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3 손수건 =========================================================================
밤이 깊어지면 노곤한 몸은 잠자리를 찾아든다.
여전히 아래층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지만 사위는 캄캄하다.
옆에선 낸시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둡지만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이끌려 낸시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걸 볼 수 있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그것을 보노라면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조금 부풀었다가 다시 힘없이 쓰러져 간다.
쉴 새 없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움직임이다.
로드리고는 그것이 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낸시의 다리가 불구가 되어 버린 일도 큰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라몬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한스가 마누라를 패도, 혹은 엘가를 겁탈하듯 안고 값을 치루지 않아도...또 로드리고가 앉아서 식사를 했던 그 허름한 집 문을 소리 나게 쾅 닫고 나와 버려도 아주 먼 곳의 이야기처럼 생각되었다.
그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가족도 잊고, 황혼의 기사도 잊는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아주 멀리 아득한 여운만을 남기고 오래도록 뭔가를 기억해 내려 해도 단편적인 것 말고는 떠올릴 수 없다.
이곳엔 나와 낸시만 있다.
마치 그와 낸시가 이 방에 들어선 순간 누군가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 것 같았다.
멀리서 시끄럽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들리지만 그것도 꿈결처럼 흐릿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 소리는 낸시와 내가 있는 이 공간을 방해하지 못한다.
달빛에 비춰진 낸시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다.
가지런한 눈썹과 앙 다문 입술.
어려서 그런지 아직은 조금 낮은 코.
매끄러운 뺨과 가느다란 목.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귀여웠다.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평소에 보게 되는 그녀의 표정은 발견할 수 없다.
거기에는 비어있는 얼굴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공백.
아니...공백이란 의미는 어쩌면 평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표정이 담고 있는 단 하나의 의미는 그것이다.
애써 참는 표정, 찌푸린 눈살도 없고, 토라진 표정도 없다.
거기엔 고단한 하루를 보낸 소녀의 평온이 있을 뿐이다.
로드리고는 손을 내밀어 낸시의 얼굴에 손을 대본다.
그녀는 잠결에도 뭔가를 느꼈는지 잠시 몸을 뒤척이지만 이내 잠잠해진다.
로드리고는 낸시의 부드러운 얼굴 피부를 찬찬히 느꼈다.
가만히 손을 대고 있을 뿐인데도 그의 가슴은 빠르게 뛰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그녀의 촉감과 체온이 보다 뚜렷해진다.
마치 그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분 좋았다.
근래 들어 이런 기분이 들어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한동안 다시 숨을 들이 쉬지 않았다.
그대로 그 순간에 빠지고 싶었던 것일까?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이 좋을 뿐이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익숙하고도 아련한 소녀의 얼굴과 몸과 호흡과 체취를 감상하며 로드리고는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해온 여자의 흔적을 찾아본다.
시간이 지나면 매끄러운 이 얼굴에 하나 둘...주름이 가겠지.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소녀의 서서히 나이든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하나...하나...다시 하나...
주름이 잡히고, 머리가 하얗게 새어 간다.
반듯하고 뚜렷하던 이목구비는 그 형체가 서서히 희미하게 변한다.
가끔씩 웃던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뒤를 이어 고집스런 표정도 떠오른다.
어떤 일에도 이를 앙 물고, 억척스레 일하고, 뒷바라지 하는 여인의 모습이 쉬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다시 사라져 간다.
로드리고는 자신과 한평생을 함께 해준 그 나이 많은 노파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다시 낸시의 얼굴을 손을 가져다 대고,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그 형태를 만져본다.
마침내 그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보다 그녀를 느끼고 싶다.
그 충동은 서서히 그리고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그의 가슴은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그의 귓가에도 들릴 만큼 거센 소리를 냈다.
로드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듯이 누워있는 낸시의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정면에서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무척이나 탐스러워 보였다.
마치 자신을 손짓해 부르는 것 같다.
마침내 로드리고는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가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막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지려는 그 순간, 로드리고는 낸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 위에 맺혀진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을 잃고 둘은 한동안 서로를 관찰했다.
모든 것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도 그 순간만큼은 그의 귓가를 스치지 못했다.
낸시의 눈동자에 의문과 당황, 그리고 적의가 뚜렷하게 떠오른다.
로드리고는 그제야 다시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허리가 당겨온다.
그의 팔도 다리도 비명을 질렀다.
더 이상 이 자세로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그는 애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허리를 펴서 기지개를 폈다.
“아이고~! 아~! 오늘은 좀 결리네. 아...정말...”
낸시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로드리고를 노려봤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시선을 피하며 계속해서 기지개를 폈다.
대체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어둠속에 묻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잘 찾지도 않던 신을 찾으며 마음속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하지만 밤에는 신도 자는지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방금 뭐에요?”
이런...낸시 계집애, 이런 경우엔 상대방을 배려해서 그냥 모른 척 넘어가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 거냐?
오히려 속으로 낸시를 비난하며 그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로드리고는 대답을 미루며 잠시 생각해 보더니 뭔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뭘? 뭔가 있었어?”
낸시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자기 가슴 부위까지 확실히 가린다.
그래봤자 가슴도 거의 없지만 서도...뭔가 로드리고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행위로는 시기적절했다.
“그러니까 방금...제...”
그녀는 차마 스스로 말하기는 민망했던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둠속이라 잘은 알 수 없지만 얼굴도 분명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리라.
로드리고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얼른 말했다.
“뭐? 잘 안 들리네. 야, 중요한 일이야? 오늘 피곤한데 그만 자자. 아우~피곤해. 후아암~!”
로드리고는 얼른 낸시에게서 등을 돌리고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채 눈을 감았다.
낸시는 더 이상 로드리고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잠을 청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낸시가 자신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낸시와 마찬가지로 로드리고도 잠을 잘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져 갔고, 기억할 수 없는 어느 깊은 밤, 낸시도, 그리고 로드리고도 겨우 잠이 들었다.
--------------------------------
짹! 짹!
창 밖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참새의 노랫소리에 로드리고는 눈을 떴다.
옆을 보자 낸시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눈이 퀭한 것이 간밤에 푹 자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낸시가 눈치 채기 전에 얼른 눈을 감았다.
젠장...뭐라고 해야 할까?
답이 없다.
그렇게 시간은 마냥 흘러갈 뿐이었다.
-------------------------------------
어느새 시간은 흘러 정오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거리를 지나는 행렬이 있었다.
번쩍이는 갑옷과 커다란 군마를 탄 행렬이었다.
행렬의 선두에는 콧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와 꽤 잘 생긴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린! 허리를 펴! 평민들이 보고 있지 않으냐?!”
소년은 중년 사내의 호통에 놀라 움찔 하고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 한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그 순간 평민들이 네놈을 구설수에 올리고 웃음거리가 되는 거다. 그런 여지도 남기면 안 돼!”
“아..알겠습니다. 아버지.”
중년 사내는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소년을 노려보더니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한다.
하지만 사내의 말은 여전히 이어졌다.
“브라우닝 가문은 근방 최고의 곡창지대다. 세력도 꽤 크다고 할 수 있지. 우리는 여기에 놀러온 것이 아니다. 명심해라.”
“하지만 아버지 저는...”
“그만! 약한 소리 따위 들으려는 게 아니야! 이대로는 그동안 고생해 키워온 가문의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자멸할지도 모른다. 브라우닝 가문의 힘이 필요해. 자작이 군량을 대주기만 한다면 이 일대는 물론, 더 멀리까지 세력을 뻗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너도 알다시피 결혼이다.”
“......”
에린이라 불린 소년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아버지의 말에 뭐라 토를 달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