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92화 (92/200)

00092  손수건  =========================================================================

로드리고는 여관방 앞에 서서 잠시 주저했다.

도착하기 전에는 그저 빈민가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막상 낸시에게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하려니 망설여 질 수밖에 없었다.

양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고 이를 앙 물어 보지만 좀처럼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젠장...

더러운 천 쪼가리!!!

아~! 진짜!!!

속으로 손수건을 향해 욕설을 날려 보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몇 차례나 심호흡을 한다.

겨우 손에 힘을 주고 내키지 않는 모습으로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난다.

마루가 눌리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온다.

그리고 곧 지척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래! 이 계집애, 아까처럼 그냥 문을 열면 그것 타박하면서 어떻게든 넘겨보자.

하지만 그런 그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누구세요?”

“......”

로드리고는 예상과 다른 전개에 답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만 뻐끔거린다.

하지만 재차 낸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로드리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차마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그는 낸시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낸시가 로드리고를 보고는 말했다.

“왜 이리 늦었어요?! 걱정했단 말이에요.”

정말로 걱정했는지 그녀의 표정에 반가움과 안도감이 교차한다.

하지만 정작 로드리고는 그녀의 시선을 받기 힘들어 눈을 피했다.

“그..그랬어? 아직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닌데...뭘...”

“어서 들어와요.”

낸시가 입구에서 살짝 비켜선다.

로드리고는 쭈뼛거리다 몇 걸음 옮겼다.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을 돌릴만한 것이 좀처럼 없다.

결국 그는 눈을 딱 감고 말했다.

“저기...손수건...못 찾았어!”

낸시가 또 잔소리를 해댈 걸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녀가 손수건에 대해 물을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답답함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로드리고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손수건은 이제 됐어요. 이렇게 새것이 생겼으니까요.”

조금은 쓸쓸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웃고 있었다.

로드리고가 사준 손수건을 품에서 꺼낸 후 펴서 보여준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겨보려고 뭔가 말하고 싶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 했냐? 그냥 그거 쓰면 되지, 괜히 헛고생만 시켰다고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좀처럼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더 이상 빈민가를 헤매고 다니기는 싫었다.

조금 전과 같이 우울한 일 따위 마주하기 싫다.

그냥 여기서 한차례 고개만 끄덕여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야..그 손수건...내일은 꼭 찾아다 줄게.”

거기에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제가 괜히 고집 부렸으니까...집에 다시 가면 아가씨하고 새로 하나씩 만들어서 나눠가지면 될 거예요. 물론...이것도 소중히 하고요. 도련님 말대로 그건 너무 낡고...계속 쓰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없어도 돼요.”

차라리 화를 내고, 다시 찾아오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으리라.

로드리고는 낸시가 이렇게 나오자 도무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야! 됐어! 그냥 내가 찾는다면 찾는 줄 알고 있어! 그보다 저녁은 어떻게 했어? 먹었어?!”

로드리고는 더 이상 손수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돌렸다.

낸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아이, 진짜! 야, 뭐라도 시켜서 먹지. 또 촌티 내고 있어. 멍청하게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쫄쫄 굶고 있냐?! 바보야?! 짐 뒤져보면 돈 있단 말이야.”

로드리고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되레 언성을 높인다.

“하지만 도련님도 아직이니까...돈에 함부로 손댈 수도 없구요.”

로드리고는 차마 자기는 먹고 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별로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낸시 혼자만 시켜줄 수도 없어, 그녀를 부축해 1층으로 내려갔다.

좀 늦은 시간이라 저녁을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술 마시는 사람이 많아서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낸시는 그런 분위기가 익숙지 않은지 조금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로드리고는 비어있는 자리에 낸시를 앉히고, 적당히 주문을 했다.

늦어서 그런지 그가 시키려 했던 음식 중 일부는 종업원에게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간단한 것만 주문해야 했다.

조금 기다리자 스프와 빵, 그리고 식은 닭고기가 나왔다.

