 이런 녀석과는 다르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엘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스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어. 그때는 나도 오빠라고 부르며 잘 따랐었는데...”

“이런 녀석 동정할 필요 없어요. 아까 하는 이야기 들어보니 부인도 있는 것 같던데...”

“응. 안나 언니랑 같이 살아. 아이도 둘 있고.”

“그런 이야기 해봤자 저는 잘 몰라요. 제가 아는 건 이 쓰레기 녀석이 여자나 패고 다니는 놈이라는 거죠.”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하하! 그럼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데요?”

“......”

“뭐,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죠. 저는 그만 가볼게요. 보셔서 알겠지만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니까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는 없죠. 저녁 값은 치른 걸로 해주세요.”

로드리고가 떠나려고 하자 엘가가 말했다.

“기다려! 밤도 깊었고...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가.”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는 사람 있으니까 오늘은 그냥 갈래요. 그보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하죠?”

엘가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좀 거들어 주겠어? 한스 집까지 데려다 주고 싶은데...”

“멀어요?”

“글쎄...좀 미묘하네.”

로드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한스를 어깨에 짊어졌다.

“혼자서 괜찮겠어?”

엘가가 물었지만 로드리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거뜬하죠.”

로드리고는 엘가와 나란히 걸었다.

시끄럽게 소리치며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엘가는 아무 말도 없이 걷는 것이 답답했던지 입을 열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야?”

“아...그런 애 있어요. 말해줄 만한 그런 애 아니니까...별로...”

“말하기 곤란해?”

“아니...그런 건 아니고...그냥 하녀예요. 별거 아닌 애요.”

“하녀?!”

엘가는 깜짝 놀라 로드리고를 쳐다본다.

“왜요? 뭐, 잘못됐어요?”

엘가의 반응에 오히려 로드리고도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지만 하녀라니...그럼 로드리고는?”

“아! 그냥 시골에서 좀 사는 집이에요. 별거 아닙니다.”

“그래도...좋겠다. 그럼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뭔가 답해야 했지만 좀처럼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녀 다리를 고쳐주러 집을 뛰쳐나왔다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애라고 말하기 전이었다면 사실대로 말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뱉어낸 말이다.

주저하는 그를 보고 엘가는 혼자서 뭔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수행 같은 거 하는 거야?”

아마도 로드리고가 한스를 손쉽게 쓰러뜨린 것 때문에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뭔가 생각하기도 귀찮아서 로드리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렇죠. 뭐.”

“그럼 기사가 되려고?”

“기사요?”

“응! 기사!”

뭔가 엘가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어둠 속에서도 로드리고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딱히 기사가 된다거나 그런 건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지만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니 뭐니 해도 기사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력이고, 로드리고는 그 부분에 한해서는 히든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나?”

“기사가 되면 좋겠다.”

“왜요?”

“기사는 멋있으니까. 로드리고는 될 수 있을 거야. 아직 어린데도 이렇게나 강하고. 곤란한 상황에 도와주기도 하고...분명 아름다운 아가씨들에게 사랑받는 멋진 기사가 될 거야.”

로드리고는 얼굴이 화끈 거렸다.

“하..하하...그럼 기사나 될까요?”

“...응!”

엘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고 나서 한 집을 가리켰다.

“저기야. 한스네 집. 잠깐만.”

엘가는 뛰어가서 집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뭔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로드리고가 문 앞에 다가가자 엘가는 어떤 여자를 안아주고 있었다.

그 여자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곧 그 여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입술은 찢어져 있고, 눈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가난에 찌들고, 폭력에 휘둘린 흔적이 뚜렷하다.

“안으로...”

여자는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허름한 집안도 온갖 물품이 흐트러져 있고, 몇 가지는 부서져 있었다.

구석에는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올려다봤다.

로드리고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씁쓸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로드리고는 한스를 바닥에 쿵 소리가 나게 내려놨다.

한스는 의식이 없는 중에도 신음을 흘렸다.

안으로 안내했던 여자가 움찔한다.

로드리고는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잡히는 동전을 꺼내자 10실버짜리 동전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더 이상 뭔가 말하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아 그 동전을 여자를 향해 던져주었다.

여자는 뭔가 날라 오자 손을 내밀어 잡으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의 헛손질 사이로 동전을 굴러 떨어져 바닥에 ‘쨍그랑’소리를 낸다.

동전은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몇 바퀴 돌더니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로드리고와 그 동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드리고는 그 표정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고마워...’

하지만 그 말에 로드리고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집은 숨 막히는 뭔가가 있다.

더 이상 조금도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엘가는 곧 뭔가 말하고 로드리고를 따라 나왔다.

로드리고가 자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이미 저만치 걷고 있자 엘가는 재빨리 뛰어서 로드리고 곁으로 왔다.

“여긴 다 이래요?”

로드리고는 짜증스런 어투로 물었다.

엘가는 잠시 생각해 보는 것처럼 뜸을 들이다 말했다.

“다는 아니야. 하지만 적지도 않지.”

“저는 이런 데 싫어요.”

“이런 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이대로 사는 거야. 누구나 꿈꾸지만 아침이 오면 다시 차디찬 침대를 짚고 일어나야 하는 걸.”

“그런 소리는 그만 해요! 한스라고 했나요? 그 녀석 죽여 버릴 걸 그랬어요.”

엘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놈은 쓰레기예요! 여자나 때리고, 창녀 돈이나 떼먹으려 하는 놈이라고요!”

하지만 여전히 엘가는 고개를 저었다.

“한스도 그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니야. 누구나 이루지 못할 꿈이 있어. 내가 예쁜 드레스를 입고 멋진 기사님과 결혼하는 꿈을 꾸는 것처럼. 하지만 그걸 이루지 못할 때, 사람은 어딘지 뒤틀리게 되는 것 같아.”

“누나는 안 그렇잖아요?!”

“아니...나도 마찬가지야. 다만...조금 다른 방향으로 뒤틀렸을 뿐이지. 나도 한스랑 똑같은걸.”

로드리고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한참동안 엘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무지 이 창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곳은 오는 게 아니었어.

돌아가자.

내가 있을 곳으로.

더 이상 여기 있다가는 내 머리가 이상해 질 것 같아.

낸시가 뭐라 하든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어.

더 이상 이곳엔 오고 싶지 않으니까.

“저 그만 가볼게요.”

“아...그래...그럼 잘 가. 좋은 기사님이 되렴.”

로드리고는 더 이상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뒤돌아 그녀에게서 멀어졌을 따름이다.

한참을 걸은 후에야 그는 뒤돌아봤다.

어둠에 가려 그가 지나온 곳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가 그 자리에 서있는 걸까?

로드리고는 머리를 흔들며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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