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손수건 =========================================================================
로드리고는 문을 두드렸다.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몹시 초조해졌다.
갈비뼈 속에 조용히 운동하던 울림은 빠르게 변했다.
손끝까지 그 울림이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진 않았겠지만 혼자서 고독하게 느껴야 했던 그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신경이 귀로 밀집되어 하찮은 소리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마침내 기다렸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누구세요?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안 되겠어요. 돌아가 주세요.”
더 이상 울먹이는 목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결코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는 뭔가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보통은 스스로를 밝히고 그녀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여기는 그녀의 집이고, 이것은 그녀의 문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로드리고는 말없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왜일까?
그는 그녀의 결정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만나야 한다.
당위적인 어떠한 이유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나야 한다.
그녀를 위로할 자신은 없다.
오히려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당최 여자를 이해한다는 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쩌면 여자뿐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복잡하고, 비논리적이고, 골치 아프다.
그래도 언젠가...아니 곧...스스로의 목소리로 뭔가를 말해야 한다.
다만 그 시간을 잠시 늦출 뿐이다.
10초...
어쩌면 1분...
운이 좋다면 5분?
톡! 톡!
짧게 두 번이다.
어젯밤 그가 들었던 두드림과는 다르다.
두드리는 손놀림에 어떠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로드리고는 자기가 만들어 낸 울림을 들으며 조심스러움과 정중함을 느꼈다.
“오늘은 정말 안 돼요.”
안에서 다시 엘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엘가는 문을 열어 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어제 한스가 두드렸던 손놀림을 흉내 낸다면 겁에 질린 엘가는 문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
로드리고는 그 손놀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흉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드리려했다.
하지만 주먹은 금세 풀어지고 만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엘가를 보고 싶다. 하지만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하고 싶은 건 아니야.
“저예요.”
마침내 로드리고는 스스로를 밝혔다.
“......”
하지만 다시 대화는 끊긴다.
로드리고는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와 그 사이에는 단순히 문 하나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먼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커다란 공백이다.
이를 악물어도... 서로의 합의가 있어도...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 될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로드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엄두는 나지 않지만 로드리고는 어쨌든 스스로의 발을 그 공백 사이에 집어넣는다.
아득한 기분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저기...손수건 찾았어요. 꼬마가 가져와서 요 앞에서 받았어요. 물론, 대가도 지불했고요. 여기서 계속 기다렸거든요. 누나가 들어가고 나서 계속요. 문 옆에 앉아서 말이에요. 다행히 그늘이 져서 그렇게 덥지는 않았어요.”
그의 발버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되어 조금씩 퍼져나갔다.
멀리 있던 엘가에게도 그것이 느껴진 것일까?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왜...기다린 거야? 손수건은 내가 맡아두었다가 나중에 돌려줘도 됐을 텐데...”
책망하는 투는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미안해 투가 역력하다.
“손수건 때문에 기다린 건 아니에요.”
“...그럼...?”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수많은 감정이 함축되어 있었다.
로드리고는 그걸 느꼈다.
아련한 추억과 달콤한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기대감이 그대로 그의 가슴을 흔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두려움과 슬픔, 체념이 뒤를 잇는다.
가슴 설레는....그리고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물과...흐릿하게 변하는 시선...
말문이 막혔다.
로드리고는 딱히 엘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호감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그녀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녀의 뜨거운 입술을 느끼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녀의 품에서 온기를 찾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나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눈에 보이지 않는 테두리에 갇혀 시간이란 풀을 뜯으며 제자리에 서있다.
그녀에게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아직도 낯설기만 한 창녀다.
겨우 어제 만났을 뿐이다.
직업도 하찮고, 어울려서 좋을 것은 없다.
남들의 손가락질에 몸을 떠는 그녀에게 내 옷을 벗어 덮어줄 필요는 없다.
아무도 그것을 종용하지 않는다.
나는 이곳과 완전히 동떨어진 장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어떻게 보아도 외부인이다.
나는 그저 모두와 똑같이 내 손가락을 들고 그녀를 가리키며 음울진 비웃음을 흘리면 될 텐데...
로드리고는 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성인도 아니다.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돕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멀찌감치 서서 자신이 불쌍한 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런 사람이다.
불행이 자신에게 닥치지 않게 신전에 기부하고, 미리 발 빠르게 움직여 피해가는 사람이지 않던가?
머릿속에 생각이 어지럽게 소용돌이 쳤다.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멀리 사라져버린다.
엘가는 끈질기게 문 맞은편에 서서 로드리고의 대답을 기다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떠한 말이 나오든 그것을 그다지 훌륭한 답변이 되질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려도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알아...
알고 있는데...
돌처럼 굳어 움직일 줄 모르는 다리를 내려다본다.
조급함은 사라졌다.
그는 기억 저편에 자리 잡은 기다란 줄을 당겼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채운 것은 비욘느였다.
항상 그의 망상과 추억과 삶을 함께 해주었던 여자.
나의 꿈.
나의 희망.
나의 이유.
갖지 못한 나의 아쉬움이 언제까지나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엘가에게서 나의 모습을 본 거야.
그래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제야 로드리고의 입술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
“뭔가 언짢은 기분 들 때, 계속 혼자 있으면 서글퍼요. 저는 그 기분을 알아요. 원하는 것을 위해 힘껏 손을 뻗어도 도무지 닿지 않는 분한 기분을 알아요. 저는 그래서 갈 수 없어요. 누나가 이 문을 열었을 때, 일말의 기대감이 남아있다면 저는 그걸 저버리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나는 기대하지 않아.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나는...나를 알아.”
서글픈 목소리다.
“모두 자기 자신을 알죠. 저도 저를 알아요.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전부 알지는 못해요. 아마 스스로를 전부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는 누나가 모르는 누나를 알아요.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알아요. 누나가 좋아하는 게 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누난 뭔가를 좋아해요. 현실과의 괴리감은 항상 속삭이죠. ‘그만 포기해. 너는 하찮아.’ 그래도 현실이 엉망이면 엉망일수록, 혹은 그 괴리감이 크면 클수록 더 거기에 집착하게 되요.”
“무슨 말인지 몰라. 난 몰라. 전부 이상해.”
“이상하지 않아요. 도울 수 있으니까 저 같은 애까지 도와주는 누나가 더 이상하죠. 문 열어봐요. 배고프니까 뭐라도 같이 먹어요. 제가 점심 살 테니까.”
“...싫어. 다시 그런 일 당하고 싶지 않아.”
체념과 고집어린 목소리다.
“그럼 제가 다 때려줄 테니까 같이 가요.”
로드리고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일 하면 안 돼.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그렇죠. 그냥 손님일 뿐이니까. 그렇죠?”
“...그만 가. 오늘은 됐어. 정말...됐어. 그리고 고마워.”
“싫어요. 얼굴을 보여줘요.”
“내 얼굴...지금은 엉망이야.”
“그래도 상관없어요. 조금 더 기다릴 테니까 열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