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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95화 (95/200)

00095  손수건  =========================================================================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린은 한순간 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그에게 욕설과 협박을 늘어놓던 남작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방을 나서며 말했다.

“그런 추한 꼴을 하고선 절대로 방 밖에 나올 생각 따위 하지 말거라. 혹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아무리 네 녀석이 내 아들이라도 죽이고야 말겠다!”

쾅!!!

에린은 바닥에 앉아 한참을 흐느꼈다.

그 스스로도 울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창피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토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외로웠다.

텅 비어버린 커다란 방에서 그는 홀로 남겨진 것이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가끔씩 울음을 참는 꼴사나운 사내아이의 흐느낌만이 귀를 스쳤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께서 자랑스러워할만한 아들이 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펴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두 눈에 맺혀 있는 눈물로 흐릿했다.

그는 소매로 자신의 눈물을 닦아냈다.

시야가 다시 살아난다.

굳은살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손바닥이 보였다.

그동안 그가 참고 견뎌온 모든 시간이 손바닥 안에 축적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바닥에서 어떠한 가치도 발견 할 수 없었다.

노력은 그에게 아무런 것도 되돌려 주지 않았다.

그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속에서 끊임없이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다.

이제는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다.

그는 자신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이대로 죽자.

나는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다.

아버지의 눈빛을 견딜 수 없다.

기사들의 시선을 받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자신도 없다.

아무리 연습해도 기사들과 발맞춰 겨우 비슷하게 움직일 따름이다.

그는 검을 뽑았다.

서늘한 기운이 검날에서 뿜어져 나온다.

익숙한 손잡이를 잡고 자신의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

이것이 아버지와 나를 위한 길이다.

내가 사라지면 아버지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이 재능 있는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게 하실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최선이지 않을까?

살짝 검에 힘을 주었다.

쓰라린 감각이 신경을 통해 전해져 온다.

자신의 검날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뚝뚝 소리를 내며 바닥을 적신다.

손잡이를 잡은 자신의 손도 핏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내 생명을 꺼지게 된다.

그 순간 다시 왈칵 하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허무했고, 슬펐다.

이 순간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서러웠다.

아무도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괜찮다고 두드려주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온 것일까?

그는 눈을 감고 한참을 기다렸다.

하지만 도무지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답도 그에게 던져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숨이 거칠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검날의 그의 목에서 떼어 옆으로 던져 버렸다.

“하악...하악...”

거친 숨소리가 사정없이 그의 고막을 흔들었다.

아직도 떨려오는 손을 목으로 가져다 대었다.

뜨거운 피가 만져진다.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방에 비치되어 있는 거울 앞에 섰다.

겁에 질려 얼굴이 파랗게 변해 버린 소년이 보였다.

눈은 공허하고, 입술은 떨린다.

목에서부터 흘러내린 핏물이 옷을 적시고 있다.

손도 붉었다.

이마에서부터 끊임없이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아직도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을 바라본다.

그래...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본 것이다.

형편없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 형편없다.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지어 본다.

그의 눈에 비치는 뒤틀려 올라간 입술이 어색하다.

가슴이 아팠다.

지금까지 가끔씩 느껴왔던 격한 통증이 가슴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간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조금은 자신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몇 번의 심호흡으로 그는 훨씬 편해지는 걸 느낀다.

걸음을 옮겨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어루만져 주었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던 모양이야.

아버지께서도 진심이실 리 없어.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는 걸.

다 내가 잘되라고 그러시는 거야.

하지만 내가 계속 못난 모습을 보이니까 정신을 차리라는 뜻에서 화를 내신 걸 테지.

괜찮아.

다시 힘을 내보자.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분명히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누가 뭐래도 나는 아버지의 후계자인걸.

엄하면 엄할수록 그건 아버지의 사랑이 그만큼 깊다는 거야.

그러니까...나는 괜찮아.

어리석은 생각 따위 하지 말자.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목에 둘렀다.

더 이상 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손과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검을 다시 검 집에 넣었다.

다시 거울 앞에 서자 겁먹은 소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붉게 물든 카펫은 하인을 불러 치울 것을 명했다.