방금 먹었던 음식과 다를 바가 없어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로드리고는 그걸 낸시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야, 많이 먹어. 내 것도 전부 먹어라.”

“도련님도 드세요.”

낸시가 말했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속이 안 좋네.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먹어. 괜히 배고프다고 허겁지겁 먹다 탈나지 말고.”

“배 아프면 뒷간에 가지 않아도 되요?”

낸시의 물음에 로드리고는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말했다.

“계집애야,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너나 먹어. 밥 먹는데 똥 얘기 하지 말고. 하여간 계집애가 더럽게...”

로드리고가 인상을 쓰자 낸시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후 빵과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급하게 먹지는 않았지만 꽤 배가 고팠던지 무척이나 맛있게 먹었다.

로드리고는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리고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하루가 무척이나 피곤하게 느껴졌다.

귓가에는 웃고 떠들고, 소란스럽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하지만 이런 뒤죽박죽되어 있는 소음은 이상하게도 고요한 정적과 닮아있다.

누군가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해도 좀처럼 하나의 소리를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여전히 그의 시야는 어두울 뿐이지만 그의 뇌리에는 엘가가 떠올랐다.

그녀의 씁쓸한 미소와 목소리가 그의 텅 비어있던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다시 저편 어디론가 멀어진다.

자신의 광활하고 공허한 내부 어딘가를 잠자코 지켜보다보면 수많은 것들이 수시로 떠오르고 다시 사라져 간다.

그것은 어떠한 연관성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그의 삶과 경험과 감정이 묻어 있다.

나는 뭘 하려는 거지?

잘 알지도 못하는 창녀를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거기에 내가 있을 자리는 애초에 없었어.

나는 단지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잠시 들렸을 뿐이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말이야.

거기에서 느꼈던 감정은 그대로 두고 오면 되는 거야.

쓸데없이 내 주변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뇌리 속에는 그녀가 남아 있다.

로드리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피곤한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그의 시야에 여전히 배를 채우고 있는 낸시가 비친다.

로드리고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지금 나는 하나만 신경 쓰자.

오래전부터 내 것이었던...이제는 망가져 버린 소녀만...

그가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고 낸시가 먹던 것을 멈추고 말했다.

“왜요?”

“뭐가?”

“왜 저를 보고 웃어요?”

“글쎄? 그러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 상관없잖아?”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그럼 그냥 신경 쓰면 되겠네.”

“정말! 그만 좀 하세요.”

“하..하하! 낸시야?”

“왜요?”

“네 다리는 내가 꼭 고쳐줄게.”

“......”

낸시는 순간 로드리고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어디 아프세요?”

결국 평소 안하던 짓을 해서 그런지 낸시는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

로드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을 애써 내리 누르며 말했다.

“이놈의 계집애가 정말!?”

“괜히 이상한 소리 하니까 그렇잖아요?”

“나는 너 생각해서 해준 소리야!”

“...저는 이제 괜찮아요. 어서 집에나 갔으면 좋겠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밖에 없어요. 아가씨도 보고 싶고...주인님과 마님도 보고 싶고...마을 사람들도...”

“갈 거야! 계집애가 집에 무슨 황금 송아지라도 묻어놨나? 야, 근데 거기 가봤자 너 금방 다른 마을로 가야 하는 거 알고 있지? 근데 왜 그렇게 집에 간다고 하는 거야? 나는 당최 이해를 못하겠다. 거기 가봤자 네 자리는...젠장...됐다. 됐어.”

로드리고는 뒷말을 흐렸다.

이미 그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집을 그리워한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슴은 쓰리다.

이후로 더 이상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낸시는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로드리고는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끔씩 시선을 돌려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칠 것 같으면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괜히 시비 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낸시가 식사를 마쳤을 때, 로드리고는 그녀를 익숙하게 부축해서 계단을 올랐다.

울적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하고 싶어 농을 걸었다.

“야! 너 얼마나 먹은 거야. 아이고~무거워~!”

“......”

하지만 낸시는 아무 대꾸도 않고 고개를 휙 하고 돌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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