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96화 (96/200)

00096  손수건  =========================================================================

로드리고는 낸시와 가볍게 식사를 했다.

아침 식사 시간을 한참 넘겼지만 어제 저녁과는 다르게 안 된다고 말하는 메뉴는 없었다.

한참 점심시간을 준비하고 있어 문제될 게 없는 것 같았다.

식사 후 로드리고가 배를 두드리며 손수건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낸시는 이제 되었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로드리고는 다시금 고집을 부렸다.

그는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려대더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오후에 돌아오면 여기저기 구경이나 가자고 말했다.

낸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야, 그래도 혹시 늦을지 모르니까 얼마 안 되지만 받아 둬.”

“됐어요.”

“늦으면 또 쫄쫄 굶으려고 그래?! 그냥 받아 둬, 좀!”

억지로 낸시 손에 쥐어주고는 서둘러 여관을 나섰다.

잠시 상점에 들러 과일을 샀다.

어제 저녁까지 대접받은 마당에 빈손으로 가기는 민망했기 때문이다.

허름한 집들을 지나 기억을 더듬었다.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겨우 기억해 냈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기다리자 곧 문이 열렸다.

엘가였다.

아직 자는 시간이었는지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눈에는 눈곱도 끼어 있다.

옷차림도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로드리고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곧바로 문을 닫아버리며 말했다.

“왜...왜 여기 있는 거야?!”

로드리고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을 골라봤지만 이미 그녀가 알만한 내용이었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보다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거야?

“저..손수건 찾는 거 도와준다고 해서...”

“그..그건 그만 둔 것 아니었어? 어제 그대로 돌아가 버렸으니까...저기...분위기가...그러니까...아무튼 조금만 기다려봐.”

안에서는 이사 준비라도 하는지 끊임없이 소란스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로드리고는 엘가의 모습이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설마 나를 의식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이런 어린애 몸뚱이인데...

원래 흐트러진 모습 보이는 거 싫어하는 걸지도 모르지.

아무튼 기다리다 지쳐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로드리고 또래에서부터 더 어린 애들까지 몇 몇이 기웃거린다.

그가 답례로 가지고 온 과일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윈 얼굴들이 조금 안 되어 보여 과일 하나를 녀석들 쪽으로 던져 주었다.

용케 사내아이 하나가 받아서 고맙다는 말도 없이 멀리 뛰어갔다.

그 뒤로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따라간다.

곧 문이 열렸다.

엘가의 헝클어져 있던 머리부터 옷차림까지 어젯밤 보았던 대로 정리되어 있다.

단정한 느낌이다.

약간 뺨은 붉지만 역시나 귀여운 얼굴이다.

로드리고는 과일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답례예요. 어제 얻어먹었고...또 그렇게 멋대로 가버려서...”

“고..고마워.”

하지만 좀처럼 엘가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로드리고는 기다리다 결국 물었다.

“저기...잠시 들어가도 되나요?”

“어..어?! 아니...지금은 좀 고..곤란해.”

“왜요?”

로드리고는 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슬쩍 까치발을 서서 들여다보려 한다.

하지만 엘가가 얼른 자기 몸으로 그 시선을 막아 버린다.

“소..손수건 찾으려는 거지. 따라와. 도와줄게. 빠른 편이 좋잖아?”

엘가는 과일도 그대로 손에 든 채 문을 닫고 거리로 나섰다.

로드리고는 앞장서 걷는 그녀를 말없이 따라갔다.

그녀는 멀리 어린애들이 모여 놀고 있는 걸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빈민가 아이들이 가져갔다고 그랬지?”

“예. 그랬죠. 상점에서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어요.”

“그럼 애들한테 물어봐야지. 그게 가장 간단해. 이미 망가져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온전한 채라면 손수건을 가지고 있는 아이한테 보상해 줘야해. 그렇지 않으면 주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억지로 빼앗는 방법도 있지만. 어쩔래?”

“보상해주는 편이 좋겠네요. 딱히 저런 애들한테 멋대로 빼앗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궁핍한 건 아니에요.”

“그럼 일이 더 쉽지.”

엘가는 손짓으로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주저함도 없이 그대로 엘가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로드리고가 가져온 과일을 몇 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로드리고에게 찾고 있는 손수건을 설명하게 했다.

로드리고는 어느 상점에서 가져온 천조가리 중에서 손수건이 있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져오면 적당히 보상해 주겠다고 말하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뛰어갔다.

“찾을 수 있을까요?”

“모르지. 하지만 네가 찾는 것 말고 다른 걸 가져오는 아이들은 분명 있을 거야.”

“그런 건 필요 없어요.”

“하지만 원래 필요한 것만 얻게 되는 것 아니야. 뭔가 얻으려면 시행착오가 필요하니까. 곤란한 것들도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해. 나라고 항상 형편 좋은 손님만 받는 건 아니니까.”

“어제 같이요?”

엘가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그리고 로드리고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드리고는 살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이 거리를 걸었다.

주변 경관이야 솔직히 볼 것이 없었다.

괜히 빈민가가 아니다.

하지만 옆에 꽤 귀여운 성인 여성과 손을 잡고 걷노라니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손이 가늘고 길고 따스했다.

그가 히죽거리며 웃자 엘가가 물었다.

“왜?”

“그냥...좋아서요.”

그는 솔직하게 말했지만 엘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을 따름이다.

그녀가 남은 과일 하나를 로드리고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기도 하나를 입에 물었다.

“맛있네. 그렇지?”

엘가가 묻자 로드리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그 아저씨는 또 안 왔어요?”

“한스? 아니. 그때 이후로는 조용했어.”

“무슨 일 있으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누나도 저 도와줬으니까. 뭐..대가라는 건 아니지만...그냥...저도 도울 수 있으니까요.”

“훗! 그 말 들으니까 좋네.”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알아. 그래서 좋은 거야. 하지만 꼭 지켜주는 건 아니야.”

“저는 지켜줄 거예요. 강하니까.”

“그리고 나는 약하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그냥 농담이야. 괜찮아. 그리고 정말 고맙게 생각해. 아우~! 내가 정말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

엘가는 갑자기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는 멈추어 섰다.

로드리고는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자기가 뭔가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손을 내리고는 말했다.

“그게...너 어린애잖아?”

“그렇게 어리진 않은데요?”

로드리고가 미간에 살짝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아니..그런 게 아니라...하아...잘 들어둬. 나 말이야, 조금 창피하지만 좀 동경하게 되어버려. 정의의 기사님이나 백마 탄 왕자님 같은 거. 내가 어려움에 쳐했을 때, 짜잔 하고 나타나서 도와주면 반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어? 그렇지 않아?”

그녀의 진지한 눈빛에 눌려 로드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그런 걸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어려움에 처할 때면 항상 남자들은 위협만 해댔다고. 돈 내놓으라고 말이야. 빌려 썼으니 어쩔 수 없지만...그래서 그냥 포기해 버렸는데...네가 어제 도와줘 버렸으니까...”

“......”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로드리고가 잠자코 있자 엘가는 로드리고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두...두근거려 버렸어...”

“예?!”

로드리고가 되묻자 엘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조..조금만...그러니까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 두근거린 거야. 무..물론 난 창녀고...저기...넌 어린애고...그런 이야기처럼 사정이 좋지는 않지만...게다가...아! 몰라!”

엘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무작정 도망치듯 어딘가로 달렸다.

로드리고는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입가에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아...이거 정말...이놈의 인기는...”

어줍지 않은 말은 중얼거리며 그가 엘가를 따라 뛰었다.

“누나! 같이 가요. 하..하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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