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94화 (94/200)

00094  손수건  =========================================================================

“하하하! 크레이머 남작 오랜만이군.”

브라우닝 자작은 남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작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자작과 악수를 나눴다.

“자작님,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는 남작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작이 말했다.

“과한 예는 되었네. 그보다 자네 가문의 기사들인가? 눈빛을 보니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군. 부럽군, 부러워.”

“아직 멀었습니다. 그리고 자작님께는 제이미 경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히려 자작님이 부럽군요.”

“하하! 이 사람. 물론 제이미 경은 내 보물이지. 하지만 자네의 명성도 제이미 경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데 뭘 부럽다 말하나? 이렇게 듬직한 기사들도 있고 말이야. 응? 이 소년은 누군가? 아주 훤칠하군.”

크레이머 남작은 기다렸다는 듯 에린을 손짓해서 곁으로 불렀다.

“제 아들놈입니다. 이참에 소개시켜 드리고 싶어 이렇게 데리고 왔습니다. 어서 인사드려라.”

에린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며 말했다.

“에린 크레이머입니다. 이렇게 브라우닝 자작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작님, 이런 저런 이야기로 의중을 재는 것은 아무래도 제 성격과는 맞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아들과 자작님의 따님을 결혼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가문도, 그리고 제 아들도 자작님의 성에는 차지 않겠지만 자작님께서 한번이라도 깊이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남작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와 동시에 남작이 대동하고 온 기사들과 에린도 고개를 깊이 숙여 같은 자세를 취한다.

그 절도 있는 모습과 일사불란함에 자작은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이보게 그만 머리를 들게. 이거...나를 부끄럽게 하는군. 어떻게 자네의 가문과 이렇게 헌양한 아들이 내 마음에 차지 않을 수 있겠나? 어서 머리를 들지 못하겠나? 정말 이대로 고집을 부리면 화를 내겠네.”

남작은 그제야 머리를 들었다.

기사들과 에린도 조금의 시간차를 두고 머리를 든다.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신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남작이 재차 묻자 자작은 미소를 지으며 비욘느를 떠올렸다.

그 순간 그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어정쩡한 형태를 보이며 굳어버린다.

하루라도 말썽을 부리지 않고는 지나가는 날이 없는 발랑 까진 딸내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준다면 그나마 귀여운 외모로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호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입을 벌려 한마디라도 꺼내면 그 능글맞고 철없는 표정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어마어마한 갭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남작은 아무것도 몰라서 이런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꺼낸 것일 테지만 실제로 비욘느를 보게 된다면 과연...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조건 좋다고 절대로 무를 수 없다고 계약서라도 작성하고 싶었지만 이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작을 보건데 무척이나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이다.

물론, 좀 더 크면 비욘느가 달라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매년 자작의 소망에 불과했다.

해가 지날수록 도가 점점 심해지는 딸내미를 보건데 자작은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어 오지 않았던가?

기어코 검을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매일 기사들 훈련장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딸을 생각하건데 정말로 그의 눈을 피해 언젠가는 검을 배우고 집을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아예 시집을 보내 버리면 그의 근심거리도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만 된다면 딸내미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미 시집가버린 남작 가에서 모두 책임져야 하는 문제다.

그 순간부터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의 책임은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자작은 비욘느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가 결혼해 행복한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남자가는 그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남작은 바른 사람이었고, 능력도 있었다.

일대에선 꽤나 유명한 기사단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자가 아들을 허투루 키웠을 리 없다.

자작의 망설임을 보고 남작은 그가 거절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자신을 생각해서 기분이 상하지 않게 고심하는 것 같았다.

남작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의 영지는 파산 직전이었다.

기사단을 양성하고 그 실력을 키우는 데 너무 많은 재산을 탕진해 버렸다.

물론,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지금 그의 곁을 보좌하는 기사들을 보라.

아직 젊은데도 불구하고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뽐낸다.

하지만 실력은 실력이고 돈은 돈이다.

하루하루 밀려드는 채무상환 독촉에 그의 피는 말라가고 있었다.

당장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돈을 빌려달라고 구걸할 수도 없었다.

일단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그것보다도 영지가 위태롭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영주들은 그를 만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절대로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과 같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상들이 일궈온 가문의 모든 것을 이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간다.