하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유를 묻지 않고 서둘러 새것으로 교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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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낸시가 로드리고를 불렀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로드리고를 불러보지만 묵묵부답이다.

결국 낸시는 그를 흔들어 본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여전히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물론, 로드리고는 깨어 있었다.

다만 그녀를 마주하기가 난처할 뿐이다.

이쯤에서 그녀가 포기해 주기를 빌었지만 낸시는 무슨 사명이라도 된다는 듯 계속해서 끈질기게 로드리고를 깨워댄다.

“도련님, 일어나세요. 벌써 해가 중천이에요. 언제까지 자려고 그러세요? 그러다 소가 될지도 몰라요.”

“......”

“도련님?”

“......”

“도련님?”

“.....”

“아이...정말...”

그래. 계집애야 너도 다시 자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누가 이기나 해보자.

낸시는 곁에서 고민하는 것처럼 잠자코 있더니 이번에는 로드리고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도련님, 그만 일어나세요. 예? 게으름 피우면 안 돼요. 주인님이 아셨으면 분명 혼을 내셨을 거예요. 헤나로 아가씨도 이렇게 늦게까지는 안 잔다구요.”

낸시가 너무 가까이에서 말한 탓일까?

그녀의 숨결이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며 어깨를 들어 올려 반응하고 말았다.

그걸 기회로 삼았는지 낸시가 다시 그를 흔든다.

“일어났죠? 자. 이제 어서요. 예?”

결국 로드리고도 더 이상은 무리였는지 나오지도 않는 하품을 억지로 흉내 내며 말했다.

“아우~! 뭐야? 이럴 때라도 좀 제대로 자야지.”

“그치만 벌써 아침이 한참 지났다구요.”

“야, 괜찮아. 그런다고 세상 안 망하거든? 왜? 배고프냐? 그럼 먹으러 갈까?”

“아..그리고 어젯밤에...”

순간 로드리고는 눈에 띄게 당황해서 말했다.

“뭐!? 응?! 밤에 뭐?! 무슨 일 있었어?! 응?! 아, 어젯밤은 요리도 다 대충이고 별로 맛 없었지? 아침은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사줄게. 자 내려가. 내려가. 응? 아! 안아줘야지!”

“그게 아니고, 어젯밤에...”

“뭐가? 아! 오줌 마려웠어?! 나 깨우지 그랬어?! 응?! 한참 참았냐?! 자! 서둘러! 서둘러! 많이 급해? 그래서 그렇게 나를 깨웠구나. 내가 다 이해하지. 침대에 싸버리면 큰일이니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럼 뭐!? 똥?! 어? 괜찮아. 괜찮아. 똥 마리면 역시 깨워야지. 그런 걸로 창피해 하고 그러면 안 돼. 다 생리적인 현상이고, 너는 또...그러니까.. 아! 환자! 그치! 환자는 다 용서되는 거야. 괜히 참다가 방귀만 엄청 껴대고 그러는 게 더 창피한 거다, 너? 킁킁! 아 그러보니 너 꼈니? 좀 냄새 나는 거 같은데?”

“아..안 꼈어요!!!”

낸시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누가 봐도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다 이해해. 나 그런 걸로 흉보고 그런 사람 아니에요! 여자애여도 그건 어쩔 수 없지. 내가 또 여자애는 똥도 안 싸고, 오줌도 안눈다고 생각하는 그런 무식하고 몰상식한 사람 아니니까 너도 좀 더 날 편하게 대해서 말이야...그러니까...”

“그...그런 거 정말 아니란 말이에요!!!”

낸시가 얼굴이 새빨갛게 돼서 로드리고의 말을 끊어버렸다.

아무튼 그녀가 더 이상 뭔가 말하려는 기색이 없자 로드리고는 그제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겉으로는 만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알았어. 그냥 배고픈 거지? 그럼 내려갈까? 응?”

로드리고가 번쩍 안아든 낸시의 표정에는 여전히 미심쩍고 불만스런 기색이 역력했지만 더 이상 어젯밤 일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녀도 더 이상 로드리고가 중얼거리는 창피하고 이상한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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