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손수건 =========================================================================
“상점가라도 가볼래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제가 사드리고요.”
로드리고는 괜히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그래도 될까? 뭐 필요한 건 없지만...”
그렇게 둘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빈민가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사내 셋이 골목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다가 엘가와 로드리고를 발견했다.
그들은 손으로 엘가를 부르며 말했다.
“엘가 아니야? 이야, 요즘 예뻐졌네? 응?”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사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엘가의 둔부를 슬쩍 쓰다듬었다.
엘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말했다.
“지...지금은 안 돼요.”
하지만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안되긴 뭘 안 돼? 우리 셋이랑 하고 가라. 응? 저기 골목에서 잠깐 하면 돼. 돈도 있어. 자 봐. 응? 우리 셋 상대해 주면 전부 네 거야.”
“맞아. 괜히 빼지 말라고. 그래봤자 돈 더 줄 수도 없으니까.”
대머리 사내가 다가와 씩 웃었다.
그는 앞니 하나가 없었다.
사내도 별반 엘가의 말은 신경 쓰지 않고 가슴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사내의 손을 재빨리 잡고는 말했다.
“싫다잖아요?”
세 사내는 순간 꼬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엘가? 요즘 너 구멍에 거미줄이라도 핀 거냐? 이런 꼬마까지 상대해주고 있는 거야? 이거 우리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구나. 크..크크큭. 이 봐 잭슨, 주머니 뒤져봐. 아무래도 오늘은 좀 더 쳐줘야겠어. 이렇게나 엘가가 궁핍하다면 우리를 구멍 형제로 만들어준 엘가한테 미안하잖아? 우리 같은 구멍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엘가가 있어서 한 날 한 시에 같은 구멍에 오입한 은혜를 이대로 저버릴 수는 없지.”
“그럼. 그럼. 하하하. 엘가,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들면 나를 찾아오지 그랬어? 이런 꼬마가 우리 대물을 먹어준 네 구멍을 제대로 매워줄 수나 있겠어? 박을 때마다 그 헐렁해진 구멍에서 ‘푸시익~푸시익~’하고 소리가 났겠지.”
“맞아! 그래도 꼬마야, 뒷구멍은 좀 더 쓸만하단다. 개봉한지 그렇게 오래 안 되었거든.”
“아무튼 그럼 이 꼬마도 우리랑 형제인거 아니야?”
“우하하하! 그렇게 되는 건가?”
대머리 사내가 커다랗게 웃어가며 로드리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드리고는 그 손을 쳐서 떨어뜨렸지만 딱히 사내들은 그걸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그저 깔깔대고 웃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다.
엘가는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다.
“그만 가요.”
로드리고가 엘가의 손을 붙잡고 잡아끌었다.
그녀는 힘없이 로드리고를 따라 걸었다.
사내들은 딱히 엘가를 더 이상 붙잡아 두진 않았다.
그저 경박스런 웃음소리를 오랫동안 흘릴 뿐이었다.
얼마간 더 걷던 엘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그만 집에 갈래.”
로드리고도 이미 기분이 엉망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딱히 상점가에 계속 가자고 고집 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엘가를 돌려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어찌되었든 그녀가 집에 간다면 그도 같이 가야 했다.
손수건이 발견된다면 아이들도 결국은 그녀 집으로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좀 난처하긴 했지만 이대로 어정쩡한 상태로 헤어질 수는 없다.
그럼 다음에 다시 방문할 때는 그 난처함이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 분명하다.
결국 로드리고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럼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그리고 괜찮다면 잠시 쉬다 가도 될까요?”
하지만 엘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걸어가 버렸다.
로드리고는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몇 걸음 간격을 유지한 채였다.
얼마간 걸었을까?
어느새 그녀의 집이다.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드리고도 같이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녀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바로 앞에서 문이 닫혀 버려 로드리고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저기...누나?”
로드리고는 소리쳐 엘가를 불렀다.
“그만...가. 오늘은...그만...”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드리고는 안에서 흐느끼는 엘가를 상상했다.
눈은 빨갛게 충혈 되고, 쉬지 않고 어깨는 오르내린다.
두 손은 이마에 포갰다.
딱히 그가 그녀를 위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로드리고는 그녀를 위로해야 할 의무 따위는 없었다.
이대로 떠나 버려도 죄책감 따위를 가질 필요는 없다.
그래도 로드리고는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녀석들을 흠씬 두드려줘야 했을까?
하지만 나는 곧 떠날 사람이고, 그녀는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손님을 쥐어 패서 어쩌자는 거야?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쩔 수 없이 잠시 고민하다가 문 옆에 있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한낮이라 꽤 햇볕이 강했지만 그래도 조그마한 그늘이 만들어져 앉아 있을 만 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돌아가 낸시와 시간을 보내야 할지 생각했다.
그녀도 지금은 혼자 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것은 어젯밤에도 깨닫지 않았던가?
이런 하류 인생들이나 사는 곳에 있어서 어짜자는 걸까?
하지만 그는 도무지 한번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자리가 편했던 것이 아님에도 그는 그대로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그녀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로드리고가 가지 않고 그녀를 기다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스스로도 그것이 그리 설득력있는 이유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혹 이런 비슷한 일을 자신이 당했을 때, 누군가 자기에게 그렇게 해준다면 그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배에서 신호를 알린다.
슬슬 뭔가를 먹어야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낸시에겐 돈을 주고 나왔다.
그녀가 알아서 뭔가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배가 고파오자 어젯밤에 안에서 엘가와 먹었던 조촐한 먹거리가 떠올랐다.
딱딱한 빵과 스프.
그녀는 지금 혼자서 같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있을까?
바로 지척에 있음에도 그는 그걸 알 수 없었다.
가리고 있는 것은 고작 몇 센티 되는 판자와 벽돌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와 로드리고 사이의 공간을 철저하게 분리해 놓는다.
햇볕을 가려주었던 그늘이 점점 작아져 마침내 로드리고는 몸의 일부를 햇볕에 내놓아야만 했다.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다.
그의 인내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한 꼬마아이가 걸어왔다.
결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로드리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시선을 그 아이에게 맞추었다.
아이는 콧물을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인중을 타고 입술 위까지 딱딱하게 굳은 코딱지가 그대로 내려 앉아 있었다.
햇볕 아래 오랜 시간 노출되었는지 피부도 무척이나 새카맣다.
옷은 넝마나 다름없다.
몸도 무척이나 말라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살아있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입가에 앉은 미소가 사라지질 않는다.
아이는 로드리고보다 3~4살 어린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여기는 제대로 먹고 성장하는 애들이 별로 없는 곳이다.
아이는 로드리고 앞까지 똑바로 걸어와 손수건을 펴 보였다.
그가 찾던 낸시의 손수건이 분명했다.
로드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꼬마에게 3실버를 쥐어 주었다.
낸시에게 새로 사준 손수건과 같은 가격이다.
꼬마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걸어올 때와는 다르게 신이 나서 뛰어갔다.
이로써 로드리고가 이 집 앞에 더 이상 죽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적어도 합리적인 이유는 사라졌다.
이제는 감정적인 이유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다시 문 앞에 서서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