곁에 기사들만 없었어도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자작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으며 겉으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자작이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일단 먼 길을 왔으니 좀 쉬게나. 이 이야기는 좀 더 생각을 해보지. 가문의 미래가 달린 일이지 않나? 우리 모두 성급한 판단을 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괜찮다면 말이야...그게...자네하고 저녁 식사 후에 둘이서만 잠시...좀 이야기하고 싶군.”

남작은 가슴이 무척이나 쓰렸다.

거절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자작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체면을 차려주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작은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남작과 기사들이 물러가자 자작은 땅이 꺼질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힘없이 앉아 온몸에 힘을 빼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비욘느를 생각했다.

뭐라 말해도 분명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분명한 표정으로 다리를 떨며 그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딸내미...

다시 머리에 열이 올랐다.

안 된다.

안 돼...

그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서둘러 딸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

남작은 기사들을 각자 배정받은 숙소에 들게 했다.

오랜 여행으로 지쳐있을 그들에게 격려와 함께 휴식을 명했다.

저녁 식사가 있기 전까지 시내를 돌아다녀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기사들이 떠나고 곁에 덩그러니 남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몹시도 긴장한 표정으로 남작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순간 남작은 울컥하고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연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에린! 왜 시선을 피하는 게냐?! 응!? 사내가 되어서 그게 뭐하는 짓이야?! 그래서 내 뒤를 이을 수 있겠느냐!?”

“죄..죄송합니다.”

에린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이미 기분이 틀어져 버린 남작에게 있어서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나보다.

“멍청한 녀석! 대체 네놈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네 나이 때는 이미 영지 일의 전반을 맡아서 아버지를 도왔단 말이다. 그런데 네놈은 아직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자작님 앞에서도 분명 그런 얼빠진 표정이나 짓고 있었겠지! 언제쯤 되어야 정신을 차리려고 그 모양이냐?! 내가 자작님이었어도 너 같은 놈에게 귀한 영애를 내어 주지는 않겠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거냐?! 엉?! 검술을 제대로 할 생각이나 있는 것이냐?! 억지로 하려거든 당장 그만두고 가문을 나가거라! 차라리 제대로 된 녀석을 양아들로 거두어들이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 말이야!!!”

“저..저는...”

에린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다.

힘들어도 꾹 참고 검을 휘둘렀다.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심지어 고열에 시달려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그가 그렇게 참으며 열심히 한 데에는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마음도 분명 있었지만 그 못지않게 언젠가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시지 않을까하는 기대와 소망 역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얼굴도 알지 못하는 브라우닝 자작가의 영애와 결혼을 하라는 아버지의 강요에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자신이 많이 긴장했다는 것은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작을 만나 그가 자신을 형편없게 생각할 정도로 큰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행동에 각별히 신경 썼다.

다만 자작이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고, 또 아버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엄한 아버지를 둔 자녀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딱히 에린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이성이 완전히 사라진 마당에 남작에게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줬으면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찌되었든 마침내 참고 참아온 에린의 눈에서는 섭섭함과 자괴감으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뚝뚝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을 보고 남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붙잡고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뭐하는 게야?!!!!!! 계집애처럼!!!!!!!!!!!!!!!”

남작의 호통에 에린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아보지만 찢어질 것 같은 가슴의 통증과 함께 다시 왈칵 하고 더 많은 눈물이 솟아날 뿐이다.

“아..아버지..저..저는...정말...아버지....”

에린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며 뭔가를 호소하려 했지만 격한 감정으로 인해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작의 화를 더욱 돋울 뿐이었다.

마침내 남작은 손을 들어 에린의 뺨을 호되게 때렸다.

에린은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에린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시야가 눈물에 가려 흐릿하다.

남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당장 눈물을 멈춰라. 더 이상 내게 너에 대한 평가를 낮추는 짓 따위 하지 말란 말이다! 형편없는 자식...이날 이때껏 네놈의 평가가 더 낮아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늘 아주 나를 놀래 켜 주는 구나. 우리 가문 남자는 울지 않는다. 절대로 울지 않아!!!”

남작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에린은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호흡에 맞추어 흐느끼는 소리가 계속해서 새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