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99화 (99/200)

00099  어두워지는 밤, 밝아오는 새벽  =========================================================================

로드리고는 엘가와 점심을 먹었다.

상점가까지 가는 길에 다행히 그녀의 고객을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둘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체온이 전해져 왔다.

로드리고는 그 감촉이 좋아서 손에 조금 힘을 주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간간히 웃었다.

딱히 웃을만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용히 웃어주는 반응이 로드리고를 조금 들뜨게 만든다.

둘은 꽤 비싸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종업원은 친절했고,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안내 받은 자리는 2층의 발코니 부근.

시선을 돌리면 밖이 내다보인다.

적당히 음식을 시키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는 대체로 시시한 농담이 주를 이뤘다.

식사를 마치고 로드리고는 그녀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엘가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로드리고가 고집을 부리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기 전에 엘가가 말했다.

“오늘은 고마워. 한결 기분이 좋아졌어.”

“그거 다행이네요.”

“이제 다시는 못 보겠지?”

“글쎄요?”

“잘 가.”

“엘가도 잘 지내요. 뭔가 더 어떻게든 해주고 싶지만 저도 부자는 아니라서...”

“아니야. 이미 충분해.”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로드리고는 혼자서 걸음을 옮기며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미적지근함이 남는다.

하지만 이제는 전부 끝난 일이다.

더 이상 여기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 여관에 들어섰다.

다행히 낸시는 혼자서 점심을 먹었다고 했다.

돈을 쥐어주고 가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로드리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낸시는 오랜만에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그는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네. 원래는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좀 잘게.”

----------------------------

브라우닝 가문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이미 경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훨씬 엄했기 때문이다.

조금 딴 생각이라도 했다가는 이내 호명되거나 제이미 경의 목검이 공격해 들어왔다.

크레이머 남작의 방문 탓일까?

기사들은 그의 방문 기간이 짧기를 기도하며 훈련에 임했다.

그런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비욘느였다.

그녀는 창문에 몸을 기대어 나른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흥...거짓말쟁이.”

그녀의 중얼거림으로 보아 아무래도 뜻대로는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막 문을 열고 방으로 누군가 들어선다.

비욘느는 여전히 흐트러진 자세로 고개만 까딱 돌려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자마자 비욘느는 어물쩍 자세를 고친다.

다름 아닌 예법선생 세뇨르였기 때문이다.

“방금 그 모습은 무엇이지요?”

세뇨르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묻는다.

“어머~! 뭐 말씀이신가요? 세뇨르 선생님?”

비욘느는 눈을 깜박이며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정숙한 레이디는 그런 자세로 앉아 있지 않습니다!”

세뇨르는 엄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비욘느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별반 신경 쓰지 않으며 말을 받는다.

“아무리 정숙한 레이디도 혼자 있을 때야 모르는 일이지요. 이상한 자세로 앉아 있을 수도 있고, 경박한 웃음소리도 내고, 방귀도 끼고 뭐, 그런 거지요. 혼자 있을 때는 모르는 거예요.”

“만약 그런다면 그건 정숙한 레이디가 아닙니다!”

“그럼 나는 정숙한 레이디가 아니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겠네?”

약 올리듯 웃는 얼굴로 세뇨르의 비위를 건드리는 비욘느.

이에 세뇨르는 분을 참는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물론, 아가씨는 정숙한 레이디가 아니죠.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제가 있는 겁니다. 저라면 기필코 아가씨를 정숙한 레이디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자작님은 그걸 위해 저를 고용하셨고요.”

“아무튼 몰라. 오늘은 수업 받을 기분이 아닌걸. 잠깐 산책 좀 하고 와야겠어.”

“사람들은 원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일반 농노들도 그럴 진데 귀족인 아가씨께서 모범을 보이지 않으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아랫것들이 보고 배울까 무섭군요.”

“그래? 나는 별로 안 무서운데? 농노들 중에도 부지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사람도 있겠지. 그건 귀족도 마찬가지야.”

“귀족 중에는 게으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내가 최초의 게으른 사람인가? 그것 괜찮은데? 아무튼 최초니까.”

“그런 건 최초여도 절대로 괜찮은 게 아닙니다!”

“아휴~! 알았어. 알았어. 그러다 세뇨르 선생님 얼굴이 폭발하겠는 걸? 조금 진정해.”

“아가씨만 제대로 하시면 제가 흥분할 일도 없겠지요.”

“어머~! 그렇군요~! 그럼 세뇨르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제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오호호호호~!”

비욘느는 과장되게 높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그렇게 웃으시면 안 됩니다!”

“왜? 제대로 교육 받은 대로 웃고 있는 걸?”

“저는 그런 식으로 교육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명백히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모습이에요.”

“뭐, 그럼 내 의도는 제대로 반영됐나봐.”

“으~~~!!!!”

세뇨르 선생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는 두 주먹을 불끈 쥐는 포즈를 취하며 억눌린 목소리를 흘린다.

정말로 더 이상 했다가는 세뇨르 선생이 어떤 짓을 할지 몰라 비욘느는 재빨리 정숙한 자세로 근처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선생님, 어서 수업을 해요.”

두 눈을 반짝이는 발랑 까진 레이디를 바라보며 세뇨르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식사 예절과 귀족간의 인사 예절에 대해서 다시 복습해 보지요 물론, 전부 몇 번이고 배웠던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같이 크레이머 남작가문에서 방문한 경우에는 사소한 실수로 아가씨의 평가가 낮아지는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더욱 조심해서 몇 번이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세뇨르 선생의 수업을 들으며 비욘느는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그런 잘 알지도 못하는 귀족이 방문한 게 뭐 대수라고 이런 지루한 걸 다시 반복한담?

아...어제 그 남자애 만나고 싶다.

어떻게 검을 그렇게 잘 다루지?

정말 천재라는 거 처음 봤어.

제이미 경은 아무래도 가르쳐 줄 것 같지 않고...고집 센 늙은이...

그 아이한테라도 배워야 할까?

나 꽤 귀여운 편이라고 했으니까 제이미 경이 말한 여자의 무기로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공방에서 사흘 뒤에 찾으러 오라고 했으니까 분명 이틀 뒤에 공방에서 볼 수 있을 거야.

혼자서 완연히 다른 생각인 비욘느였지만 다년간의 경험으로 적당히 세뇨르 선생의 수업을 듣는 척 하며 간간히 이어지는 질문에 대답한다.

몇 번이고 질리도록 들었던 내용이라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수업을 마치며 세뇨르 선생이 말했다.

“이정도면 오늘 저녁에는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실 수 있을 겁니다.”

벌써 4시.

세뇨르 선생이 떠나자마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들어와 치장준비를 하려 한다.

하지만 비욘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5시부터 해도 되잖아? 좀 쉬었다 할래. 어차피 저녁은 7시에 먹는 거 아니야? 시간은 충분하니까. 방으로 늦지 않게 갈 테니까 걱정 마.”

시녀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비욘느는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제이미 경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기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다.

멀리서 봤던 것보다 훨씬 심하게 훈련을 시킨 모양이었다.

더 다가가고 싶었지만 조금 분위기가 무거워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인적이 드문 정원으로 찾아든다.

보통 사람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 곳이다.

그런데 누군가 있다.

얼굴을 본적이 없는 남자애였다.

하지만 손에 검을 쥐고 휘두르고 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꽤 날카롭다.

비욘느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 아이는 휘두르는 걸 멈추고 돌아본다.

조금은 유약해 보이는 선이 가는 얼굴의 사내아이다.

비욘느는 당연한 질문을 건넨다.

“너 누구야?”

0